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89화
에루나를 피해 도망치다가 혹시라도 쫓아오진 않나 싶어서 뒤를 돌아봤다.
...음, 아무래도 쫓아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능, 위기 감지를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이미 주시자의 눈으로 합쳐진 기능이기는 했지만, 의식하는 동안에는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식이.
내가 인지하는 세계의 범위가 넓어졌다. 정확히는,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위기‘ 혹은 ’기척‘을 감지하는 범위가 멀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주인님."
잡아 먹힌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기겁하면서 일단 가릴 수 있는대로 드러난 살갗을 가리며 뒤를 돌아보자, 로로가 있었다.
에루나가 아닌 로로가 말이다. 나는 뻘쭘하게 고간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런 나를 보며 로로가 물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러는 넌 여기서 뭘하는지 묻고 싶었다.
어째서 내 방이 있는 방향과 전혀 다른 곳에서, 그것도 내 등 뒤에서 네가 튀어나온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거든. 천공성에 또 내가 모르는 무슨 장치라도 있다면 모를까.
"로로. 너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데?"
내 말에 고개를 갸욱인 로로하고는, 들고 있던 옷을 내밀었다.
"옷. 가지고 왔는데?"
그래. 나도 한 쪽 눈은 멀쩡해서 옷을 가지고 온 건 보였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여기에 왔냐는 거였다.
에루나에게서 도망친답시고 아무렇게나 뛰어다닌 결과.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있었다. 정말로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나를 찾아온 로로가 신기해서 물어보자 그런 내 물음에 로로가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한 느낌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주인님의 냄새가 났으니까. 그래서 이쪽으로 왔어. 주인님이, 옷 가지고 오라고 했으니까."
나는 로로의 대답에 충격받았다.
"냄... 새?"
냄새가... 났다니.
나 냄새나?
냄새만으로 날 추적해왔다는 로로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아닌데. 냄새 안날텐데. 분명 매일 구석구석까지 열심히 씻고 있는데...
"주인님, 괜찮아. 주인님 냄새, 나는 좋아하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맙다."
내가 의기소침해하는 이유를 착각이라도 했는지 그렇게 말하는 로로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냄새가 날 수도 있지.
그야 방금 전까진 무진장 뛴데다가, 바로 그 전에 에루나 덕분에 식은땀을 왕창 흘렸으니까. 냄새가 좀 날 수도 있다. 사람이 꽃도 아니고 마냥 향기로울 수만도 없었다. 아니, 사람이니까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좋아. 일단 오늘부터 목욕시간을 두 배로 늘리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로로를 봤다. 뭐 그건 그거고 어쨌거나 지금 로로와 만난 것은 내게 있어서 행운이었다.
더 이상 팬티바람으로 있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좋았어. 로로야, 어떠냐?"
로로가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은 내가, 그런 나를 쭈그려 앉은 채로 지켜보고 있던 로로에게 그렇게 묻자.
"그냥 그래."
냉정하기 짝이 없는 로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 그러냐..."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따라 들어오더니 쭈그려앉은채로 감상하던 주제에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아니, 딱히 상관은 없지만… 이제 겨우 열댓살 먹은 꼬마였다. 딱히 로로에게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물어본 것도 아니고. 정말로 상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마침 딱 좋은 위치에 있던 로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튼, 옷 가져다줘서 고맙다."
"…응."
그런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서, 살짝 기대듯이 머리를 가져다대는 로로를 보고 있자니 딸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딸이라...
딸 하니까 떠오른 것은, 루시아와 나 사이의 아이였다.
루시아를 닮는다면 무진장 귀여울게 분명했다. 나를 닮으면... 아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거기에 강한 드래곤의 유전자가 나 같은 인간에게 질 리가 없었다.
미래의 내 딸은 분명 루시아를 꼭 닮은... 금발에, 태양빛을 닮은 눈동자를 한 귀여운 아이일게 분명했다. 그리고 루시아처럼 똑똑하겠지. 말도 잘할 게 분명했다. 너무 잘해서 날 곤란하게 하지 않았으면 싶을 만큼 잘할 거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원의 너머에서부터 오신 추잡하게 생긴 분이시어.'
"음, 뭔가 기분이 묘한데."
루시아와 닮을, 미래에 태어날지도 모를 딸을 상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루시아랑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아니, 설마...
이거, 그거 아니지? 미래 예지라던가, 위기 감지라던가.
그거 발동한 거 아니지?
아닐 거다.
물론 나도 지금의 루시아가 내숭을 잔뜩 부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야 첫인상과, 지금의 루시아랑 여러모로 달랐으니까. 그리고 그런 루시아의 내숭이 벗겨질 때가 간혹 가다가 있곤 했었으니까.
예를 들면 어젯밤처럼...
'아직♡ 아직이에요♡ 좀 더… 좀 더 힘내보세요, 이지경님♡'
'더이상은 무리라고요? 그럴리가요. 자, 입 벌리세요. 좋아요♡ 흘리지 말고 전부 마시세요♡ 어때요? 이제 좀 기운이 났나요?'
'...이거랑 이걸 섞어서 마시면 효과가 두 배가 되진 않을까요? 한 번 실험해 보실래요?'
'응♡ 좋아요. 좀 더 제 안쪽까지 와주세요. 더, 더...♡ 아하♡ 지치셨다면서, 여전히 단단해서...♡ 앙♡'
아니, 이쪽은 내숭이 벗겨졌다고 해야 할까. 아주 맛탱이가 갔을 때의 루시아인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일 외에도, 요정향에서 엘프들이 루시아를 보며 벌벌 떨었던 모습이나, 에네스타가 루시아를 보고서 ‘두려운 분’이라고 했던 것 까지. 여러모로 진짜 루시아는 내가 알고 있는 루시아랑은 조금 다르리라.
"그쪽은 루시아를 닮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조금, 아주 조오금. 성격은 날 닮는 쪽이 나을지도..."
딸한테 독설을 듣는다던가. 매도를 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아무리 그런 쪽으로 신경 줄이 굵은 나였지만, 딸한테 그런 소리를 듣다가는 정신을 못 차릴 게 분명했다.
...어쩌지. 파파, 갑자기 미래의 딸이 걱정스러운데.
뭐, 아직 한참이나 먼 미래의 일로 걱정하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선.
"로로, 혹시 에오시스 자매들이 있는 방이 어디 있는지 알아?"
지금 해야 하는 일이나 하기로 했다.
나보다도 천공성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로로 덕분에 에오시스 자매들이 지내고 있다는 방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놀란 점이 있었다면, 바로 몇몇 방들은 문을 통해 다른 방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이었다. 로로가 느닷없이 내 등 뒤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다.
덕분에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방 에오시스 자매들의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기 전에 에네스타도 찾아서 데려가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곧바로 찾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관뒀다.
어차피 에네스타가 있는 편이 이야기하기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지, 반드시 에네스타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이야기할 이들은 에오시스 자매들이었으니까.
에네스타나, 낙시안처럼 나에게, 그리고 가신이란 이름의 시스템 아래에 속해있는 이들과는 딱히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어쨌거나 에오시스 자매들의 일은 오늘 중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애당초 그녀들이 아직까지 이곳에서 머물고 있던 이유는, 루시아가 그녀들에게서 원하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들로 하여금 내가 여자를 꺼려하는 것을 고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에오시스 자매들을 건드렸다면 그걸 빌미로 내게서 ‘양보’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행일지 불행일지 나는 에오시스 자매들을 건든 적이 없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그녀들의 도움 없이도, 결국 원하던 것을 이루고 말았다. 덕분에, 굳이 에오시스 자매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어야 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확실히 해둘 건 해두는 편이 좋았다.
아마도, 나는 평생 동안 그녀들을 어떻게 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에오시스 자매들은 평생 독수공방을 해야 되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나도 그런 에오시스 자매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껄끄러울 테고.
“...그런데, 여긴 또 뭐야?”
로로가 안내해준 대로, 에오시스 자매들이 머물고 있다는 방에 온 것은 좋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내가 알고 있는 방과는 많이 모습이 달랐다.
사방을 둘러봐도 초목이 무성한 숲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막 열고 들어왔던 문도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세계수를 심었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방을 숲으로 개조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게다가 어디서 들어오는 건지 몰라도 쨍쩅하게 빛까지 내려쬐는게, 내가 정말로 천공성에 있는 건지도 헷갈렸다.
“마법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마법 말고는 이런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나는 마냥 신기한 걸 보는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나저나 돌아갈 땐 어떻게 해야 하나.
“...베헤노스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 들려왔다.
너무 오랜만인지라 저게 이 세계에서 사용하라고 루시아가 지어줬던 이름이란 것까지 까먹고 있었던 터라, 반응하는 게 좀 늦었다.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나무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무가 말한 것도 아닐 텐데...
“주인님, 거기가 아니라, 이쪽.”
로로가 그런 나를 보고서 손가락으로 내가 보고 있던 곳에서 조금 위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로로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자,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오랜만이네, 나타.”
나는 놀란 눈으로, 나무 위에서 나를 보고 있는 나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전망이 참 좋구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좀 더 준비를 했을 텐데...”
“아니, 이것보다 더 준비해줘도 곤란한데.”
뭔가 나타가 착각하는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딱히 대식가 같은게 아니었다. 대식가인 쪽은 드래곤들이나, 낙시안들이었지 나는 소식하는 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타를 따라가, 테이블과 의자 비슷하게 자라나있는 나무 위에 앉자 이것저것, 잔뜩 들고 나왔다.
하나같이 요정향에서 자주 먹었던 간식들 뿐이긴 했지만. 그러니까, 열매라던가, 그 열매로 만든 과자같은 거 말이다.
나도 좋아했던 거긴 하지만...
과자를 하나 집어먹자, 그런 나를 본 나타가 허겁지겁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드, 드세요!”
“고맙다. 잘 마실게.”
그렇게 긴장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타가 내온 차를 입에 머금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세계수 ‘더스드라’의 새싹 차를 섭취하셨습니다. 즉시 10%만큼의 지구력이 회복됩니다. 지속시간동안 자연회복능력이 100%만큼 증가합니다.]
띠링~
[세계수의 ’더스드라‘의 새싹 차의 효과가 1시간 동안 발휘됩니다. 이 효과는 최대 3번까지 중첩되어 발휘합니다.]
“...으응?”
“어, 어떠신가요?”
“어떠냐니... 이거?”
조마조마하게 나를 보며 묻는 나타에게 그렇게 묻자, 내 예상이 맞았는지 고개를 끄덕인 나타가 말했다.
“루시아네스님이 허락해주셔서, 이곳에 심은 세계수 ’더스드라‘가 처음으로 맺은 새싹 중 몇 개로 우린 차인데...”
그거, 함부로 찻잎으로 써도 되는 거였어?
이상하게 내가 먹는 것 중에는 세계수랑 관련된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그라의 열매라던가, 더스드라? 뭔진 모르겠지만 여기에 심었다는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차라던가. 이러다가 몸에서 줄기라도 자라는건 아니겠지...?
꽤 오래 전에 있었던 일만 같았지만, 마왕의 최후 때 봤던, 온몸에 나무 줄기가 튀어나왔던 것이 떠올라서 어쩐지 좀 떨떠름했다. 그것도 세계수의 씨앗을, 마왕의 몸에 심었던 결과기도 했고.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세계수들의 생명력은 강하니까요. 새싹 한 두 개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테고요. 특히나 여기처럼 마력이 풍부한 장소라면 더더욱.”
내가 걱정하는걸 착각했는지 그렇게 말하는 나타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하고서는 마저 마셨다.
차맛이 어떤지 알 정도로 고급스런 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목으로 넘길 때마다 화하고 시원해지는 게 좋은 차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