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90화
“그냥, 뭐...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요즘 얼굴도 못 봤잖아? 그나저나 에샤랑 모네는?”
여기 온지도 꽤 지났는데 나타 말고는 보이지가 않아서 묻자 나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에샤랑 모네는... 아직 기도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저는 둘보다는 익숙한 편이라 조금 빨리 끝낼 수 있어서요.”
내 말의 어디가 얼굴을 붉힐만한 요소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에네스타도 그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들 홍조증이라도 생긴 건가. 그런 전염병같은 게 엘프 사이에 돌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에샤랑 모네는 없는 건가. 당사자들인 세 명 중에 두 명이나 없다면 이야기 하기 곤란하다. 하는 수 없었다. 기도인지 뭐시기가 뭔지는 몰라도 다른 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냥 하릴 없이 세계수의 새싹으로 만든 차나 축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아무거나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전부 요정향의 무녀였었지. 잘은 모르겠지만... 세계수의 무녀라고도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무녀가 하는 일, 말인가요?”
“그래, 그거. 중요하다고는 루시아의 말로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아서 말이지.”
십 년에 한 번을 주기로 춤을 추거나, 조상들을 기린다기에 제사와 비슷한 의미라고 이해는 했지만 단순히 그런 일인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궁금했다.
루시아도 그녀들을 보고 중요하다고 했었던 것 같고.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고작 미인계에 쓰지 말아달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러고 보니 베헤노스님은 이쪽 세계의 분이 아니셨죠...”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예에, 루시아님께 들어서... 저, 알면 안 되는 일이었나요?”
루시아가 직접 알려준 거라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내 정체라던가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건 아니었나보다. 차원을 넘어서 소환된 인간이란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건가.
흔한 소환물 전개라면 차원을 넘어서 왔다는 걸 알리자마자 주변사람들은 대단해! 굉장해! 멋져! 그런 전개였을 텐데,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가보다.
그야, 뭐...
나도 그런 흔한 소환물의 전개마냥 무쌍을 찍고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에오시스 자매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루시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고.
드래곤의 질투는 무시무시하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같은 남자를 공유하게 되어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걸 허락했던 셈이니까 어지간히 믿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내가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상황이 달라져서 굳이 이러고 있는 거지만.
루시아의 현재 호감도는 70. 거기에 분명하게 관계창에서도 연인관계로 나와있었다.
하룻밤만에 오른것치고는 엄청나게 올랐다. 떡정이란게 무섭긴 무섭구나...
어쨌거나, 호감도 20일 때 허락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모른다는 거다. 나는 괜히 터질지도 모르는 화약고 앞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성격은 아니다. 안전주의라고 해야 되나, 위험한걸 알면서도 굳이 건들고 싶지 않다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대답이 없는 날 보고서 불안해보이는 표정을 짓는 나타를 보고서 말했다.
“뭐, 루시아한테 들은 거라면 아무래도 좋은거라니까 신경쓰지마. 그래서? 뭘 하는 건데?”
“아, 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강령의식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까요...?”
강령.
그러니까, 신 내림 같은 거?
아리송해하는 나를 보며 나타가 말을 이었다.
“본래, 엘프라는 종족은... 정령들이 이 세계에서 육신을 구축하고, 번성하게 되면서부터 탄생한 종족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어요. 태초의 엘프들, 하이 엘프들은 저희들과는 달리, 세계수에서 열매처럼 태어났다고들 전해져오기도 하고요... 저기, 베헤노스님?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그냥 좀 속이 메슥거려서..”
그 세계수의 열매를 여태까지 80알이 넘게 먹은 사람 앞에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주라. 기분이 묘해지잖아. 아니, 지금의 엘프는 그렇지 않다니까 상관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게 있었다.
새싹차를 마시고서, 올라오던 것을 넘기고서 계속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나타가 말했다.
“어, 어쨌거나. 과거에는 저희 엘프들은 말 그대로, 육체가 있는 정령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에요. 지금은... 피가 흐려지고 너무 오랜 시간 땅에 머물고 있는 바람에 하이 엘프들의 대부분은 영세하고 말았지만. 일단은 그 후손들인 저희들에게도 정령의 힘이 흐르고 있죠. 엘프들이 정령들과 계약을 맺기 쉬운 것이 그 증거 중 하나고요.”
본래 정령이었으니까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다는 걸까.
전에 에루나 덕분에 얻은 소환사 특성 덕분에 읽었던 소환 관련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은... 본래, 하이 엘프들이 갖고 있었다는 힘을 타고 태어나고는 해요. 저와 에샤, 모네도. 그리고... 에네스타 고모님도 그런 힘을 타고 태어나셨죠.”
“...으응?”
뜬금없이 나온 에네스타의 이름에 고개가 까딱였다. 에네스타라면 그 에네스타? 그 녀석이 갑자기 왜 나와?
뜬금없이 에네스타의 이야기가 나와서 당황했지만, 그것보다 나타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에네스타의 일은 나중에 에네스타에게 묻기로 하고서 나타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거랑 기도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저희들이 타고 태어나는 하이 엘프의 힘은, 말하자면 일종의 그릇이기 때문이에요.”
“그릇?”
“네, 과거 하이 엘프들은 정령이 이 땅에 머물기 위해 육신 안에 그 힘을 가둬둔 존재나 마찬가지였어요. 말하자면, 육신만 벗어던진다면 언제든지 정령으로 돌아가는 존재였다는 거예요. 하지만... 저희들은 이미 그런 힘을 잃고 말았어요. 저희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을 갖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지만요.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몸 안에 가둬둘 수 있는 존재가요.”
그래서, 하고 나타가 말을 이었다.
“종종 저희들의 몸을 통해 이상한 것들이 이 세상으로 넘어오거나... 혹은 몸을 차지하려고는 하죠. 그걸 막기 위한 의식이 저희들, 무녀들이 하는 기도에요. 그것뿐인건... 아니지만요.”
일단, 기도가 대체 뭔지는 대충 알겠다. 그런데 엄청 뒤숭숭한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으음, 이상한 거라면?”
“글쎄요... 저도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전례가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 전례가 없다는 건 다행이지. 그나저나 전례가 없다는 건 신기한데.”
이상한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몸을 통해 넘어오려고 하거나 멋대로 몸을 차지하려고 드는 녀석 중에 좋은 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전례가 없다는 건 좋은 일인 거다. 문제는 그 좋은 놈은 절대 아닐 것들이, 여태까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게 신기했다.
“아, 그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베헤노스님이 궁금해 하셨던 기도를 통해서 저희의 그릇을 채워두기 때문이에요.”
“그릇을 채워둔다니... 대체 뭐로...”
“저 같은 경우에는, 바람의 대정령인 실피드님이 그릇을 채워주고 있어요. 다행일지 모르겠지만... 제 경우에는 그릇이 작아서 실피드님만으로도 꽉 차버리거든요, 에샤랑 모네의 경우에는...”
그렇게 나타가 말을 잇고 있을 때였다.
“응? 언니, 나 불렀어?”
나타랑은 달리,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엘프치고는 어린 것은 나타도 마찬가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나타는 에오시스 자매 중의 맏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어른스럽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다. 그에 반면 지금 들려온 목소리는, 나타랑 닮았지만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말하는건 조금 너무할지 모르겠지만 덜 고생해본 느낌의 목소리였다.
정말 너무한 평가기는 하지만. 그런 느낌인 걸 어떻게.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좋은 냄새나고... 우리 몰래 혼자만 맛있는 거 먹는 건 아니... 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태어날 때 모습 그대로, 물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걸어오고 있던 에샤와 눈이 마주쳤다.
쩌적하고, 굳어서 멈춰버린 에샤를 보고 있자니 그 뒤로도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샤 언니? 무슨 일 있... 구나...”
에샤와 마찬가지로 이쪽도 알몸이었다. 다만 에샤랑은 다르게 수건으로 몸을 감출 정도의 의식은 남아있었는지 빠르게 알몸을 감췄다. 문제는 이미 볼거 다 봤다는 거다.
그리고 머리를 닦느라 그런 건지, 소재가 그런 건지는 몰라도 물에 젖은 수건이 몸에 딱 달라붙어서... 차라리 벗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보였다. 오히려 몸의 굴곡이 도드라지는게 훨씬 에로해보였다.
“......”
“......”
“...쿠키 맛있어.”
나와 대화하던 나타도, 그리고 얼결에 그런 나타의 동생들의 알몸을 본 나도, 아무말도 꺼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오직 로로만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쿠키를 넣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저 신경줄 갖고 싶다. 엄청나게 살기 편해질 것 같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본 심정으로 로로를 보다가, 무심코 머리를 싸안으려는 것을 참고서 생각했다.
생각해도 도무지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 알몸인거냐... 사람 난감하게. 물론 나도 이해는 한다.
자기 집에서, 하물며 동성의, 피붙이끼리 사는 거다. 알몸으로 배회할 수도 있지. 옷 입는 거 가끔 귀찮고 하니까. 나도 혼자 살 때 자주 알몸으로 속옷을 찾는답시고 방을 배회하기도 했었고...
이해하는 것과 상황을 받아들이는건 다르다는 거지만.
난감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대로 있을 수도 없으니까.
나는 얼어붙은 채, 나를 보고 있는 에샤와 모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어, 오랜만이네!”
그러면 안됐다는 생각을 한 건, 그 뒤 내 옆에 앉아서 과자를 먹고 있던 로로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역시 주인님, 맞는 거 좋아해? 괜찮아, 나, 이해하니까. 가끔, 그런 취향을 가진 어른도 몇 명 있었고.”
“아니, 그런 취향같은거... 없...”
슈욱, 하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게 에샤가 들고 있던 수건을 내게 집어던졌다.
철퍽...!
얼굴에 내려앉은 수건은 무척이나 축축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베헤노스님께 무례를 저질러서, 정말로 죄송합니다아아!”
“아니, 아프지도 않았고... 괜찮으니까 좀 진정하지?”
오히려 눈호강도 해서 아무래도 좋은데. 이런 말을 꺼냈다가는 기껏 진정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아서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에 얼굴과 귀가 완전히 붉게 달아오른 채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에샤에게 말했다.
“어쨌든 사과는 그쯤하고. 일단 모네처럼 자리에 앉지 그래?”
에샤쪽과 달리 모네는 로로의 곁에 앉은 채 열심히 쿠키를 먹고 있었다. 그런 모네도 귀가 새빨갛게 익어있기는 했지만 소란스러운 에샤 쪽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베헤노스님한테 수건을... 그것도 머리를 닦은, 젖은 수건을 던지다니... 아무리 놀랐다고 하더라도... 그런 무례를 저질러버리다니...”
으음, 이건 귀찮다.
그야, 이 세계는 내가 있던 곳과는 다르게 계급사회였다. 아니, 계급사회인 것은 인간을 비롯한 몇몇이고 이쪽은 그런 계급보다 더한... 태어난 종족부터 격이 다르다고 여겨지는 종족사회라고 해야 할까. 여러모로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니란 것 확실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종족의 최고봉, 드래곤의 반려였다. 내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그런 소리를 들을때마다 낯이 간지러웠지만 루시아랑 그렇고 그런 짓까지 하게 된 지금은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에샤가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야기를 하러 왔더니 이러는 건 좋지 않았다.
이래서야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야 될 판이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에샤를 보고서, 낮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에샤. 내가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을 텐데.”
“아...”
내 말에 새빨갛던 에샤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장관이었다. 저렇게까지 안색이 변해버리면 이쪽이 엄청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니, 나쁜 놈 맞구나... 시집도 안간 처녀의 알몸을 봐놓고 그 시집도 안간 처녀한테 오히려 사과를 받는데다가 말 안듣냐며 화를 낸 셈이다.
우와, 개쌍놈인데 그거...
그런 개쌍놈이 되버린 내게 에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 아니... 그... 아...”
“...됐어, 잘잘못을 따지자면 갑자기 찾아온 내 쪽이 잘못이고, 너희는 오히려 내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던 모습을 보인 것이니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러니까, 그쯤 하고 제발 좀 자리에 앉자. 응?”
“...아, 알겠습니다.”
잔뜩 주눅 든 에샤가 자리에 앉자,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진짜로 불편했다.
안 그래도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이런 분위기라니. 조금 봐줬으면 좋겠다. 얼마 전까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몸이 굳어서 제대로 말도 못하던 대인기피증을 앓던 불쌍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온 뒤로는 긴장은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
루시아나 에루나의 앞에서는 잘만 말했고.
왜 이제야 눈치 챘나 싶을 정도로 뒤늦게 눈치 챘다.
이 세계에 소환되고나서부터 바뀐 것은 몸이랑, 이상한 능력만이 아니라 성격도 있었나... 음...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뭔가 나쁘게 변한거라면 몰라도 내가 생각해도 문제가 있던 것이 좋게 바뀌었을 뿐이다.
나쁠 건 없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빤히 나를 보는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막상 자리에 다들 앉혀두고서 딴생각하느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걸 깨달았다.
“으, 흑...!”
거기에 무슨 착각이라도 한 건지, 소리를 죽인 채 훌쩍이는 에샤까지 보였다. 그런 에샤를 보던 나타가 위로하려는 듯 손을 움직이다가 나를 보고서는 움찔하고 멈춰섰다. 그리고서는 눈치를 보며 천천히 올렸던 손을 내리는게 보였다.
개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