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85화 (85/370)



〈 85화 〉85화

응, 저런  계속 달라붙어오면 조금 과하다 싶은 오늘의 일도 이해가 갔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고생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네스타를 보고 있자니 뺨을 붉히며 에네스타가 말했다.


“그, 나의 주...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불쌍함이 묻어있었다.

농담이지만.


에네스타의 물음에 고개를 젓고서는 바록과 바쿠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일단 두 녀석이 깨어나면 자중하라고 얘기해둘게.”

내가 얘기한다고 들어먹으려나 싶긴 하지만. 내 말이 먹히지 않는다면 바록과 바쿠를 기다리는 것은 에루나였다. 대체 낙스에서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몰라도 로로를 제외한 낙시안들은 전부 에루나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에루나에게 맡기면 낙시안들에 대한 대부분의 일은 해결할  있었다.

이렇게 곧장 에루나에게 떠넘길 생각을 하는 건 조금 글러먹은 것 같지만... 뭐, 어때. 내가 할 수 있는 것, 거기에 에루나의 능력이 포함됐을 뿐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사용하는 게 좋은 거다. 어제부터 그런 남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이 세계에서, 매일 매일이 온전히 내 힘만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제와서 내가 해야만 한다, 그렇게 말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는 거다. 어제만 해도 에루나가 미리 준비해뒀던 것들이 없었더라면 말라비틀어져서 침대 위에서 퍼져있었을 내가 말하는 거니까 확실했다.

온전히 나만이 해야 하는 일 같은 건 없는 거다. 남는  자존심뿐인 생각은 개나 줘버리기로 했다. 자존심을 챙기려다가 복상사나 과로, 신경쇠약 같은 걸로 죽는 건 사양이니까.


“주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야...”

내가 하는 걱정을 알 길이 없는 에네스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제야 좀 살 수 있겠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띄었다.

정말로 고생했었나보구나...


그나저나... 나도 올라간 능력치를 확인할 겸 에네스타에게 대련이나 하자고 하려고 했었는데 저런 얼굴로 안심하고 있는 에네스타에게 말하기엔 그랬다. 방금까지 바록과 바쿠에게 시달린 사람한테 이번에는 에네스타로써는 거절도 할 수 없을 내가 부탁하는 거다.


응,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 건데. 그런 일만큼 짜증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젠 일과로 자리 잡은 에네스타와의 수련 겸 대련이 없으면 나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애당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해봐야 수련 정도뿐이니까 당연했다.

어차피 나야 여기서 뭔가 해야 하는 입장도 아니고, 몸만 건강해서 밤일만 잘하면 되는 입장이니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당사자인 나로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심심한 거다.


적어도 내게는 오늘 저녁까지는 시간을 때울만한  필요했다. 기왕이면 힘들지 않은 걸로.

음, 이 조건으로 따지자면 에네스타와의 수련은 처음부터 안하느니 나았구나.

그렇다면 다른  뭐 없을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었다.

사실, 떠올랐다기보다는 이미 머릿속 한편에 치워뒀던 것을 다시 끌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에네스타, 에오시스... 나타나 에샤나, 모네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바로 여태껏 방치해두고 있던 에오시스 자매들에 대한 것이었다.

내 물음에 에네스타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이라면 루시아네스님께서 배려해주셔서... 아마 지금 이 시간에는 방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겁니다.”


“...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에오시스 자매들은 전부 무희... 정확히는 요정향에 있는 세계수의 자손, 에이그라의 무녀들이었지.


그게 대체 뭘 하는 직업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관련한 일이라고 하니까 기도도 아마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듣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지만.

“네, 루시아네스님께서 에이그라의 씨앗을 이곳에 심어도 된다고 허락해주셨기에... 지금쯤은 새로운 세계수의 싹이 트길 바라며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에네스타가 그런 말을 했다.


...이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여긴 내 집인데. 분명...  집이었을 텐데. 집치고는 엄청 커서, 나도 모르는 방들 투성이긴 하지만 일단은 내 집이었을 텐데.

그 모르는 것투성이인 천공성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모르는 것들이 잔뜩 늘어나고 있었구나.


나중에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아닌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의 주...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어째서 그 아이들을 찾는지 여쭙어봐도 되겠습니까?”

“상관없긴 한데...”


 일도 없고, 떠오른 김에 만나러 가는 것뿐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그랬다. 하물며 눈앞에 있는 에네스타는, 에오시스 자매들의 고모인만큼 더더욱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요정향을 떠나 천공성에 오게 된 에오시스 자매에게 있어서 에네스타는 유일한 동족이자, 어른이자, 보호자인 셈이니까.


어떻게 말하면 좋으려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잘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기도라는 게 대체 뭔지 궁금하기도 해서 말이지.”

적당히, 에네스타가 말해준 것들을 주워 담아서 그대로 입 밖으로 내자, 쩌적하고 굳어지는 에네스타의 표정을 볼  있었다.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굳어진 에네스타의 얼굴을 보고서 뭔가 실수한 게 있나, 내가 했던 말을 돌이켜봤지만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말한 건 사실이고, 대체 무슨 기도를 하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고... 딱히 그거  개뿐인데?


아니지. 내가 아니라, 에네스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렇게 생각해보니 에네스타의 표정이 굳은 이유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네스타가 보기에는 천공성에 에오시스 자매들, 조카들을 들인 내가 여태껏 방치해둔 주제에 이제 와서 안부가 궁금해서 찾아가는 거라고 여길 수도 있을 수도 있었다.

내가 한 말을 다르게 보면, 여태 방치해둔 주제에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니 말이다.


으음... 어쩐다. 그렇게 생각하니 말실수를 한 게 맞았다.

이 딱딱해진 분위기를 어쩌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에네스타, 너도 같이 갈래?”

“...네?”


이렇게 된 이상 에네스타의 앞에서 사실 속으로는 에오시스 자매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어필을 하는 작전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에네스타가 보는 앞에서 그런 티를 마구 내줘야했다.


추하지만 뭐 어때.


“그 말씀은... 나의 주, 제가... 끼어도 좋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내 말에, 어째선지 쭈뼛거리며 그렇게 묻는 에네스타가 보였다. 뭔가 반응이 이상하지만, 에네스타가 이상했던 적이 이번 한번만 있던 것도 아니고 해서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주변인물 중에 정상인 녀석을 찾는 게 더 힘들었다. 에루나도 그렇고 검술 외에는 허당끼로 가득한 에네스타도 그렇고, 혹시 마조가 아닐까 생각되는 바록과 바쿠도 그렇고, 노팬티라도 괜찮은  같은 로로도 그렇고...

죄다 어딘가 삐걱거리는 것 같은 녀석뿐이었다.


그런 녀석들만 주변에 있다 보니 얼굴이 조금 빨개지는 것 정도야 이상한 축에도 들지 않았다. 혈액순환이 잘되는가보구나, 그렇게 여기고 끝이었다. 아무튼 조금 이상한 것 정도야 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잘 생각해보니까, 에네스타를 데려가는 건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에오시스 자매들은 본래 루시아가 내 밑으로, 시녀로 넣은 아이들이었다.

에루나가 없는 동안, 임시라는 명목으로 넣었을 뿐이긴 했지만... 그 임시가 에루나가 돌아온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이상한 경우이기도 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말이 임시 시녀지, 본래 루시아가 그녀들을 내 시녀로 둔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응, 아마 미인계였을 거다. 내가 조금 많이 눈길을 두었던 나타로 변신한 루시아가 밤에 쳐들어온 전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나타를 유독 많이 봤던 이유는 그냥 에오시스 자매들 중에서 그나마 루시아를 닮은  나타여서 그랬을 뿐이지만.


응, 가슴의 크기가 나타가 에오시스 자매들 중에서는 제일 컸으니까.


나도 남자였다.

아무리 자제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거다.

아무튼, 애시당초 미인계를 목적으로  시녀로 두었던 에오시스 자매들은, 루시아의 계획대로라면, 루시아가 말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타인과 멀리하는 내 경계를 허물 요량으로 데려온 아이들이었다는 거다.

경우에 따라서, 진짜로 나와 밤을 보내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들었다.


내가 한 약속, 즉, 사랑이 없는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건 싫다고 말한걸 어겼으니까 자신들 쪽에서 덮쳐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밀어붙이려는 계획도 있었다고 들었다.


즉, 임시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루시아가 데려온, 루시아가 보기엔 나와 밤을 보내도 좋다고 판단한 측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에루나가 돌아온 뒤로도 돌아가지 않고, 요정향의 장로들과 대화 끝에 천공성에 머물고 있는 거고... 처음부터 임시 시녀가 아니라  옆에 둘 목적으로 데려왔던 거니까.

어째서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느냐면, 루시아에게 직접 들어서 그런 거다.


관계 중에 어쩌다가  밖으로 나와서, 어쩌다가 듣게 된 거긴 하지만... 덕분에 조금 충격 먹긴 했었지. 루시아가 그런 계획을 짜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아무튼, 그런 입장이었던 에오시스 자매들에게 덜렁 나 혼자서만 찾아가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옆에 에네스타가 있다면 그 부담감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오시스 자매들 역시, 에네스타가 옆에 있는 쪽이 더 좋을 테고.

에오시스 자매들이 원한다면... 요정향에 돌려보내는 것도 생각하기로 하면서 에네스타에게 말했다.


“역시 에네스타도 같이 가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

“괘, 괜찮습니다. 네, 저는... 괜찮지만... 나의 주, 주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뭘 그리 걱정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잔뜩 주눅 든 모습의 에네스타가 보였다.


“나는, 오히려 에네스타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쳐져있는 에네스타는 엄청나게 귀찮다는 걸 알고 있는 관계로 축 처진 에네스타의 어깨를 펴줄 겸, 그렇게 말했다.


“그, 그런... 그런... 제가 없으면 안 된다니, 그런 말씀을... 아, 안됩니다. 나의 주... 주께서는 루시아네스님께서 계시는데...”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  같은데.


뭔가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에네스타가 보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찮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에네스타.”


“...네...?”


이름을 불리자,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보는 에네스타에게 말했다.


“옷부터 갈아입고 와라.”


사실 아까 말하고 싶었는데,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같아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던 걸 입에 담았다.

에오시스 자매들을 보러 갈 때, 그런 차림으로 가면 오해를 살게 분명하니까.

내 말에, 에네스타는 천천히,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아, 아아아아...!”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가슴팍 한 가운데가 훤히 드러나게 찢겨진 것을 확인한 에네스타가 덜덜 떨며 말했다. 다행히, 가슴이 전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가슴 골만 훤히 드러난 것이 오히려 더 에로했다.

거기에 뒤늦게  사실을 눈치챈 에네스타가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했지만, 그런 에네스타의 손바닥으로는 절묘하게 전부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찢겨져 있었다.

에로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에네스타가 그걸 감추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전혀 감춰지지 않았다.

아무튼 에로했다.


결국, 고장이 난 기계처럼 뚝하고 굳어버린 에네스타가 입을 열었다.


“...언제...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랬냐고 묻는 거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 나는, 저만치 기절해있는 바록과 바쿠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런  손가락을 따라, 에네스타 역시 기절해있는 바록과 바쿠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로로.”


그리고, 옆에 있던 로로를 불렀다.

“응, 불렀어?”

“응, 불렀다. 저기 가서, 에네스타의 옷가지가 있는지 확인 좀 해보렴.”


“응.”

내 말에 로로가 총총 걸음으로 기절해있던 바록과 바쿠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요리조리 확인하는가 싶더니 꽉 움켜쥐어져있던 바록의 손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휙휙.

그 무언가를 집어든 로로가 이게 맞느냐는 듯이, 손에 쥔 검은 쪼가리를 흔들며 나를 봤다.

응, 저거 맞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다시 총총 걸음으로 다가온 로로가 내게 천쪼가리를 내밀었다.


나는 로로에게 받은 천쪼가리를 그대로 에네스타에게 넘겨주었다.

“......”

예의, 에네스타의 가슴팍을 감춰주고 있었던 천 쪼가리가 아마 저것이었을 거다. 나는 쩌적, 하고 굳은 얼굴을 내게 받은 천쪼가리와, 가슴팍이 뜯어진 옷을 번갈아보며 확인하는 에네스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다 보였는데. 덕분에 눈은 즐거웠다.”


후우웅...


바람이 찢기는 소리.

에네스타의 주먹이 쇄도해오는 것이 보였다.


응.


능력치가 올라가긴 했나보다. 엄청 느릿하게, 날아오는 에네스타의 주먹이 보였다. 어쩌면, 내가 주마등 비스 무리한 것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안 아플 테니까, 상과 없었다.

오히려 좋은 가슴을 본 대가가 겨우 이 정도라면 수지맞은 셈이었다.


“자, 와라!”


나는 그대로 가장 낙법으로 바꾸기 좋은 자세를 취하며 그렇게 외쳤다. 그런  얼굴에 에네스타의 주먹이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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