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88화 [준비된 시종] (88/370)



〈 88화 〉88화 [준비된 시종]

《오직 한사람의 준비된 시종, 에루나 투아레.》


말이 끝나는 게 무섭다는 듯이 도망치는 이지경의 뒷모습을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예상대로 움직여주신 것은 다행입니다만 역시 거절당하는 건 좋은 기분이 아니군요.”

주르륵, 하고 예의 흘러나온 것을 손으로 닦아낸 에루나는 붉게 물들은 손을 바라봤다. 피처럼. 마치 정말로 피처럼 붉은 그것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건 피 같은 게 아니었다. 자신의 주인, 이지경이 생각했던 것처럼, 골렘이 피를 흘릴 리가 없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자신은.


에루나 투아레라는 이름의 골렘은.

금속과 드래곤의 뼈와 이빨. 생명이 아닌 것으로 비롯되서, 만들어진 인공물이니까.

인공물인 주제에 생명을 갖고 있는 자들과 같은 피를 흘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피가 아닐 뿐, 모양도, 역할도 비슷하기는 합니다만.”

피처럼 붉은 그것은, 골렘인 에루나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생명이, 숨을 쉬는 것처럼. 골렘인 에루나는 마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붉은 것, 마정수는 그런 마력을 액체처럼 바꿔낸 것이었다.

그렇게, 에루나의  안에서 흐르며 드래곤의 뼈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마력을 충당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정수가 골렘인 에루나에게 있어서 피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으레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들에게도 그렇듯이, 골렘인 에루나에게도 그런 것이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루나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보다도 더한 것까지 염두해두고 있었던 에루나에게 있어서, 겨우 이정도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지 에루나가 걱정하는 것은, 이상한 곳에서만 눈치가 빠른 자신의 주인이었다.

“아까의 반응을 봐서는, 아직은 눈치 채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당신의 탓으로 다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당신께서 알게된다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에 스쳐간 가정을, 에루나는 지워 없앴다.

이번 일은, 결코 주인님의 탓이 아니니까.

자신의 주인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국, 지금 일어난 일도 무지로부터 비롯된 실수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지는...

자신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에루나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알게 된다면, 당신을 탓하시겠죠.”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는 에루나가 알고 있는, 여느 인간과는 다른 존재였다.


인간답지 않게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인간답지 않게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인간들이,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 합리화하고, 스스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과는 달리. 주인인 이지경은 온전히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스스로가 벌인 일도, 스스로가 벌이지 않은 일도. 모두 자책하는, 상냥하고, 부질없고, 가련하고, 안타까운, 한편으로는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에루나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꾸며냈다. 상처를 숨기고, 평소를 가장해서, 자신의 주인을 유혹했다.


상냥하고, 안타까운 주인님을 위하여.


그저 도구에 불과할 자신조차도, 가엾게 여기고, 아끼는 유일하고 무이한 존재를 위하여.

주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상처를 숨겼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자신이 원하고, 원하는 대로 자신의 주인인 이지경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전부다 에루나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거부한 주인의 모습에 가슴이 욱신거린 것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평소와 같이 자신의 유혹을 거절했던 주인의 모습을 보고서...


하지만, 에루나는  감정 역시 마음속 깊숙이 감췄다. 자신이 주인인 이지경의 감정을 읽어낼  있듯이, 자신의 주인인 이지경 또한 자신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강한 감정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도 서로에게 전해지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아무리 눈치가 없는 주인이라도 의아해할게 분명했다. 그리고서 내게 물어볼 것이다.

주인이 물어본다면, 자신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상처를 숨긴 것을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주인님은 나를 걱정하리라.


그래서는 안됐다.

당연했다. 자신이 주인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불성설이었다. 절대로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오직 이때만을 위하여 준비되어왔고, 완성되어온, 주인님만을 위한 시녀였으니까.

400년이 넘는 세월을.

오직 한 명뿐인 주인을 위하여 기다려왔던 시녀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주인께 걱정을 끼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완벽하고, 소쇄한 시녀이자, 여섯의 드래곤이 만들어낸 골렘으로써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겨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벌써부터 두 번째의 징조가 나타날 줄은 몰랐던 에루나는 고민에 빠졌다.


두 번째라는 것은, 드래곤들이 안배해두었던 것 중, 두 번째를 의미했다.

여섯의 드래곤들이 남긴 안배 중에서도  번째.

그중 첫 번째는 이미 깨진 뒤였고, 에루나가 생각하기로는 족히 수십 년은 지나야 나타날거라고만 생각했던  번째 징조는 지나치게 빠르게 찾아왔다.


아마도 원인은, 주인인 이지경과 루시아 아가씨와의 교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는 딱히 변한 것은 없었으니까.


 번째 안배는, 루시아 아가씨의 도움으로 완전히 봉인되었지만, 두 번째 안배가  루시아 아가씨에 의해 지나치게 빨리 찾아올 줄은 에루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던 겁니까.”

자신의 창조주이기도 한 드래곤들을 생각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골렘이기도 한 에루나는 중얼거렸다.


첫 번째 안배. 루시아 아가씨의 어버이자, 본인이며, 동시에 타인이자 최후의 금생용이기도 했던 존재.


에네모네스 파라모아.


그녀가 안배해놓았던‘저주’였다.


하지만, 그녀가 안배해놓았던 것은 이미 깨졌다.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 에루나 본인이었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마법진을 통해 넘어온 존재가 ‘드래곤’이 아닐 경우에 발동하는 에네모네스의 안배를, 마법진을 고쳐 그리는 것을 통해 바꿔버린 것이 바로 에루나, 자신이었으니까.

단지 명색의 드래곤이 마련해둔 안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힘이 부족했던 탓일까.


그 안배를 완전히 부수는 것은 에루나로써는 불가능했다. 단지 주인님의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때를 기다리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저 시간벌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지를 잃고, 단지 번식만을 위해 허리를 흔들 뿐인 흡정귀로 종족을 바꿔버리는 에네모네스의 안배는, 주인님의 의지와 주인님을 보호하고 있는 미지의 무언가에 의해 깨졌다.


 이후에 루시아 아가씨에 의해 남은 저주마저 약간의 부작용이 남았을 뿐 봉인되었었다.

그렇기에 조금 안심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첫 번째 안배가 깨진 이상, 두 번째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다음까지는 적어도 수십 년은  걸릴 거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 정도의 시간만 있다면,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주인을.

드래곤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존재가 바뀌는 것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죠... 아가씨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드래곤들의 이기심, 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고, 에루나는 생각했다. 드래곤의 이기심이라고 하면, 아가씨들마저 욕되게 하는 셈이니까. 그렇게 말하면 아가씨들이 너무 가엾었다.


아가씨들이, 그녀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마법진을 통해 소환된 존재와 아이를 만들고, 이 세계가 붕괴하지 않게 자손을 남겨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녀들은, 그녀들의 어버이자 본인이며, 동시에 타인이자,  세계에 남아있던 최후의 용들에 의해 단지 그것뿐인 지식만을 이식받았다. 힘은 온전히 물려받았지만, 지식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그마저도 억지로 쑤셔 넣은 지식들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알에서 부화하지도 못한 존재에게 성룡을 넘어서, 고룡으로 넘어가고 있던 드래곤의 지식을 때려박은 것이었다.


전부 주입하는 것은 가능할 리가 없었고, 억지로 쑤셔 넣은 것마저 많은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드래곤들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리낌 없이 강행했다.

세계의 유지.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자신들을, 본인이며 동시에 자식들이기도 한 존재들을 최후의 용들이 희생시키기로 했으니까.

동시에 자신의 주인마저.

자신들이 미뤄온 일로 인한 일을, 자신들의 실수로 벌어진 일을 모조리 떠넘긴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에루나는 원치 않았다.

에루나는, 자신의 주인인 이지경이 희생되는 것도, 아가씨들이 희생되는 것도,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을 만든 여섯의 드래곤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에루나의 의사였다.


“영혼이란 것을, 제가 믿는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줄 알고는 있습니다만...”


만들어진 존재가.


생물이 아니고.

어미도 아비도 없이.


금속과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골렘일뿐인 자신이,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영혼을 믿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으레, 영혼의 존재를 믿는 존재들은 골렘처럼 만들어진 것을 혐오하고는 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영혼이란 것은, 오직 생물만이 전유물이었다. 무생물인, 골렘일 뿐인 에루나로서는 가질 수도,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다만, 에루나는 믿고 있었다.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겠죠...”

그렇다면, 역시나 자신에게는 영혼은 없는 것이리라.


자신의 모든 것은, 주인인 이지경을 위한 것이고, 그럴 수만 있다면 족했으니까.

스스로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영혼이란 것이라면, 그런 것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사는 주인이 정하면 그만이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존재해왔다. 자신에게는 주인인 이지경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인 이지경은, 오직 이지경이여만 했다.

그렇기에 에루나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왔다.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여왔다.

마법진을 넘어서, 다른 차원에서 소환될 자신의 주인이. 이지도, 이성도 없는 흡정귀로 변할 예정이었던 것을 막아냈다.


그것이 자신을 만들어냈던 드래곤  하나인 에네모네스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법진을 고쳐 그린 것이 에루나였다.

하지만 다음이 남아있었다.


아네모네스와는 다른 드래곤이 남긴 안배가.

그리고  두 번째 안배가. 오늘  모습을 드러냈다.


“...용화라, 정말로 드래곤이 되는 것이라면 두 팔을 벌려 환영하겠습니다만.. 주인님의 힘으로는 고작 해봐야 아룡에 불과하겠죠.”


드래곤과 같은 힘... 정확히는 드래곤이 가진 육신과 같은 힘을 지녔지만, 이성도 무엇도 없는,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주제에 마법조차, 브레스 조차도 뿜어낼 수 없는 가엾은 존재들.


마룡의 애정이 남긴 추레한 찌꺼기와 같은 존재.


아룡이란 그런 것이었다.


많은 드래곤들이 오직 드래곤만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드래곤들이 자신이 사랑했던 누군가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이었다.

드래곤은 이기의 생물이었다.


그리고 오만한 생물이었다.

자신이 바란다면, 그리고 자신이 원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고,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거라고만 생각하는 존재들이었다.

한없이 탐욕스럽고, 한없이 오만한 존재들.


자신의 창조주인 종족이긴 하지만, 에루나는 드래곤이란 종족을 그렇게 정의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법조차 몰라서 한번 차인 것 가지고, 미쳐 날뛴 적이 몇 번이고 있던 종족이니까 그런 소리를 들어도  말 없었다.


그런 종족인 만큼, 몇 번인가 이 세계의 수호자라는 별명답지 않게 미친 짓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마룡이 되어 세계를 멸망시킬 뻔했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아룡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마룡과 아룡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고는 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자신과 같은 종족으로 바꾸기 위해서 제멋대로 판단하고, 제멋대로 바꿔버리고, 결국에는 아룡이 되어,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상대를 보고서 제멋대로 미쳐버렸으니까.


가엾다고는 생각했다.

제멋대로 굴었다가, 제멋대로 미쳐버리는 드래곤쪽이 아니라.

본래는 인간이었던 존재가.

본래는 엘프였던 존재가.

혹은 다른 무언가였던 존재가.

강제로 드래곤이라는 존재로 바뀌었기에 그 강대한 힘에 눌려서 아성을 죽임 당했을 그들을 가엾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인 이지경이 그런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 또한, 에루나는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나치게 빠르게 징조를 드러낸 드래곤들의 두 번째 안배에, 에루나는 아주 오랜만에 골치가 아파왔다.

300여년만에 겪어보는 두통에 에루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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