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97화
루시아의 이빨로 만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투기랑 단죄의 효과로 공격력이 뻥튀기되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광휘를 휘두르는 족족 썰려버리는 그림자들을 보니 어쩐지 내가 강해진 것만 같았다.
아니, 강해진 거 맞나?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모르겠다. 나랑 능력치가 엇비슷한 마야나 니아, 그리고 슈슈는 낙시안이긴 하지만 전투 쪽이랑은 거리가 멀기도 하고. 로로의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능력치 이상으로 강해서 나랑 비교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내가 어느 정도 강한지 전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투기까지 익힌 이상 평균은 될 거라고는 생각되긴 하지만.
"그나저나 엄청 좋은데 이거."
나는 간단하게 그림자를 베어버린 광휘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네스타와의 수련 때는 광휘 외에도 루시아에게 선물로 받았던 검들 중 아무거나 사용해왔기 때문에 실전에서 사용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무척 좋은 검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데도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베는 족족 크리샤의 그림자가 휙휙 베어진다. 여태 내가 쓴 검들도 어지간한 검술의 달인이라면 바위도 써걱써걱 베어버리는 명검이라고는 들었지만, 광휘는 명검이라는 이름으로도 부족해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광휘는 무려 드래곤의 이빨, 루시아의 이빨로 만든 검이었다. 드워프들이 직접 두들겨서 만든 것도 아니고, 오로지 마법으로만, 루시아가 직접 제련해서 내게 선물한 녀석이었다.
물론 검을 만들려면 루시아가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드워프에게 맡겨 두드리게 하는 쪽이 훨씬 낫긴 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전문 분야라는 것이 다른 법이니 말이다. 그래도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을 주고 싶다는 루시아의 마음으로 탄생한 검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으로써는 그렇다는 것이지, 루시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만들어낸 광휘의 경우에는 드워프의 손이 탄 것과 다른 방향으로 뛰어난 물건이었다.
검을 만드는 거라면 드워프 쪽이 우위에 있긴 하지만 마도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 말이다. 드워프가 그쪽으로 전문이라면 드래곤의 전문은 이쪽이니까. 아니, 이 경우에는 마법무구라고 해야 하나.
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마법무구 타령이냐면, 광휘는 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검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마도구이기도 해서 그랬다. 그것도 어지간한 물건이라면 뜨지도 않는 정보창도 나오는, 특별하다면 특별한 검.
참고로 광휘의 정보창은 이랬다.
이름 : 광휘(루시아느)
종류 : 무기(마검)
효과 : 매우 뛰어난 마력 친화력을 갖고 있다. 검에 닿은 일정 수준 이하의 마법을 흡수, 검날의 절삭력을 강화한다. 불에 대한 뛰어난 내성을 지니고 있다. 흡수한 마력을 사용하여 중급 바람속성 마법 '바람의 칼날'을 사용할 수 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이상 스스로 복구된다. 오직 '루시아네스 파라모아'가 허락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설명 : 바위조차도 두부처럼 가볍게 베어버리는 절삭력을 가진 검이다. 드래곤의 이빨을 통째로 사용하여, 마법으로 제련, 날을 만들어낸 검으로 단단하기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드래곤의 이빨의 내구도 그 이상을 갖고 있다. 또한 경량화 마법과 마력흡수 마법, 흡수한 마력으로 절삭력을 강화하는 마법과 중급 바람속성 마법 '바람의 칼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룬이 각인되어 있다. 자가수복 마법이 걸려있어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이상 복구된다.
내가 여기에 와서 봤던 것들을 통 들어서, 단일 물건으로써는 가장 많은 효과가 부여된 물건이었다. 동시에 내가 갖고 있는 호신의 팔찌와 더불어서, 딱히 마력이 없더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무구이기도 했다.
찌잉ㅡ
"아, 드디어 다찼나보네."
나는 광휘에 장식되어 있는 투명한 보석이 빛을 내는 것을 보고 드디어 광휘의 기능 중 하나인, 마력 흡수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 효율이 이런 건지, 아니면 크리샤의 그림자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대여섯의 그림자를 베어내니 겨우 다찼다.
우웅...!
나는 우웅, 하고 미약하게 떨리는 광휘를 쥐고서, 루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디보자... 나, 여기에 마력을 바쳐 바라노니. 바람이여, 칼날이 되어 나의 적을 베어 없애라. 바람의 칼날!"
광휘를 휘두르며, 사전에 들어둔 영창을 바치자 휙, 하고 베어진 칼날의 경로로 검푸른 투기에 둘러싸인 바람의 칼날이 대여섯개가 동시에 날아갔다.
써거걱!
그리고 광휘로부터 쏘아져 나간 바람의 칼날이 날아오던 그림자를 십수 개를 베어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일대에 자라고 있던 나무들의 허리를 동강내버리는 것이 보였다.
"......"
응, 처음 써본 게 생물이 아니라 그림자라 다행이다.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을 지닌 마법일 줄은 몰랐다.
루시아에겐 별거 아닌 중급 마법이라고 들었고, 설명도 그렇게 되어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별거 아닌 마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위력이었다. 만일 생물체를 향해 쏘아 보냈던 거라면, 상당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을 거다.
"뭐, 그림자니까 상관없지만."
어차피 상대는 생물도 아니고, 그저 그림자일뿐이었다. 예상보다 강력한 광휘의 힘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뿐인 것이다.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그림자를 베어 넘기며 걸어가다 보니 희뿌옇게, 김이 올라오는 곳이 보였다.
저기가 크리샤가 있는 온천일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그림자가 안 오네..."
어느 순간부터, 내게 날아들던 그림자들이 없어진 것을 보고서 고민했다.
내가 다른 방향으로 왔나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그야, 온천의 입구라고 생각되는 곳에 크리샤를 꼭 닮은 조각상까지 있으니까 이곳이 확실했다.
"조금 가슴이 작은 것 같은데..."
크리샤는 저것보다 조금 컸었다. 아니, 전체적으로 어려보이는 외형을 보아할 때 아무래도 크리샤가 좀 더 어렸을 때 만들어졌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잠깐, 그 말은 크리샤가 어렸을 때 이 모습을 본 녀석이 있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지도 몰랐다. 그게, 단순히 상상으로만 만들었다기엔 너무 현실감이 넘치는 조각상이었기 때문이다.
가슴을 가리고 있는 크리샤를 닮은 조각상은 금방이라도 내게 뭘 보는 거야 이 변태야! 하고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았다. 그만큼 잘 만든 조각상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만든 거라면, 다행히 허락을 받고 만든 건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 장식된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아리송했다.
"아차, 깜빡할 뻔 했네."
지나치게 잘 만들어진 크리샤를 닮은 조각상의 가슴부터 허리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곡선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이내 도리질을 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조각상이나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니까.
그리고 아마 이 건너편에 있을게 분명한 크리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막지 않는다는 건 와도 된다고 허락해준 거 맞지?"
음...
아무리 기다려도 그림자가 날아들진 않았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이 나이에 대놓고 여탕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뭘, 이것도 나름 경험이라면 경험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크리샤가 몸을 담구고 있을 온천으로 직행했다.
"...뻔뻔하게, 정말로 들어왔네... 너, 진짜로 죽고 싶나보지?"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바위에 걸터앉아있는 크리샤가 그렇게 말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속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온천에서 피어오르는 김 덕분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보여야할 건 보였다. 그런 크리샤를 보고서, 나는 천천히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런 나를 보며 크리샤가 고개를 갸욱였다.
"...? 뭐야, 만세라도 부르는 거야?"
아, 이 세계에는 항복을 뜻하는 이 제스처가 없던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니, 항복이라고. 그러니까 그 손 좀 내려주라."
내 말에 히죽, 하고 크리샤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는데?"
그야 무서우니까요.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린 크리샤가, 다른 손으로 나를 겨누고 있으니까.
어째서 바로 앞까지 왔는데도 그림자로 막으려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게 겨냥하고 있는 크리샤의 손끝에,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마력이 모여 있었다.
에루나가 보여줬던 고위마법에 준하거나, 그 이상의 마력이.
아마도 그림자를 뻗어 보내는 것 대신에, 내가 여기 올 때까지 마력을 모아둔 모양이었다.
덕분에 곧바로 항복한 것이었다.
아직 나는 고위마법을 직접 맞았을 때 어찌되는지 확인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루시아의 예상대로라면 법칙을 고쳐 쓸 정도의 마법인 대마법과,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영향은 줄 수 있는 수준의 고위 마법이라면 내 주위를 두르고 있는 보호막을.
특성, 차원을 넘은 자를 통해 항시 나를 지키고 있는 일종의 결계인 이것에도 데미지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내 능력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결국 이 세계에 속해있는 이상, 그건 단지 모습을 바꿨을 뿐인, 다른 무언가라는 루시아의 가설이 맞다는 가정하의 이야기였지만.
예를 들어, 고위 방어마법인 절대방어라던가, 마찬가지로 고위 공간마법인 공간차단같은 것이, 이름과 모습만 바꾼 채 나를 보호를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만일 루시아의 가정이 맞는다면, 고위 방어마법이나 고위의 공간마법 등이 내게 향했던 모든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있던 거라면, 지금 크리샤의 손에 모여든 마력에 작살이 나고, 나마저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루시아의 가정이 틀려서 그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즉, 내가 크리샤의 손에 모여든, 고위마법에 준한 마력의, 아마도 분명 고위 마법인 저걸 맞으면 어찌될지는 나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나는 도박같은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이템을 강화할 때에도 노가다를 더하고, 재료를 더 모아서 성공률을 100%로 만들면 만들었지, 99%같이 조금이라도 실패할 확률이 있는 것에 몽땅 꼬라박을만한 커다란 간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곧바로 양 손을 들고 항복한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던 나를 보고서, 크리갸가 뭔가 착각이라도 했는지 입을 열었다.
"헤에, 거기서 헛소리를 했으면 당장 쏴버렸을 텐데. 눈치는 있나 보네?"
"......"
그냥 생각 좀 하느라 가만히 있던 거였는데.
덕분에 눈치가 있는 녀석으로 봐주는 모양이니 더욱 가만히 있기로 했다.
언젠가 읽었던 책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인질이 됐을 땐 범인을 자극하지 말랬던가?
그렇다고 내가 인질이란 건 아니지만. 비슷한 입장인건 맞으니까.
"우선... 궁금한 게 하나 있으니까 물어볼게. 대답하는 거라면 입을 열어도 좋아. 딴 소리를 하면 바로 날려버릴 거지만."
크리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잘 듣는구나? 아니면 이제 와서 주제를 안걸까.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테니 얼마나 좋아?"
됐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나 빨리 해줬으면 좋겠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자세 꽤 힘들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아마도, 같이 온 에루나한테서 알았을 테고... 하지만, 에루나의 힘으로는 내가 결계를 걸어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온 거야?"
"아, 그거? 간단하지."
뭘 물어보려고 하나 했더니 정말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거였다.
"간단하다고? 마력조차 없는 네가 내 결계를 뚫고 여기에 오는 게 쉬운 일인 줄..."
말을 잇던 크리샤가 표정을 바꾸고는, 이내 나를 겨누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촤라라라락!
그런 크리샤를 향해, 내가 날렸던 바람의 칼날과는 비교가 안 되는, 무수한 수의 바람의 칼날들이 날아들었다.
"너...!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크리샤의 손끝에 모여 있던 마력이 이내 거대한 원형의 보호막 형태로 바뀌었다.
무수한 바람의 칼날이 크리샤가 펼친 보호막에 막혀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크리샤를 향해 바람의 칼날들을 날렸던 루시아가 천천히 내 옆에 내려왔다.
"어떻게라뇨?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죠? 그야, 제가 이지경님을 여기로 보낸 장본인이니까요. 드래곤인 당신이 펼친 결계를 깰 수 있는 건 같은 드래곤인 저 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내 사랑스런 연인이 말했다.
"내가 경고했죠? 크리샤네아 슈페리아. 이지경님에게 해를 끼치려한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아니, 입가에 미소를 띤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 쓴, 드래곤의 로드.
루시아네스 파라모아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로.
"그러고 보니 당신이 전에 저에게 이렇게 말했었죠. 제가 크리샤네아, 당신보다 약하다고요. 어디 한 번... 시험해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