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화 〉99화 (99/370)



〈 99화 〉99화

“너, 너...”


금방이라도, 나에게 마법을 쏘아 보내려던 크리샤가  옆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루시아의 바람의 칼날들을 보고서, 뿌득하고 이를 갈았다.

“네가,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결국, 크리샤가 꺼낸 카드는 내가 예상했던 것 중 하나였다.

크리샤의 말에, 나는 루시아의 가슴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왜?”


덤덤하게.

그게 뭐 어쨌냐는 듯이.

그런 내 모습에 크리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왜냐니... 네가 이전에 했던 약속대로라면...”

“아, 아아. 약속.”


크리샤의 말에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이,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확실히 그런걸 했었었지... 뭐였더라, 일 년 안에 너희들 모두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나.”


그런 말을 했었지... 또 그거랑, 일  안에 사랑해보이겠다는 말도 덤으로 붙여서.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그때 나는 무슨 낯짝으로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나 싶다.

이 세계 소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어서 잠깐 정신머리가 가출했던  아닐까.

아무튼, 내 말에 크리샤의 표정이 더욱 굳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안되면 안 되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 뭐. 별 수 있나... 어차피 별 상관없기도 하고.”

“상관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응? 몰라서 묻는  아니지?”


나는 히죽하고, 웃으면서 루시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루시아가 달뜬 숨을 내뱉으면서 하앙, 하고 움켜쥔 내가 부끄러워질 지경으로 노골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슬슬,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느껴서 이러는 것 같았다.


위험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어차피 일 년 안에 너를 꼬시지 못한다고 해도, 어차피 너는 나랑 아이를 만들어야 하잖아, 아냐? 결국 꼬시던 꼬시지 못하던, 나랑은  상관없다는 거지.”

“......”

“아아, 그래도... 나도 내가 싫다는 녀석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건, 전에도 말했듯이 조금 그래서 말이지... 뭐, 그때 가서 부탁하면, 특별히 아이는 만들어줄게.”

써걱!

내게 뻗어온 그림자가 바람의 칼날에 베여 사라졌다.

“루시아! 어째서 막는 거야?!”

크리샤의 말에 루시아가 당연한걸 왜 묻냐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야, 이지경님이 다치면 안 되니까요.”


“저 녀석이 하는 말 못 들었어?! 결국,  녀석도 똑같아! 다른 인간이랑 하등 다를 게 없는, 이기적이고 추악해빠진 인간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나를 공격하려는 크리샤를 가로막으며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요? 크리샤네아 슈페리아.”

그러고서는, 내게 안기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지경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 걸요.”

마치 홀린 듯이.

그래,  세계에 있는 매혹 마법. 혹은 정신 지배 마법.

그런 것에 걸린 것처럼. 루시아가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시선으로 크리샤를 보는 게 보였다.


나랑은 다른, 무척이나 완벽한 연기였다.


저게 연기인걸 알고는 있지만, 진짜로 나한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만 보였다. 아니, 평소에도 자유자재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표정을 바꿀 수 있던 루시아니까 연기도 잘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이정도인줄 몰랐는데.

이거라면 수십 년을 같이 알고 지내왔어도 속아 넘을게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너... 루시아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를 보는 크리샤의 시선이 바뀌었다.

분노로 가득했던 얼굴이, 경계와 의혹이 추가되었으니까. 이걸로, 크리샤는 나를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어졌으리라.

자신이 없는 곳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지켜보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리고 크리샤의 성격상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것은 안하겠지. 직접 날 감시하겠다고  게 분명했다.


자, 이걸로.

우선, 1차적 목적이었던 크리샤와 잦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뭐, 덕분에...

띠링~


[‘크리샤네아 슈페리아’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을 경계합니다. 호감도가 1만큼 감소합니다.]

띠링~

[‘크리샤네아 슈페리아’가 플레이어 ‘이지경’님...]

띠링~

[‘크리샤네아 슈페리아’가 플레이어 ‘이지경’님...]


얼마 있지도 않은 크리샤의 호감도가 주르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  없긴 했지만 속이 엄청 쓰렸다.


하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예 접전이 없으면 올릴 호감도도 없을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꽤 호감도가 내려갔는데, 아직 바닥은 아닌 모양이었다. 호감도가 0이하로 내려가면 나올 ‘원수’ 상태가 됐다는 알림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서, 새삼스럽게 크리샤를 바라봤다.

“대답해! 루시아한테 무슨 짓을...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 그리고, 에네스타 녀석도, 너를 이상할 정도로 따랐었지. 혹시 루시아한테도...”


크리샤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돼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마야와 니아를 보더니, 나를 바라봤다. 음, 에네스타나  둘의 경우에는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 루시아는 아니지만.

‘정보창.’

제멋대로 오해하고 있는 크리샤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띠링~

[호감도가 부족하여 ‘크리샤네아 슈페리아’의 정보창의 일부만이 공개 됩니다.]


「정보창」
「이름 : 크리샤네아 슈페리아
「칭호 : 보옥의 지배자, 창공의 용, 최후의 흑색용, 고결한 대지, 최강의 용」
「성별 : 여성」
「나이 : 40세」
「직업 : 보옥의 지배자」
「종족 : 인간(폴리모프)//드래곤」
「근력 : 104(S)//열람불가」
「민첩 : 102(S)//열람불가」
「체력 : 103(S)//열람불가」
「지력 : 128(SS)//열람불가」
「마력 : 224(SSS)//열람불가」
「매력 : 92(A)//열람불가」
「행운 : 83(B)」

「생명력 : 10300/10300//열람불가」
「마나력 : 224000/224000//열람불가」
「지구력 : 71%」

「고유 특성 : 보옥의 지배자(SS), 마도의 선구자(S), 내유외강(A), 이하 열람불가」
「보유 기능 : 마도의 극의(S), 그림자의 손(S). 이하 열람불가」


「상태 : 분노」

「호감도 : 4 (열람불가)」

“바닥만 아니지, 거의 바닥이긴 하네.”


“뭐?”

 실수로 입 밖으로 냈다.


크리샤의 정보창에 나와 있는 한없이 낮은 호감도를 보며 중얼거린 것을 크리샤가 듣고는 따지듯이 물어왔다.


음, 전에 편린이었나. 뭐시기 사건 때문에 크리샤도 내가 정보창이란 묘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걸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걸 남한테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내가 크리샤의 정보창을 보고 있다는 걸 알려줄 생각도 없는 나로써는 대충 대답했다.


“아니, 네 가슴말야. 루시아랑 비교하면 그렇다고.”


겸사겸사 크리샤의 어그로를  끌면서.


띠링~


[‘크리샤네아 슈페리아’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무례한 언동에 분노합니다. 호감도가 1만큼 감소합니다.]

얼마 없던 호감도가 더욱 감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알림을 들으며, 크리샤를 보자니 그런 나를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크리샤의 모습이 보였다.

“네, 네 녀석이 루시아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어...! 바보같이, 인간 따위한테 조종이나 당하다니...”


딱히 아무 짓도 안했다.

정말로.


조종이라니, 내가 루시아를? 그럴  있었다면, 당장 이짓거리를 하고  뒤에 잡혀있는 ‘보상’부터 어떻게 했을 거다.

뭐, 내가 그렇게 말해도 믿을 리가 없겠지만. 나는 크리샤를 보며 이죽이듯이 말했다.


“뭐, 열심히 노력해봐. 응원할 테니까.”


“...두고 봐.”

내 말에 크리샤가 그렇게 대답하고서는 이내 휙하고 사라졌다. 그런 크리샤를 대신에, 크리샤가 있었던 자리에는 검은 빛의 마력만이 넘실거리며 남아있을 뿐이었다.


음, 아직 놀려먹을 레퍼토리가 꽤 남아있었는데...

오늘은 이쯤하면 됐으니까 상관없나.


그렇게 크리샤가 떠나간 자리를 보고 있던 나에게, 옆에 있던 루시아가 말을 걸었다.


“이지경님의 부탁대로 크리샤를 자극하는 일에 돕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가요?”


“응. 어중간하게 미움 받는 것보단 차라리 이쪽이 더 편하거든.”

내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종족을 가지고서.

마냥 미워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 자신을 미워하는 쪽이 돌리기 편하니까.


“이지경님이 그렇다면, 상관없지만요. 그럼...”


첨벙, 하고 몸을 일으킨 루시아가 그대로 내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허벅지 위로 말이다.


그러고선 꾸욱, 하고.

루시아가 내게 가슴을 들이밀었다. 덕분에 루시아의 커다란 가슴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앞에 앉았다고 시야에 꽉 차버리는 커다란 가슴 쪽이 이상한 것 같지만...


그렇게, 온천 때문에 그런  같지는 않는 뜨거운 몸을 내게 바짝 붙인 루시아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지경님이 약속하셨죠? 제가 도와준다면... 보답으로 오늘 하루는, 제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약속은 했는데, 저기 루시아? 설마 여기서?”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문제야 많지.

이 온천이 크리샤의 온천이라는 거랑, 우리 둘은 그런 크리샤의 온천에 다짜고짜 쳐들어온 불청객이란 게  번째 문제였다.

또 다른 문제는...


“앗...”

나와 시선이 마주친 마야와 니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릴 꺼면 제대로 가릴 것이지, 손가락 사이로 이쪽을 빤히 보면서 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여기에 나랑 루시아만 있는  아니란 거였다.


“흐응...”

내 시선을 따라, 니아와 마야를 본 루시아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선 내게 물었다.


“보여주면서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이지경님은 어떠신가요?”


절대 사양이었다.




딱히 말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표정으로 전부 드러난 모양이었다. 나를 보던 루시아가 쿡쿡 웃었다.


“정말, 그런 표정을 지으며 진짜로 해버리고 싶잖아요?”

“부탁할 테니까 그러진 말아주라.”

벌써부터 그런 쪽으로 발을 내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모처럼의 기회기는 하지만, 이지경님에게 미움 받는 건 싫으니까요.”

“기회라니?”

“그런 게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루시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이쪽을 실시간으로 직관하고 있던 마야와 니아가 사라졌다. 대신에 그녀들이 있던 자리에 루시아의 마력이 아른거리며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여기에 불러왔던 것처럼, 도로 천공성으로 돌려보낸 게 분명했다.

그리고  변명거리 중 하나가 사라진 순간이기도 했다.

“자, 이걸로 방해꾼은 사라졌으니까... 계속 해볼까요?”

아직 문제는 많이 남아있는데 말이지.


“루시아? 잊은 건 아니지? 여긴 크리샤의 영지라고...”

그것도 허락도 없이 멋대로 쳐들어온 온천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 나중에 크리샤가 알게 된다면...


음, 차마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난리가 벌어질게 분명했다.

그런 내 말에 루시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슬쩍, 하고 내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는 곳을, 자신의 하복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런 루시아의 시선을 따라 밑을 내려 봤다가, 무안하게 미소 지었다.

거기에는 이미 준비만전 상태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었다.

콕콕, 하고 루시아가 장난치듯이 그런 드래곤 슬레이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이쪽은 솔직하신 걸요.”


이건 그냥 생리현상이라서 그런 거지. 거기가 모든 남성의 진심을 대변하는 물건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얘는 나랑 별개의 생명체라고 생각해줬으면.

크리샤가 있는 동안에는 최대한 억눌러왔던 반동에서인지, 예전에 한 번 봤던 최흉최악의 흉성을 내보이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세운 채 그렇게 말해봤자 믿을 것도 믿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루시아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입가에 얹은 채, 군침을 삼키고 있는 모습이 때마침 딱하고 보였다.

무심코 움찔하고 뒤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야, 루시아가 내 몸 위에 올라타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도 없으니 말이다.


“자아, 그럼 이지경님... 약속대로, 오늘 하루 동안은  말만을 들어주셔야 되요.”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를 보며, 이렇게 된 이상 그냥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칠 방법도, 도망칠 명분도 없었다. 애당초 도망친다고 해도 도망칠 곳도 없고.


결국 내가   있는 건, 그냥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뿐이다.


“...살살 좀 부탁할게.”


“으음~ 노력해볼게요. 그럼... 처음은 뭘 해볼까요?”

입가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띠운 루시아를 보면서, 나는  스스로를 위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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