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107화
그 뒤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크리샤의 영지. 슈페리아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니지. 돌아다니기만 한건 아니었다. 관광 따위나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돌아다니면서 만나게 된, 수많은 종족들의 대표들.
슈페리아에 있는 얼마 없는 숲에서 살고 있다던 소수의 웨어울프들. 그들의 대표라고 했던 카울인지 뭐시기하던 커다란 늑대나, 또 마찬가지로 크리샤의 영지에서 살고 있는 소수의 엘프들... 아니, 정확히는 엘프들의 아종인 산악엘프들의 대표라는 자인 에클레나라는 여자나, 아무튼 그 밖에 여럿들과 만났다.
바다 자체를 영지로 삼고 있는 아샤나 아냐의 아드리아 다음으로 넓은 영지인 슈페리아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일부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몬스터’ 취급을 받고 있는 이들까지. 이곳에서는 하나의 종족으로써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덕분에 내 일이 늘긴 했지만.
무척이나 많은 이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오해를 풀었다.
루시아가 이 영지에 퍼트린 오해를 말이다.
나랑 크리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무슨 이유로 그런 소문을 퍼트린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오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풀고 다녔다.
뭐,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자, 내 말이 맞지? 하고, 내가 오해를 풀었다 싶으면 나타나서, 내 옆에서 가슴을 피며 말하던 크리샤를 보고서는 정말로 ‘헛소문’이 맞냐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던 카울이나, 에클레나나, 그 밖에 여러 종족들의 대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기서는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닌 척이라도 해야지. 굳이 제대로 설명한 거 맞지? 하고 확인하듯이 내 등을 콕콕 찌른다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안되지 않나 싶었지만, 그 말은 크리샤에게 하지는 않았다.
할 필요가 없으니까.
크리샤가 내게 원한 것은 오해를 풀어달라는 거였지. 자기가 기껏 푼 오해를 다시 하게 만든 것까지 풀어달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거기까지는 내 관할 밖이라는 소리였다.
아무튼, 며칠을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다 보니, 결국 만날 종족도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이걸 성과, 라고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순순히 크리샤의 말대로, 여러 종족들의 대표들을 만나서 오해를 풀고 있자니 크리샤를 놀려먹느라 떨어졌던 호감도가 조금은 복구되기까지 했다.
물론 아주 조금뿐이긴 했다.
그래도 일부로 잃었던 호감도라고는 해도, 복구됐다는 사실은 좋으면 좋은거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기나긴 여정이였다고 생각한다. 힘도 들었고.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과 연속해서 만나가며 대화했던 건 내 인생에서도 처음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옆에 있던 크리샤에게 확인 차 물어봤다.
“다음은 드워프였지?”
“그래. 내 영지에서도 가장 많은 수를 자랑하는 드워프들. 덕분에, 오해도 꽤 깊어서 말이지. 이번에도 제대로 해주길 바랄게.”
“...나야 제대로 하고 있기는 한데.”
문제는 너다. 너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것’이 있으니까. 이번에 확인도 해볼 거야. 준비는 됐어?”
“...뭐, 대충은.”
크리샤가 그 사건, 그러니까... 내게 ‘편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던 일 이후에, 이곳저곳 돌아다닌 끝에 찾아냈다는 ‘편린의 파편’. 그것이 있다는 소리에 어쩐지 심장이 욱신거렸다.
며칠 동안, 크리샤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오해를 풀고 다니던 동안. 사실 내 머릿속을 꽉 채워놓고 있던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자, 그럼 간다?”
확인하듯이, 그렇게 묻는 크리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눈앞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흔들...
일변하는 세계.
그리고 눈 깜빡하는 사이에, 내 눈앞에 있던 것들이 모두 바뀌었다.
그런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사실 크리샤를 따라 슈페리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항상 처음 보는 얼굴들만 봤기는 했지만.
흰 수염이 턱 끝에서부터, 가슴까지 내려오고 있는 땅딸막한 키의 노인이었다. 턱 끝에서부터 가슴까지라고는 했지만 키가 워낙 작아서 그렇지, 그다지 긴 수염도 아니었다. 낙시안을 닮은, 구릿빛 피부. 작은 키와 늙어보이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내 것보다도 훨씬 더한 근육질의, 장인의 팔을 갖고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그런 노인이, 아마도 드워프인 노인이 가슴을 두들겼다.
쿵!
가슴이 아니라 북이라도 친 줄 알았다. 덕분에 살짝 놀랐던 나를 보며, 드워프 노인이 말했다.
“테 베르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크리샤네아 클레오시여!”
“그런 거 아니거든!? 그때 덜 구워졌다 이거지?!”
“하하!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시온지... 정말로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사옵니까?”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화를 내는 거다, 이 바보천치야!”
그런 노인의 말에 발끈하는 크리샤와 티격태격하는 노인이 보였다.
“뭐라고 했길래 저래?”
그런 크리샤에게 물어봤자, 대답해줄 것 같지가 않아서 나는 내 뒤에 있던 에루나에게 물었다. 요 며칠간, 나를 따라왔지만, 내 행동에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었던 에루나에게. 심지어 밤마다, 혹은 내가 몸을 씻는 동안 욕탕에 쳐들어오던 일도 그만뒀던 에루나에게. 그런 에루나였지만, 내가 직접 묻는 말에까지 대답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 물음에 에루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크리샤네아 클레오, 고대어로 ‘고결한 대지의 반신’입니다. 즉, 크리샤 아가씨의 반려라고 말한 겁니다.”
“아, 그래.”
크리샤가 발끈한 이유를 알게 된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쪽의 드워프.”
내 말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던 드워프가 말했다.
“아,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이 곳, 위대하신 우리 크리샤네아 전하가 허락하신 드워프들의 땅. 테 베르나의 장로를 하고 있는 레무르라고 하옵니다.”
“그래? 레무르. 만나서 반갑지만, 우선 이야기하기 전에 오해를 풀고 싶군.”
내 말에 레무르라는 이름의 드워프가 큰 눈을 끔뻑였다.
“오해라하옵시면, 대체 어떤 오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아, 방금까지 자네가 크리샤에게 말하고 있던 걸 말하는 거다.”
“제가 말하고 있던 것이라면...”
레무르가 나와 크리샤를 번갈아봤다. 그런 레무를 보며, 크리샤가 코웃음을 치면서 가슴을 펴보였다.
“자, 똑바로 들으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눈짓을 하는 크리샤가 보였다. 정말로, 저래서야 풀릴 오해도 풀리지 않는다는 걸 어째서 모르는 걸까.
“그래, 오해는 풀어야하는 거니까.”
내가 레무르에게 사실을 말하려고 할 때였다.
“내가 저런 인간이랑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 리가 없잖아? 잘 듣고, 오해가 풀렸으면 당장 나한테 사과하라고!”
의기양양하게,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가 보였다.
심기가 뒤틀렸다.
누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저러고 있는 걸보니 배알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한번이다. 딱 한번뿐이니까. 조금 장난 정도는 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아, 그 말 그대로다. 레무르. 안타깝게도 크리샤와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런...”
실망했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레무르가 보였다. 저 눈은 그거였다. 모처럼 놀려먹을 수 있었던 꺼리가 사라져서 실망했다는 눈이었다. 사실, 저런 눈을 하고 있던 것은 레무르가 처음은 아니였다.
산악엘프의 대표였던 에클레나라던가, 그 밖에도 여럿이 오해를 풀자 그런 눈으로 날 보며 실망했었다.
덕분에, 크리샤 녀석이 이곳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는 잘 알았다. 종족의 차이, 그것도 상위종족과도 격없이 놀리거나, 화를 내거나 하면서 지낸다는 것은, 그만큼 사이가 좋다는 뜻이니까.
적어도 크리샤 녀석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에게는 친절한 드래곤이라는 걸 잘 알았다는 거다. 그러니까, 여기서 조금 장난을 치더라도, 눈앞의 레무르라는 드워프가 해코지를 당하는 일은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냥 틀리다고 할 수도 없겠지. 뭘, 놀라지 말거라. 레무르. 나와 크리샤랑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다만, 크리샤가 열렬히 나한테 구애하고 있는 사이라고 해야 되나.”
“오, 오오오... 그 말씀은?”
“나는 인간인 몸이기는 하지만, 그 루시아네스와도 연분이 있는 몸. 아무래도 내 몸은 드래곤들의 취향인 듯해서 말이지. 즉,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크리샤쪽이 나를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오오...!”
내 말을 정말로 믿었다는 듯이 경이롭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레무르의 시선을 느끼면서, 어째선지 엄청나게 조용한 크리샤 쪽을 바라봤다.
“......”
이쪽을 어마무시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크리샤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따라 크리샤쪽을 바라봤던 레무르도, 그런 크리샤의 표정을 보고서는 비질땀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아, 이, 이거. 깜빡할 뻔 했군요. 저는 이만 두 분이 드실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도우러 가봐야겠습니다. 아무쪼록, 느긋하게 와주시길.”
그렇게 말하고서, 짧은 다리로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자리를 뜨는 레무르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 쫓아가서, 사실 그 반대고. 내가 크리샤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