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94화
“주인님.”
귓가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어느 새인가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 늘어나긴 했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은 안 봐도 뻔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조금 옮기자 언제 왔는지 새하얀 프릴이 나풀거리는, 기다란 시녀복을 입은 에루나가 있었다.
그런 에루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왔어?”
그런 나에게 다가온 에루나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누운 채로 그런 에루나를 봤지만, 속옷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에’로 시작하는 누구와는 달리 철저한 가드였다. 아니, 딱히 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보고 싶다면, 그냥 보여 달라고 하면 그만이고. 그렇게 되면 뒤가 두려워지기 때문에 안 할 거다.
게다가,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에루나는 알고 있을게 분명했다.
...어라.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좋다고 달려들었을 에루나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에루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내 시선에 에루나가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아니, 그런건 아닌데...”
에루나에게 뭐 잘못 먹었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하지만 그런 나보다 에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주인님이 투기를 습득하셨을 때, 제일로 먼저 축하드리는 것은 주인님의 제 1시녀이자 시녀장인 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에네스타에게 선수를 빼앗겼군요.”
그렇게 말하며 에네스타를 보는 에루나의 시선이 영 곱지 않았다. 평소랑 다를 바 없는 얼굴이기는 하지만, 저 표정이 언짢아하는 표정이란 건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으음... 미,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에네스타 역시,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는지 움찔움찔 뺨을 떨어댔다.
방금까지 날 힘껏 두들겨 팼던 에네스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기는 했다. 다름 아니라 에루나의 앞이니 말이다.
일단 에네스타가 기본적인 능력치로는, 아주 조금뿐이지만 에루나보다는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강함으로 따지자면 에루나가 에네스타보다 훨씬 위였다. 검주, 에네스타의 힘인 투기를 에루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봉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에네스타와 조금밖에 차이나지 않는 신체능력. 즉, 투기를 두르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검주와 비등한 힘을 갖고 있는 에루나가 거기에 온갖 마법까지 단축영창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말이 비등이지, 자신의 몸에 온갖 버프를 건 뒤의 에루나는 투기를 몸에 두른 에네스타보다 강했다. 그런데 정작 에네스타는 투기조차 두르지 못하게 한다. 상대방은 약화시킨 채 혼자만 강해지는 사기캐인 거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러 고위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에루나는 어찌보면 검주, 그 중에서도 상위라는 에네스타보다도 강한데다가 동시에 대마법사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네스타가 처음부터 에루나를 저렇게 어렵게 대한 것은 아니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에오시스 자매를 내 가신으로 받아들인 다음 날, 슬슬 서열을 정리해야겠습니다, 그런 말과 함께 개최된 가신들의 대련에서 바록과 바쿠, 그리고 에네스타마저 에루나에게 이렇다할 마법도 없이 주먹으로만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에네스타의 서열이 에루나보다 밑으로 내려갔다. 내려간 것만이 아니라 검주가 아무런 대항도 못하고 주먹으로만 얻어 맞았다. 덕분에 에네스타가 에루나를 저렇게 어려워하는 거였다.
참고로 그 서열전에서 정해진 서열은 에루나 다음으론 당연하게도 에네스타. 그 뒤로는 차례대로 바쿠, 바록, 그리고 로로 순이였다. 로로가 생각보다 높은 것은 나에겐 꽤나 의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가신으로써 서열 결정전에 참여한 에오시스 자매들 역시 약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토너먼트 형식이었다. 로로는 그 에오시스 자매 둥에서도 제일로 강한 나타를 이기고 바록에게 패배해서 서열 5위에 그친 거다.
내가 놀랄만도 했다.
뭐, 로로가 나타를 이긴 것은 나타가 정령을 소환하기도 전에 승부를 내서 그런 점도 있지만 말이다. 나타의 정령인 바람의 대정령이 소환됐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에루나의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에네스타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물론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나로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에네스타를 괴롭히는 에루나를 보다 못한 내가 말했다.
“아니... 같이 수련하고 옆에 있던 에네스타가 당연히 먼저 축하해주지. 그걸 선수를 빼앗겼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냐?”
내 말에 에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잇던 에루나가 나를 보더니 말했다.
“어떻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밤은 상심한 저에게 주인님의 밤시중을 맡기시는 것은?”
“어째서 그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거절하마.”
“아쉽군요... 뭐, 오늘 밤은 마지막 날이니만큼 루시아 아가씨가 양보해줄 리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
에루나의 말에 멈칫했다.
루시아.
내 연인이자, 이 세계에 단 일곱만이 남은 드래곤 중 하나의 이름을 듣고서.
“...저기, 에루나? 지금 루시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루시아 아가씨 말입니까? 지금은 에스페네... 아, 이렇게 말씀하셔도 모르실테니. 그냥 파라모아에 있는 땅 중 한 곳에 계십니다. 갑작스레 그 땅에 온천이 솟구쳤다나 보더군요.”
대부분이 평야로 이루어진 루시아의 영지. 파라모아에서 뜬금없이 온천이 튀어나오는 이유가 대체 뭔진 모르겠지만, 에루나의 대답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런 내게 에루나가 말했다.
“하지만, 방금 막 제가 주인님께서 투기를 습득하신걸 알렸으니 금방 이쪽으로 오실게 분명합니다.”
“진짜 빨리도 말한다!”
진작 튀어야했는데.
우웅, 하고 그런 내 눈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력이 보였다.
이 순간만큼, 마력과, 마법이 보이는 주시자의 눈이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빨리도 말한다라. 이지경님?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순식간에, 에스페네가 어디 있는지는 관심도 없지만, 분명 여기랑은 장난 아니게 먼 곳에서 돌아온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보다... 지금 어딜 급히 가시려고 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에, 당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인 저에게. 되도록 자세하고, 상세하게.”
상냥하게,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였지만 어째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만.”
스트레스성 위염인지 뭐시긴지. 아무튼 병명은 그런 거라고 치고. 기분 탓인가. 정말로 살살 아파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 그럼 안되죠. 정말로, 안되고말고요.”
그렇게 중얼거린 루시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대치유.”
자아, 이젠 어떤가요? 하고 영창도 없이, 대치유라는 상급의 치유마법을 사용한 루시아가 말했다.
그런 루시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막. 다 나아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또 변명을 해봤자 스럼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끌려갈 것이 분명하니까.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싱긋하고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야, 그도 그럴 것이. 저, 여태까지 기다린걸요. 이지경님이, 당분간은 투기를 습득하는데 집중하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에요. 하루에 몇 시간. 겨우 시간을 맞춰서, 그 정도밖에 같이 지낼 수없는데 그런 소중한 시간을 양보해가면서요.”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다행이에요. 이제 이지경님이 바라신대로 투기를 습득하셨으니 그럴 필요도 없어진거잖아요? 게다가… 투기를 얻게 되면 신체능력이 강해진다고 했었죠. 정말로 그런지, 확인해봐야겠네요.”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진짜로 무서웠다.
요 일주일 사이에, 에네스타의 말대로 엄청나게 성장한 나였지만, 그런 나보다 성장한 게 있다면... 바로 루시아였다.
성장한 쪽이 영... 아니, 진짜로.
남자로써 이걸 싫다고 하기도 뭐하기는 한데. 진짜로 곤란하게도, 루시아의 성욕도 엄청나졌기 때문이었다.
매번 루시아와 밤을 보낼 때마다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나로써 지금의 루시아가 엄청나게 무서웠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루시아는 기쁜 듯이 말했다.
“저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네요. 오늘이 지나면 이지경님과 당분간은 보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그런데 마침 오늘 투기를 습득하시다니... 정말로 행운이에요.”
그런 루시아 몰래 에루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에루나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아까 에루나가 어째서 가만히 있었는지 말이다. 자기한텐 애당초 기회가 없을거란걸 알고서 알아서 빠진 게 분명했다.
에루나 녀석도 상황을 구분은 하는지, 루시아의 앞에서까지 그러지는 않기 때문이다. 에루나에게 배신 당한 나는 한없이 희박한 희망을 갖고서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루시아 역시 나를 보며 생긋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정말로, 햇살과도 같은, 눈부신 미소였다. 언젠가 저 미소를 계속해서 봤으면, 그리고… 욕심일진 몰라도 나만이 저 미소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나로써는 저 미소를 볼 수 있는 지금은 무척이나 행복해야만 했다… 루시아의 황금빛 두 눈이 반쯤 갈라져있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직 침실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너무 흥분한거 아니냐…
나는 희박하게나마 있던 희망을 내다버렸다. 그런 나에게 루시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길게, 네에, 정말로 길게 어울려 주셔야 되요. 저랑 단 둘이.”
이제 됐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뭘, 꼭 나쁜것만은 아니였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기분이 좋은 것 뿐이었다. 나쁜 것만은 아닌 거다...
각오라고 해야하나, 체념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마음을 다잡은 내가 입을 열었다.
“에루나...”
그런 내 부름에 에루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주인님. 이럴 줄 알고 여기 오기 전에 침대 맡에 준비해뒀습니다. 천마의 피가 네 병. 드리아데스의 즙이 다섯 병. 아, 그리고 대용품이기는 합니다만, 그 둘을 섞은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도 구해놨습니다. 시험품인지라 두 병정도지만, 괜찮을 겁니다.”
“...철저한 준비 정말로 고맙다.”
정말로 대단한 시녀를 둬서 나는 기쁘구나. 정말로 진짜.
오늘은 몇 병째에 만족해주려나. 부탁이니까 밤만 새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루시아를 불렀다.
“저기, 루시아?”
“네, 이지경님.”
“...일단 밥부터 먹고 하면 안될까?”
“안돼요.”
안되는군요. 알겠습니다.
밥은 하면서 먹어도 상관없다는 루시아의 말과 함께 그대로 침대까지 질질 끌려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다 내 업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나보다 체력도 강한 루시아를 이기겠다고 이짓저짓 다 하면서 만족시킨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에게 좀 더 많은걸 알려달라는 루시아에게 흥분한 나머지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정말로, 이럴 줄 알았으면... 루시아의 안에 있는 드래곤... 아니, 진짜 드래곤이지만. 아무튼 그걸 깨워서는 안됐던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