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95화
"슈페리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인님."
"이야. 전혀 실감이 안 나는데."
대뜸 그렇게 말한 에루나에게 나 역시 대충 대답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의 의미기도 했다. 정말로 실감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그야, 나는 지금 늦은 아침으로 에루나가 차려준 빵과 스프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밥먹고 있는 와중에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에루나가 슈페리아에 도착했다느니 뭐니 해봤자 실감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럼 루시아도 슬슬 깨워야 겠네."
내가 늦은 시간에 아침을 먹게 된 이유, 루시아는 지금 내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늘 새벽이 다 되서야 쓰러지듯 잠들었으니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게 당연했다.
나야 에루나가 깨워줬으니 어떻게든 일어나긴 했지만... 아니, 쓰러지듯 기절한지 몇 시간도 안돼서 일어난 것도 대단했다.
전부 쓸데없이 성능이 좋은 몸뚱이 탓이었다. 이 몸뚱이가 좋으면서도 나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몸뚱이가 아니었다면 진작 복상사로 쓰러졌겠지만, 이런 몸뚱이가 아니었다면 루시아가 그 정도까지 했을까 싶기도 해서 그런 거였다.
어차피 전부 가정일 뿐인 이야기다. 지금은 오늘도 무사히 일어나서, 늦게나마 아침이라도 먹을 수 있는 걸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빠르게 에루나가 차려준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밥이 곧 보약이라고, 나도 요즘 들어서는 먹는 양이 어마어마해지긴 했었다.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거다.
먹는 족족 회복하는 지구력이 없다면 하루 종일 뻗어있어야 할 판이니까 강제로라도 입에 뭔가 쑤셔 넣어야 했다. 다행히 에루나의 요리 솜씨는 나무랄 데가 없는데다가 제각기 다른 종류의 음식들이라서 질리거나 먹는 게 고역인 적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루시아나 낙시안인 바록과 바쿠보다는 못하긴 하지만.
그렇게 슈페리아에 도착하면 깨워달라고 했던 루시아를 깨우러 가기 위해 식사 속도를 빨리하던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이미 마야와 니아를 보내놨으니 그렇게 급히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아무쪼록 천천히 드셔주시길... 그보다 주인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루나의 말에 입에 쑤셔 넣으려던 빵을 천천히 내려놓고, 손으로 떼어 조각을 냈다. 그리고선 빵조각을 스프에 찍으며 물었다.
"뭔데?"
"크리샤 아가씨께서 주인님께 오늘은 일이 바빠서 볼 수 없을 거라고 전해오셨습니다. 아무쪼록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달라는 말도... 늦는다면 일주일은 그럴 거라는 말도 함께 전하셨습니다만, 어쩌시겠습니까?"
에루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예상했던 일인데 뭐."
날, 정확히는 인간을 질색하는 크리샤가 내가 슈페리아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생각해둔 일이었다.
어쩌면 아예 무시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해뒀었다. 일단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에 온 첫 날인데 그런 첫날부터 얼굴도 내밀지 않겠다고, 직접 말하는 것도 아니고 에루나를 통해 전해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루시아때처럼 마냥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무시하면 달라붙고, 괴롭혀도 찰싹 붙어 다닐 생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숨기고 감정을 제어하는 일에 탁월한 루시아보다 알기 쉬운 크리샤쪽이 훨씬 편했다.
여러모로.
내가 잘 알고 있는 타입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에루나? 크리샤는 지금 어디에 있어?"
"크리샤 아가씨는 현재…"
에루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수프에 적신 빵을 입에 넣었다.
아주 맛이 좋았다.
《고결한 대지, 크리샤네아 슈페리아》
"하아..."
온천에 몸을 담군 크리샤네아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더욱 깊이 온천물에 몸을 담궜다.
당연하게도 그런 크리샤네아는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옷을 입고 온천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남에게, 하물며 자매들의 앞에서도 자신의 나신을 보여주는 걸 꺼려하는 크리샤네아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나신의 몸인채로 온천물의 온도를 즐겼다.
"인간들은 싫지만, 인간의 몸은 편해서 좋다니까... 온천욕도, 본신이나 다른 종족들로는 불가능한데."
본신으로 들어가기엔 온천을 아무리 크게 만들어도 너무 작았다. 거의 작은 호수만한 온천을 만들지 않는 이상에야 기껏해야 반신욕에 그치는 것이다. 거기에 엘프나 드워프 등 다른 종족들은 피부가 예민하거나 지나치게 둔감해서 온천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샤네아가 취할 수 있는 종족의 모습 중에서,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종족인 인간만이 제대로 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는 거였다.
물론 그것 외에도, 여러모로 편리해서 그냥 인간의 모습을 취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애당초 그녀의 성, 슈페리아의 한 가운데에 세워진 대지의 고성조차도 인간의 육신일 경우를 가정해서 만들어진 곳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몸만큼은 쓸모가 많은 종족이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민 같은 거나, 머리 아픈 일은 전부 뒤로 넘겨버리고서 온천을 즐기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진 크리샤네아는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하지만 덕분에, 자신이 굳이 이런 외딴 곳까지 와서 온천이나 즐겨야 되는 이유를, 머리가 아픈 원인을 떠올린 크리샤네아는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루시아... 정말로 한 번 해보자는 거지?"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금색용이자, 자신의 자매나 마찬가지이기도 한 드래곤.
그녀가 자신의 영지에 퍼트린 소문 때문에, 자신이 이런 곳까지, 마치 도망치듯이 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소문이란 것은,
"...내가, 그딴 인간이랑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니. 뭐? 서로 떨어지지 못해서 안달인 사이라고...? 그딴 헛소문을 퍼트려...? 가만 안둘거야. 이번에는 결계가 단단해서 제대로 손을 쓰진 못했지만... 두고 보라고. 지진이라도 내면 녀석도 머리 꽤나 아프겠지."
루시아네스가 펼친 결계를 뚫고, 땅을 뒤흔들었지만 결국 그런 크리샤네아에게 돌아온 것은 온천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였다.
아무리 자신이 루시아네스보다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영지. 그것도 이미 크리샤네아가 한 번 사고를 냈던지라 크리샤네아를 경계해서 세워진 결계까지 단단히 쳐져있는 것을 뚫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와중에도 맨땅에 온천을 터트린 크리샤네아가 대단한 거였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은 루시아네스가 퍼트린 헛소문 때문에 사방팔방에서 전해져오는 결혼축하 선물이나, 자신의 신랑ㅡ절대로 아니지만ㅡ에게 바치는 것이라며 온 온갖 보물들이며, 게다가 직접 찾아와서 축하인사를 전해오는 녀석들 때문에 무척이나 짜증나다 못해 이곳까지 피해왔는데. 정작 그 짓을 벌인 루시아는 온천 만들어줘서 고맙단다.
크리샤네아로서는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런 크리샤네아가 더욱 짜증나는 이유는... 그 선물들을 도로 돌려보내고, 직접 찾아온 녀석들에게는 전부 헛소문이라고 말하던 크리샤네아에게 그들이 보여온 얼굴들 때문이었다.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에이, 부끄러워서 그러신 거죠? 하고 크리샤네아 앞에서 대놓고 말한 녀석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자신의 밀을 믿지 않았다는 거다. 절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해도 말로만 아, 그러시군요, 하는 반응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혀 믿지 않다니... 루시아 녀석, 대체 뭐라고 지껄인 거야..."
특히나 드워프들의 마을, 테 베르나의 장로인 레무르는 아가씨 성격에 이런 기회도 드무니 반드시 잡아야 한다느니 뭐니 하는 소리까지 했었다.
당장 그 레무르의 얼굴에 화염구를 날려버리기는 했지만. 드워프는 불속성에 매우 강한 저항력을 지닌 종족이었다. 용암마저 쇠를 두드리는데 사용하는 종족인만큼 당연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겁도 없이 용암 앞에서 망치를 두드릴 순 없으니 말이다.
그 강력한 불속성 저항능력으로 인해 아무리 하위의 마법인 화염구라고 하더라도, 드래곤이 직접 쏘아보낸 마법에도 수염 몇 가닥만이 조금 타버린 것에 족한 레무르는 그런 크리샤네아에게 그러다가 평생 혼자 살거라며 끝까지 약을 올렸다.
저걸 진짜, 하고 손에 바위의 검을 움켜쥐자 뒤도 안보고 도망쳐버리기는 했지만.
불속성의 하위마법은 아무리 맞아도 별 타격 없는 드워프라도 크리샤네아가 휘두르는 바위의 검은 평범하게 아픈 탓이었다. 그냥 무진장 단단한 돌로 만든 검으로 두들기는 것뿐이니까 당연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크리샤네아는 얼굴을 찡그리다가 턱 밑까지 온천에 몸을 담궜다.
“진짜...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전부 기어오르고...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드래곤이라고. 응? 그것도... 가장 강한 드래곤이라고. 알고는 있는 거야?”
물론, 그건 자업자득이긴 했다.
크리샤네아의 영지인 슈페리아에는, 드워프를 비롯해서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다. 넓기로만 따지자면 아샤와 아냐가 다스리는, 바다를 영지로하는 둘이 제일 넓었지만 대륙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크리샤네아의 영지야말로 많은 종족이 모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에 족하는 다른 드래곤들에 비해, 크리샤네아는 자신의 영지에 속해있는 종족들에게도 관심을 주는 편이기도 했다.
비가 필요하면 비를 내려주고, 대지를 다스리는 힘을 가진 보옥과 마법으로 대부분이 화산으로 이루어진 땅에서도 배가 곯지 않을 정도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화산 폭발이며, 지진 등의 재해로 인해 망가진 곳을 직접 고쳤다.
보옥의 이상현상이 아닌 한은, 어지간한 재해라면 그것 역시 자연의 일부로 보고서 그냥 내버려두는 드래곤들과는 달리 직접 나서는 크리샤네아인만큼 특이하다면 특이한 부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 종족들에게 이런저런 공물을 받아도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는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크리샤네아는 그런 그들에게 자신 역시 선물로 돌려보내줬다. 그리고 그런 크리샤네아가 베푼 것은 주로 축복이었다. 자신의 영지에서에 한하는 일이지만 다치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축복.
하지만 드래곤에게, 하물며 그 땅의 보옥을 지배하는 크리샤네아에게 받는 축복은 그 의미도 축복의 위력도 달라지는 법이었다.
크리샤네아가 별 거 아니라고 내려준 축복이 가진 힘은 보옥의 힘이 미치는 슈페리아에 한정되긴 했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한은 질병에 걸리지 않고, 당장 칼로 목을 베여 즉사하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땅에 다리가 닿아있는 이상 빠르게 다친 상처가 치유되는 상위의 축복이었다.
엘프들이 세계수에게 받는 축복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낮은 등급의 축복은 아닌 것이다. 아니, 고작해봐야 뿌리를 내린 주변에 족하는 세계수의 축복과 달리, 거의 하나의 대륙에 맞먹는 땅덩어리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크리샤네아의 축복이 훨씬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정도까지 베풀어주는 크리샤네아에게,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종족들이 우호적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루시아네스가 슈페리아에 거주하는 종족들에게 몰래 알린 소식, 크리샤네아를 비롯한 일곱의 드래곤들이 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됐다는 소식에 그들이 진심어린 축하를 보내온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크리샤네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은 것도, 전부 틱틱거리면서 해줄 건 다해주던 크리샤네아의 성격과, 부끄러워서 절대 아니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고 먼저 일러둔 루시아네스의 말 때문이었다.
크리샤네아의 평소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루시아네스의 계략이 정확하게 먹혀든 셈이었다.
덕분에 이번 일에 대한 슈페리아의 종족들의 반응도 크리샤네아가 또 틱틱거리는 구나, 하고 따듯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 그쳤다.
슈페리아.
그곳은 인간 빼고는 전부 크리샤네아의 보살핌을 받는, 또 인간 빼고는 모두 크리샤네아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런 땅이었다.
인간 빼고는.
크리샤네아의 영지, 슈페리아의 옆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들의 제국.
라이어스 제국과 그에 속한 몇 개의 왕국과 공국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인간이라고는 없는 만큼, 슈페리아의 모두는 크리샤네아에게 우호적이란 뜻이었다.
몇몇은 크리샤네아가 어릴 적부터 본 적이 있던 만큼 자식이나 손녀 비슷한 느낌으로 대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정작 크리샤네아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신은 스스로 의무를 다하고 있는 드래곤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중에 전부 혼내주겠어. 감히 누구한테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 알려줘야겠지."
그렇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던 크리샤네아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
크리샤네아가 지금 있는 이곳은 드워프들이 크리샤네아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놓은 온천이었다.
오직 크리샤네아를 위한 온천인 것이다. 외딴 화산 옆에 오도카니 마련된 이 온천은 자신의 영지내라면 전이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크리샤네아 말고는 오기도 힘든 곳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 온천을 만든 드워프들조차도 몇 년을 이곳에서 숙식하면서 겨우겨우 만들어낸 온천인 만큼, 드워프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을 일도 없었다.
크리샤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단순히 소리가 들려왔을 뿐인데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는 이 온천 주위에는 온갖 알림 마법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남에게 나신을 보여주는 것을 꺼려하는 크리샤네아인만큼, 당연한 조치였다. 아무리 이곳에 돌아다닐만한 것들이 들짐승에 불과하더라도 싫은 건 싫은 거니까. 하지만, 들려왔던 소리는 아무리 좋게 봐도 들짐승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순식간에 속옷차림이 된 크리샤네아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들어온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꺼지면 용서 해줄게.”
낮게, 자신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온천을 침범한 이에게 그렇게 말하며, 크리샤네아는 동시에 그림자를 뻗쳐 보냈다.
뻗쳐나가던 그림자가 이내 날카롭게, 창과도 같이 변해서 쏜살같이 날아갔다.
콰앙!
“...난 분명 경고했어. 당장 꺼지면 용서해준다고.”
그림자로 만든 창이, 정확하게 상대에게 적중했다는 것을 감지한 크리샤네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느긋하게 온천이나 즐길 생각으로 옷을 벗고 있던 크리샤네아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랐네.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크리샤."
그 목소리에, 크리샤네아의 등 뒤로 수십개의 그림자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쇄도했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방금까지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만든 원인의, 장본인이기도 한 이지경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