소설리스트

〈 108화 〉108화 (108/370)



〈 108화 〉108화

“...그것도 싫거든?”


그렇게 말한 크리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얌전히 말을  듣나 싶었더니, 이걸 노리고 있었... 응? 너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런 나를 보고서 의아해하며 묻는 크리샤에게 그렇게 대답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도.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끈적끈적하게, 그녀가 내게 남겼던 흔적이. 기억이 때때로 이렇게 나를 괴롭혀 와도, 이제 와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이다.

하물며 이곳에서는.

“그래?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뭐야, 걱정해주는 거야?”


“하? 내가? 너를? 왜?”

질색하면서 그렇게 되묻는 크리샤가 보였다. 그래, 이래야지 크리샤지. 쥐꼬리만큼 호감도가 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크리샤의 모습에 심심찮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자니 그런 나를 보고서 크리샤가 말을 이었다.


“뭔가 오해하는가본데. 정말로 너 같은 건 이~만큼도 걱정 안하거든?! 단지, 지금부터  눈이, 정말로... 그거인지 확인 해볼 거니까. 네 녀석이 비실거리면 할 수 없잖아? 그래서 그런 거니까 절대로 오해하지 말라고!”


그렇게 덧붙이며 말하는 크리샤를 보고서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런 오해는 안하니까 걱정 말고. 그나저나, 내 눈은 그렇다치고서. 네가 찾았다는 그건 진짜긴 해?”

“이상한걸 걱정하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라고 생각하는지 진짜로 말해도 되려나. 아니지,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확신에  크리샤를 보아하니, 뭔가 근거가 되는 거라도 있는 모양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서 나는 내 옆에 있던 에루나를 바라봤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주인님.”

에루나가 옆에 있기 때문에 그것, 그거, 이렇게 대화하고 있자니 영 불편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서 끝이었다.

“에루나, 깜빡한 게 있는데. 잠깐 천공성으로 돌아가서 내   가져와줄래?”

“검이라면...”


“‘광휘’ 말이야. 혹시 모르기도 하고... 여기에 드워프들도 있잖아? 이 기회에 한 번 살펴봐달라고 이야기 해보려고 했었거든.”

다른 검이라면, 굳이 에루나가 갈 필요가 없었지만 광휘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광휘는 오직 나만이 들 수 있는 검이었다. 정확히는... 루시아에게 허락을 받은 존재만이 들 수 있는 검이었다. 나, 그리고 나에게 완전히 예속되고, 루시아에게도 인정받고 있는 에루나만이 들  있는 것이다.


에루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대놓고 노린 일인걸, 에루나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애당초, 루시아가 선물해준 광휘를 ‘깜빡’하고 놓고 왔다는  자체가 내가  법한 짓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제까지 루시아를 비롯한 모두에게 받은 물건들은, 내가 직접 지닐 수 있는 한은 항상 들고 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몸이 좀 무겁긴 하다만, 사람의 정성이란  있는데 방에만 처박아두기엔 그랬다.


망설이는 에루나를 보고서, 크리샤가 입을 열었다.

“뭘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영지야. 그리고, 아니꼽긴 하지만 저 녀석의 곁에는 내가 있을 테니까 이곳에서 감히 저 녀석에게 위해를 가할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그런 크리샤의 말에 에루나가 나를 바라봤다. 그런 에루나의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다는 의미로. 에루나가 이렇게 경계태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 그 무렵의 이후라는걸 생각하면, 아마도 에루나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크리샤일테니 말이다.  크리샤가 저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아무리 에루나라도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샤 아가씨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공간이동마법을 영창하고는 이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른거리며 휘발하는 보랏빛 마력을 바라보다가, 쿡하고 옆구리를 찌르는 크리샤를 봤다.


“뭐하는 거야? 에루나가 돌아오면 귀찮아지니까 빨리 확인하러 가야지.”


“그랬었지.”

감정이라도 실렸는지 세게 찔린 옆구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시간이 없긴 했다. 일단 광휘를 내 나름대로 꽁꽁 숨겨두긴 했지만 에루나라면  분이  안 걸려서 찾아낼 테니 말이다.

나는 크리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건... 아, 이제 에루나가 없으니까 상관없나. 편린의 파편을 어째서 이런 곳에다가 보관한 거야?”

내 말에 크리샤가 눈을 찌푸렸다.

“보관 같은 게 되면, 우리가 그런 위험한 물건을 내버려뒀을 리가 없잖아.”

“응?”


크리샤의 대답에서 이상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보관이 되지 않는 물건이라는 거지?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보관이 되지 않는 물건인데, 크리샤의 말대로라면 편린의 파편이 ‘이곳’에 있는 것이 맞았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데...


나는 괜히 품에 넣어뒀던 드래곤 콜이 잘 있나 살펴봤다.

크리샤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던 거라면? 지금  곁에는 에루나는커녕 광휘조차 없었다. 있는 거라곤 보석이 잔뜩 달린 드래곤 콜뿐이었다. 하지만 크리샤가, 이런 지근거리에서 내가 드래곤 콜을 써서 다른 드래곤들을 부르는 것을 내버려둘 리도 없었다.

나 설마 낚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크리샤가 걸음을 멈춰 섰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성문 같은 것만 있었다. 그 밑에는 초소병인 모양인지 두 드워프만이 우리들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한 드워프가 외쳤다.


“크리샤네아 전하! 혹 밖으로 나가실 예정이십니까?”

“그런거 아니야. 그보다... 혹시 거기서 보이는 거 있어?”


드워프의 물음에, 되려 질문으로 대답한 크리샤의 말에 드워프가 사방을 살펴보더니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대답했다.

“네... 네! 보입니다. 인간...들? 서른 명 정도로군요. 혹, 크리샤네아 전하의 손님이온지?”

“인간이라니...”

내가 의아해하며 크리샤를 바라봤다. 하지만, 크리샤가 여기까지  목적이 그것들인 모양이었는지, 드워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부른 녀석들이야. 그러니까 미리미리 문을 열어둬. 환영할 필요도 없지만, 막아설 이유도 없으니까. 자세한건... 나중에 리무르가 오면 설명해줄테니까.”

크리샤의 대답에 알겠노라고 대답하는 두 드워프를 봤다. 드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드워프가 장치를 움직이자 거대한 테 베르나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크리샤에게 물었다.


“인간이라니. 무슨 이야기야?”


“...말했잖아? ‘편린의 파편’같은 것이, 보관이 되는 물건이였다면 우리들이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라고. 실제로... 파편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네 눈이잖아?”

크리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혹시나하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내심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갖고 있는 기능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능력이 바로 이 눈, 주시자의 눈이니 말이다.

혼자 랭크도 EX라는 동떨어져있는 존재인데다가 설명이나 효과도 ‘보는 눈’이라고 단순하게 쓰여 있을 뿐인 능력.


그런 주제에 마력을 보거나, 과거를 보거나, 이것저것 기묘한 능력을 가진 주시자의 눈의 정체가 편린의 파편이라면 그 기묘함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귀찮다고, 생각하는걸 그만두지 말아줄래? 너, 그거  엄청나거든?”


“그렇게 티나?”


“그래.  엄청 나. 갑자기 얼굴이 멍청해지니까.”

그랬었나.


실제로 크리샤의 말과, 내 눈이랑 뭔 상관이 있는 건지 생각하고 있다가 귀찮아져서 생각을 포기했었는데, 그게 그렇게 티가 날줄은 몰랐다.


“아무튼, 결론만 말하자면... 편린은 ‘보관’이 가능한 물건이 아니란거야. 그야, 시도 때도 없이 위치를 바꾸는 녀석이니까.”


“어?”

“그러니까,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네 눈에도 ‘편린의 파편’이 깃든 거지. 그런걸 어떻게 모아서 보관해?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도 모르는데.”


크리샤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할  있었다. 그런 물건이라면,  세계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나, 물건들... 예를 들어 초월자들이나 그들이 저작한 책들, 혹은 물건들을 죄다 수집하고 관리하는 드래곤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인간들이...”


“네 생각이 맞아. 내가 찾은 편린의 파편, 그건  인간들이 가지고 있어 정확히는...”

크리샤가 손을 움직이자, 둥실하고 어디선가 많이 봤던 구슬이 떠올랐다.


이내 구슬이 누군가가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회색빛의 머리카락.

빛이 바랜 듯, 혹은 빛이 빠진 듯. 그런 머리카락이 달리는 말 위에서 나부꼈다.

소녀였다.


수녀처럼.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품에 들고 있는 고리를 쥐고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저 아이야.”


“...응?”

“더 정확히는 저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검, 저 녀석들은 ‘천검’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그 검이 내가 찾은 편린의 파편이야.”


크리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소녀를 살펴봤다. 하지만 검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소녀는, 무척이나 어린 소녀였다. 원래 세계였다면 이제야 갓 중학생을 나왔을 법한 어린 소녀. 그런 소녀의 ‘검’이 편린의 파편이라니.

“너도 알까 모르겠는데. 저 아이, 인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더라고. 최연소 검주이자, 처음으로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용사의 후계’이자 동시에 신탁을 받아 천신교였나? 인간들의 종교에서 선택받은 성녀.”

“...이름 한  더럽게 거창하네.”

최연소 검주, 용사의 후계, 거기에 성녀까지.


엄청나게 나열되는 이름들을 듣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크리샤의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전에 에루나에게 들었던  세계에 있는 검주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린 검주. 열 넷의 나이로 검주의 반열에  소녀.

“천검 아리스...?”


“응? 알고 있었네. 맞아,  아이의 이름이야.”

 중얼거림에 그렇게 대답한 크리샤를 보며, 나는 구슬에 비쳐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든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


강렬한 위화감.

어떤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기서 그렇게 멍하니 있으니까 다들 널 봉으로 보는 거지. 안경은 또 그게 뭐야? 그게 너희 나라에서 유행하는 거야? 진짜 안 어울린다.’

그렇게 말하며, 멋대로 팔짱을 끼고서 말하던 소녀의 얼굴이.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제 끝! 자, 이 프로 가이드한테 맡겨만 보라고. 내가 이번 기회에 멋쟁이로 만들어줄테니까. 걱정 마. 싸게 해줄게. 200페소면 되니까? 물론,  물건들의 계산은 너가 하는 거고.’


“한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녀가 아니다.


닮긴 했지만, 그녀가 아니다. 그녀일 리가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했다. 아니,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죽었으니까.

이곳에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소녀를 바라봤다.


나긋나긋한 눈매가. 건강한 붉은 기운이 감도는 입술이,  밑으로 살짝 내려오는 짧은 단발이. 모두 그녀를 닮아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그녀는 회색빛깔의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그녀는 저렇게 어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녀는 내가 있던 세계에서 살고, 죽었다.


저 소녀는 이 세계에서 태어나서, 자란... 아리스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최연소로 검주가 된, 천검 아리스. 그것이 저 소녀의 이름이였다.


한나가 아니라. 아리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용사 ‘아리스 라 브란데냐 블론드 데 드네아’를 발견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보유한 칭호 ‘부덕의 군주’가 이에 반응합니다.]


귓가에 들려온 알림과 함께 지끈하고, 머리가 아파왔다.

[조건이 부족합니다.]

[조건이...]


구역질이, 치솟았다.


“우읍...!”


“뭐야? 왜 그래?”


입을 틀어막고서, 구역질을 삼키는 나를 보고서 크리샤가 놀란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조건이 부족하여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속한 운명이 움직입니다.]


내게 속한 운명.

귓가에 들려온 알림에,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로로...?”

나의 운명이 아니라.

나에게 속한 운명.


그렇게 부를만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거둔 운명.

저주받았던 한 아이를 구원함으로써, 그 아이를 대신해서 짊어졌던 운명.

그것이 왜? 지금...


띠링~


[해당 운명을 제어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부족합니다. 해당 조건을 충족해주십시오! 주의, 조건이 계속해서 부족할 경우 해당 운명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재차 들려온 알림에, 그것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 ‘운명’이 다시 로로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에.


그리고 혼란해하는 내 귓가에 쐐기를 박듯이, 그 알림이 울려퍼졌다.


띠링, 하고.

[현재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속한 존재 '로로'가 해당 운명의 본래 소유주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되는 존재를 제물로 '마왕 소환'을 진행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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