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8화 〉98화 (98/370)



〈 98화 〉98화

"하,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여긴 네 영지가 아냐. 루시아. 이곳에서 네가 내 상대가  수 있을  같아? 시험해보자고? 좋아! 이번 기회에 누가 위인지 보여줄게!"

크리샤가 그렇게 말하고서는 족히 수백 개가 넘어 보이는 그림자들을 꺼내보였다.


저게 하나하나가 중급마법에 준하는 위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옆에서 루시아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크리샤가 꺼내든 그림자의 수와 거의 같은 수로 보이는 바람의 칼날을 허공에 띄웠다.

장관이었다.

크리샤가 꺼내든 수백 개의 그림자들이 꿈틀거리자, 마치 검은 짐승이 도약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루시아의 주변을 맴도는 바람으로 만든 칼날들이 회전하자, 옆에 있는 나는 마치 폭풍의 한 가운데에 있는 듯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루시아에게 부탁한건 나였지만, 이렇게 대판 싸우라고 부탁한건 아니었다.

"루시아! 그만! 싸우려고 온 것도 아니고, 난 무사하니까 그 쯤해둬."


내 말에 크리샤가 외쳤다.


"상관없는 녀석은 저리 빠져! 이건 나랑 루시아의 문제니까! 그리고 루시아가  녀석의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일단 상관이 없는 건 아닌데. 그리고, 루시아가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 하냐고?

응.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크리샤가 그림자를 쏘아 보내려는 순간, 루시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의 칼날들을 없애버리며 말했다.


"이지경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만두도록 하죠."

"...뭐?"

그리고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루시아를 보고서 크리샤가 입을 헤 벌린 채 그런 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뻗어나가려고 하던 그림자조차 벙찐 크리샤의 모습처럼 멈춰서서는 꿈틀거리는게 보였다.


내가 카메라가 있었으면 저 표정을 찍어두는 건데 없어서 아쉬웠다.


게임마냥 이벤트 신이 CG로 남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크리샤의 얼굴을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크리샤에게 말했다.

"뭐, 그렇다니까. 크리샤, 너도 그쯤 해두지 않을래?"

"내가 어째서 네 말을 들어야..."


"그건 그래. 딱히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지."

"...하?"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나를 보는 크리샤에게 잘 보이도록 품에서 한 장신구를 꺼내들었다.


일곱 개의 보석이 알록달록한 장신구를.

"크리샤, 네가 계속하겠다면 나도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모두 불러낼 건데. 나도 딱히 네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장신구의 정체는.


내 몸이 위험할 때, 내가 있는 장소로 드래곤들을 불러내는 내 필살 아이템.

딱히 이름은 없지만 굳이 붙이자면... 콜 오브 드래곤이었다.



"하아~ 기분 좋네요... 이지경님은 어떠신가요?"

"난 좀 뜨거운데. 크리샤 너는 어때?"


루시아의 말에 대답하고서 자연스레 크리샤에게 그렇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크리샤의 시선이었다.

"크리샤 너는 어때?"


그 시선에 쫄아서 닥치고 있을 생각은 없지만.

나는 내 팔목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콜 오브 드래곤을 흔들며 다시 물었다.

"...친한 척 하지 말아줄래? 인간 주제에."


"할건데?"

"네가 무슨 권리로...!"

"권리라면 있죠. 이지경님은 저희들이 다른 차원에서 소환한 분이니까요.  이유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테고요. 충분히 차고 넘치는 권리지 않나요?"

나를 대신해서, 느긋하게 온천물을 즐기고 있는 루시아가 말했다. 그런 루시아의 말을 들은 나는 다시 크리샤를 바라봤다.

"그렇다는데 크리샤?"


"잇...!"

쾅!

크리샤의 그림자가 저만치 있던 나무 하나를 쓰러뜨렸다. 이번 걸로 네 번째 나무였다. 처음에는 나와 루시아가 멋대로 온천에 들어왔을 때 쓰러졌고, 그 다음은 주변에 있는 크리샤를 본따 만든 조각상들을 감상했을 때, 세 번째는 그 조각상의 가슴 크기를 비교하고 있을 때 쓰러졌었다.

무자비한 자연 파괴의 현장이로구나.

"야, 저게 너보다 더 오래 살았을 텐데 그렇게 휙휙 쓰러뜨리면 너무 불쌍하잖아."

딱 봐도 백년은 훌쩍 넘게  나무 같은데. 이제 겨우 100살도 되지 않은, 드래곤의 수명으로 따지면 유아정도에 불과한 크리샤의 손에 허리가 똑하고 부러진 나무를 보며 그렇게 말하자 결국 첨벙하고, 크리샤가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너...! 도대체 목적이 뭐야?!"

나는 그런 크리샤의 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온천인데 혼자 속옷차림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면 뭔가요? 설마하니 인간이라며 우습게 여기던 이지경님에게 알몸을 보이는 게 부끄럽다던가? 하고 완벽하게 크리샤를 논파한 루시아 덕분에 지금 크리샤의 몸은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천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기 때문이었다.

아, 물론 나도 알몸이다.


루시아의 논리대로라면 나도 옷을 입으면 좀 그러니까.


하지만 부끄러움은 없었다. 알몸이야 루시아한테 몇번이나 보였고, 크리샤야 서로 알몸인데 부끄러워하면 그쪽이 더 부끄러우니까.


음...

크리샤는 아무래도 조금 다른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시선에, 크리샤가 손으로 몸을 가리고서는 외쳤다.

"이, 이 변태가! 어딜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아니, 그냥... 그나저나 크리샤, 너 가슴 밑에 점..."

"죽어버려!"


휙! 크리샤의 주먹이 날아오기에 가볍게 피했다.


뭘, 크리샤의 현재 민첩은 에네스타보다 못했다. 인간의 몸을 취하고 있는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에네스타를 이겨본 적은 없지만, 에네스타의 공격을 피한 적은 많았다.


내 눈에는 크리샤의 주먹이 한없이 느리게만 보인다는 거였다.


"왜 피하는 거야?! 이 변태자식!"

"아니... 그냥 맞아도 안 아프고... 오히려 네가 더 아플 텐데."

"시끄러... 꺄악!"

내 말에 다시 날아온 크리샤의 주먹을, 피하지 말라기에 피하지 않았더니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린 크리샤가 비명과 함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게 경고했는데..."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아니... 말로 그렇게 말해봤자, 나는 아마 수명을 꽉꽉 채워서 오래 살 것 같은데. 더군다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꽤나 늘어난 상태라서 얼마나 더 살지는 나도 모를 지경이고.

그나저나 검도 부러뜨리는거에 제대로 주먹을 부딪힌 크리샤를 안쓰럽게 보고 있자니, 그런 내 앞에 무언가가 들이밀어졌다.

생긴  달걀? 같은데... 그 생긴 것만 달걀이지, 어디 공룡 알이라도 되는 건가 싶은 것을 보고 있자니, 내게 그 달걀? 같은 걸 내민 장본인인 루시아가 말했다.


"이지경님, 이거 드셔보세요."


"어? 어."


루시아가 내민 달걀? 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큰 그것을 받아든 나는 멍하니 달걀? 을 내려다봤다.

"맛이 좋더라고요. 이 근처에서 살고 있는 화조의 알이라던데... 몇 마리 잡아가볼까..."

"아니, 그만 두지...?"

이름부터 화조라니 엄청 불길한데. 잡아갔다가 불이라도 날 것 같고. 그러다가 요정향이 있는 숲이라던가, 홀라당 타버리면 불쌍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런가요? 아쉽네요."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저만치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마야와 니아에게 손짓해서 화조의 알인지 뭔지를 추가로 받는 것을 보며, 나는 아직도 내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크리샤를 바라봤다.


말로  죽일 수 있다면, 지금 크리샤한테 찢기고 뜯기고 구워져서 몇 번은 죽었을 거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크리샤를 보며 내가 말했다.

"목적이 뭐냐고 물었지? 별거 아냐. 그냥, 바빠서 얼굴도 못비춘다길래 바쁜 널 대신해서 직접 와준 것뿐이니까. 어때, 고맙지?"


"……"


"이야. 그나저나 진짜 바쁘겠는데. 이렇게 커다란 온천에서 혼자만 쉬고 있으려니까. 장난 아니게 바쁘셨겠어."


예전에도 할까 말까 했다가 관뒀었지만.

사실 나는 크리샤같은 타입을 아주 잘 알았다. 누가 시킨다면 지금 당장, 쉬지 않고 한 시간은 크리샤를 놀려먹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놀려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크리샤는 내가 말을 걸어오자, 저주를 퍼붓는 거에서 아예 무시하기로 작전을 바꿨는지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서는 일절 나에게 관심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곳을 바라봤다.


정말로 안타깝게도. 크리샤. 그건 하책이다. 나는 너한테 관심을 끌려고 이러는게 아니니까. 내 목적은 따로 있으니까, 그렇게 해봤자 오히려 날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뭐, 내 진짜 목적을 안다고해도, 크리샤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만.

나는 고개를 돌린 채 나를 무시하는 크리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루시아에게 받은 화조의 알을 들이밀면서,


"근데 이거 너무 큰데. 너도 먹어봐. 조금 크긴한데 맛은 진짜 좋더라.“


휙휙, 크리샤에게 온천물을 뿌리면서,


"여기 진짜 물 좋네. 좀 뜨거웠는데 익숙해지니까 괜찮고. 나중에  와도 될까?“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크리샤?"

크리샤?


크리샤!


크리샤?!

반응이 올 때까지 쿡쿡, 계속 찌르듯이 말을 거는  노력 끝에, 결국 크리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루, 루시아가 있다고 시건방지게 기어오르는데... 루시아가 돌아가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또... 그게 있다고 네가 반드시 안전할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걸? 루시아랑, 그것만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인간 따위가..."


오...

드디어 물었네.

펄떡펄떡. 잔뜩 흥분한 크리샤가 내가 드리운 낚싯대에 걸리는 순간이었다.


분노.

딱히 그걸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이번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단순히 루시아를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향한 분노니까.


처음으로 내게, 오직 나에게만 향한 분노를, 감정을 내비친 크리샤를 보며, 나는 우물우물, 스푼으로 떠낸 화조의 알 노른자를 먹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난 루시아가, 그리고 다른 드래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데 크리샤. 그러고 보니 아까 나보고 변태라고 했었지?"


"...변태에게 변태라고 한 게 뭐가 나빠? 설마, 나한테 사과라도 받을 생각은 아니겠지?"


조소하며,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가 귀여워보이는걸 왤까.

날 놀려먹으려면, 에루나에게 한 수 배워왔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진짜 배워오지는 말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입을 열었다.

"으음. 확실히 변태한테 그런 거라면 네 말이 맞지만. 안타깝게도 난 변태가 아니라서."

좀 더.

"변명도 그런 변명이 없네.  가슴을 빤히 본 주제에..."

좀 더...

"아니, 본 건 맞지만? 딱히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거든. 크리샤, 네 가슴을 봐도."


좀 더 화내라.

"...하?"

그런 내 말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나를 보는 크리샤에게 말했다.


"그도 그렇잖아. 내가 루시아랑 다른 드래곤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히죽 웃으면서. 최대한 얄미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봐도 한  때려주고 싶을만큼 짜증이 나게.

크리샤의 역린을, 그녀가 갖고 있는 열등감을 꾸욱 찍어 눌렀다.

"네 가슴도 루시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 봐도 아무렇지도 않는 게 당연하지. 저기 루시아? 이쪽으로 좀 와볼래?“

 손짓에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며 화조의 알을 먹고 있던 루시아가 나를 보고는 말했다.

"무슨 일인가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다가온 루시아의 허리를 두르며 끌어안고서, 크리샤의 것과 비교하면, 정말로 크리샤의 가슴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루시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앙♡"


가슴을 움켜쥐어지자 달뜬 신음을 내뱉는 루시아의 교성을 들은 크리샤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봤다는 듯이 나와 루시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야, 내가 원하면 언제라도 루시아의 가슴을 만질 수 있는데. 네 가슴이 눈에 들어오긴 하겠어? 아까 말했지만 내가 네 가슴을 본 건... 가슴 밑에 점이 있어서 본 것뿐이고. 아, 걱정 마. 너도 작은 편은 아니니까. 그냥, 루시아가 너무 큰 것뿐이지."

"너무 크다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요? 흐읏♡"


"나는 그런 네 가슴이 좋으니까 괜찮지 않아?"

"그것도, 그렇...네요♡ 응♡ 거기, 좀 더 세게...♡ 이지경님이 좋다면, 더 키워볼까요? 가슴♡“


아니, 가슴으로 날 질식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그러지 마라. 루시아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저으며 크리샤를 보자, 입을  벌리고 있는 크리샤의 모습이 보였다.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서는 안됐다. 잘 보라고 이런 쇼를 하고 있으니까, 똑바로 봐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좀 더.


내게 감정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자존심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진짜 마음을 전부 다.


나는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가슴을 주물러지며 황홀한 얼굴로, 신음을 토하는 루시아를 보고 있는 크리샤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위에 꼭지를 보지 못했을땐 그게 가슴인줄도 몰랐고. 미안. 근데 어쩔  없..."


콰아아아앙!!!

뿌드득...!

솟구쳐오른 온천물이 후두둑, 나와 루시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와와하고, 크리샤 외에도 나와 루시아의 애정행각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던 마야와 니아에게도 쏟아졌다.


나와 루시아는 루시아가 펼친 마법으로 멀쩡했지만, 마야와 니아가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변해버렸다.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에오시스 자매들이 시중을 들 예정이었지만, 에네스타나 에오시스 자매는 크리샤 때문에 거의 탈진했고, 에루나도 소모한 마력을 채우느라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여서 하는  없이 천공성에서 불러온 거니까.


내 능력이 부족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쨌거나...

결국 폭발했구나.


나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검은 비늘이 돋아난 팔과 손톱을 드러낸 크리샤에게 말했다.


"왜? 가슴 작다니까 빡쳤어?"


물론, 좀  딜을 꽂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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