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3화 〉83화 (83/370)



〈 83화 〉83화
에루나에게 아침은 루시아가 일어났을  같이 먹겠다고 전해두고서, 나는 루시아가 일어날 때까지 옆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골라잡은 책은 언젠가는 읽겠지 싶어서 미리 침대 옆에 있던 탁자 밑에 놓았던 책 중 하나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손에 잡힌 책은 이종족인 연인을 갖게 된 초월자의 수필인 듯 했다.


부제는 당신도  수 있다 엘프 마누라를 얻는 방법!

...참고로 인간 출신의 초월자가  책이었다. 초월자가  이상, 본래는 어떤 종족이었는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말이다. 초월자가 됐다는  자체로, 종족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의미니까. 아무튼, 제목에서부터 지뢰작임을 느낀 나였지만 다른 책을 고르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읽어보기로 했다.


책이 쓰인 날짜를 확인하니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에 쓰인 책이었다. 여기에 있는  중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쓰인 책이였다, 적어도 내가 읽었던  중에서는 가장 최근의 물건이었다. 내가 여태 읽었던 것은 대부분 연대가 수백 년은 더  물건들이었으니까.


책의 내용도 여태껏 읽었던 것들, 지식을 전하거나 자신의 기술을 남긴다거나, 그런 부류도 아니었다. 이런 것도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책은 정말로 장절하고도 거창하게, 자신의 연인을 자랑하는 내용들 투성이었다.


눈이 쓰라렸다. 괜히 펼쳐본 것 같았다.

다음 페이지로 넘겨봐도 내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대체로 자기의 연인을 자랑하거나, 둘이서 꽁냥거린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떤 운명적인 첫 만남을 했었는지, 어떻게 알고 지내다가 사랑에 빠졌는지, 결국 종족의 차이를 넘어서 연을 맺었는지, 일기처럼 쓰여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입에서 설탕이 나올 것 같이, 혹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이 달달한 내용이었다.

나야 루시아가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이런걸 책으로 남길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뭐, 한 번 읽기 시작한 것을 관두는 것도 그렇고, 어차피 시간 때우기였으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계속 읽고 있자니, 부스럭하고 옆에 있던 루시아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이지경님...?”


“아, 일어났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머지는 나중에 읽기로 하고서 책을 덮고 옆을 바라보자, 루시아가 칭얼거리듯  허리를 끌어안고서 중얼거렸다.

“조은 아치미에요...”


좋은 아침이라고 하기엔 이미 해가 중천인데 말이지.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아침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런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좋은 아침. 루시아.”

 대답에 후후, 하고 기분 좋다는 미소를 짓던 루시아가 이내 멈칫했다.

그러고선 나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변태.”

변태라니. 갑자기 너무했다. 터무니없는 품평절하의 발언을 하는 루시아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자니 찰싹하고, 루시아의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얻어맞았다.


따가웠다.


아니, 가슴정도는 만져도 되잖아. 어차피 이제 내꺼라고 했잖아! 내가 내걸 만지는데 방해하다니 너무한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 항의의 눈초리로 루시아를 바라보자 그런 나를 흘겨보던 루시아가 말했다.


“...그런건 밤에만 할 거니까요”


밤이라니... 아직 한참 멀었잖아. 벌써 해가 중턱에 떠있기는 했지만, 저물기까지는 아직 수 시간은 더 남아있었다. 그때까지 가슴도 만지지 못하게 한다는 건 너무한 소리였다. 덕분에 의기소침해하고 있던 나를 본 루시아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정말... 하지만 정말로 가슴은 안돼요.”

“진짜로 안 돼?”

“진짜로, 안돼요.”

너무해. 이건 폭거였다. 나는 남자로써, 이 부당한 처사에 맞서 싸우기로 다짐했다. 그런 나에게, 루시아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대신, 자아. 제가 안아줄 테니까요...? 지금은 그걸로 만족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팔을 벌리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덕분에 그 커다란 가슴이 훤히 다 보였다.


그렇다. 루시아는 아직 알몸이었다. 둘 다 지쳐서 옷이고 뭐고 갈아입을 새도 없이 곯아떨어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나를 향해 양 팔을 벌리면 훤히 다 보이는 가슴을  나는 생각했다.

저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직접 만지는 것보단 못하겠지만. 괜히 투쟁이니 뭐니 힘 빼는 것보다 그냥 이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나를 향해 팔을 벌린 채 기다리는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꽈악, 하고 그런 나를 루시아가 껴안았다. 나 역시 그런 루시아를 꽈악 끌어안았다. 따듯하다. 어쩐지, 가슴 한 켠이 간지러운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하면 좋을 것 같다싶은 말이 떠올랐다.


내친김에 하기로 했다. 나는 루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쿠쿡, 하고 루시아가 웃었다. 간지럽다는 듯이, 목을 움츠렸다가 루시아가 대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이지경님.”

부끄럽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서 아기고양이처럼  가슴팍에 뺨을 부비는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밤까지 가슴 만지면 안 되나?




루시아도 일어났겠다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서, 에루나에게 후식이라며 받은 케이크까지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그리고 한가지 더, 왠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아는 케이크 먹는 내내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혹시 감기라도 걸린 건가 싶어 걱정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만 들을  있었다.


...음, 뭔가 숨기는  있는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다. 이왕이면 내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지만... 뭐, 말하고 싶지 않다는걸 억지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루시아도 중요한 일이였다면 숨기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거나 케이크는 정말로 맛있었다. 에루나에게 다음에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주인님이 노력하신다면 얼마든지 만들어드리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만드는건 에루나인데  내가 노력해야하는 걸까. 아무튼 또 만들어주겠다는 모양이니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렇게 식사도 마치고나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즉, 오후였다.

아침을 먹자마자 점심시간이 다됐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이미 배도 잔뜩 부른 이상 점심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아침식사를 마친 루시아가 말했다.


“그럼, 이지경님. 저는 잠시 제 영지에 다녀올게요.”


“응? 또?”


“죄송해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루시아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일이 바쁘구나. 단순하게 면적만으로 따지자면 자그마치 대한민국, 그 이상의 땅덩어리의 주인인 루시아인만큼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쉽기는 했지만,  수 없는 일이었다.

루시아가 마냥 놀고만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나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밤이 되기 전까지는 반드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떠나던 루시아를 배웅하고서, 습관처럼 에네스타와 수련을 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향하던 내가 말했다.


"로로, 신경 쓰이니까 좀 나올래?"


내 말에 스윽, 하고 열 걸음 정도 밖에서 나를 쫓아오고 있던 로로가 얼굴을 내밀었다.

쫓아올 거면 당당하게 와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몰래 몰래 쫓아올 필요도 없으니까.

그림자라도 되는 것 마냥 뒤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거기에 발까지 맞춰서 소리도 죽인 채 다가오면 엄청 신경 쓰인다.

괜히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저렇게 은밀하게 쫓아오면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보통이라면 눈치 채지 못한다고 한들, 나는 이미 눈치 챘으니까 신경 쓰이는 거다. 그렇게, 얼굴을 드러낸 로로가 빤히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디가, 주인님?”


 역시 그런 로로를 빤히 바라봤다.

저주받은 아이.


낙시안의 소녀.


그리고 내가  운명을 거둔 아이.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부덕의 군주니 뭐니 하는 너무한 호칭이 생기고 말았지만 말이다. 덤으로 받는 피해가  배가 되기도 했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이마에 작은 뿔이 돋아있는 연갈색 피부의 아이를 바라보던 나는 까딱까딱, 그런 로로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 손짓에 고개를 갸웃이던 로로는 이내 총총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뭐,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니, 후회할 리가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눈앞에 있는 로로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거다.

이제 겨우 일주일 남짓 지났을까 말까했지만 로로는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서 살도 통통하게 오른 것이 정말로 아이다워져 있었다. 처음 봤을 무렵, 독기로 가득했던 눈을 하고 있던 소녀는  이상 없었다.

여전히 에루나를 보는 눈은 조금 험악한 것 같지만, 에루나의 성격때문일테니까 넘어가고.

내게 다가온, 에루나와 마야, 니아의 시녀복과는 달리, 색을 반전시킨 듯한 검게 물들은 시녀복을 입고 있는 로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개털과 하등 다를  없는 내 머리카락과는 달리 엄청 부드러웠다. 버릇이 될 것 같은 감촉이었다.

샴푸는 뭘 쓰려나. 아, 여기엔 그런 거 없었지...

아무튼, 로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네스타에게 간다. 에네스타는 알고 있지?”

“응. 귀가 뾰족한 여자들  가장 가슴이 큰 여자.”


“...그 말, 에네스타 앞에서는 하지 마라?”

크기는 하지만. 응, 분명 크기는 하지만? 전부 슬렌더했던 엘프치고는, 에네스타나 에오시스 자매나, 혈통인지 뭔지는 몰라도 전부 가슴이 크기는 하지만 말이지? 특히 에네스타가 제일로 큰것도 맞기는 하지만 말이지? 그걸 면전에다가 대고 말하면 엄청 혼날걸?


에네스타가 에루나처럼 내 마음속을 읽을 수 있었으면 혼나는 건 나일 것 같지만.

“응, 알겠어. 주인님이 말하는 대로 할게.”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로로를 보다가, 뭔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로로. 너는 마야나 니아처럼 시녀일은 배우지 않는 거니?”

내가 혼자 에네스타를 보러 가는 이유도 그거 때문이었는데. 보통이라면 내 곁을 지키고 있을 에루나는 아침식사를 마쳤을 무렵, 드워프들에게 부탁했던 물건이 도착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마야와 니아를 데리고 가도 되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도착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평소와 같은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보고해온 에루나와 달리 마야나 니아나 둘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에루나 혼자서 그렇게 말했다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의심부터 했을 텐데, 마야와 니아의 존재가 의심을 희석시켰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자, 에루나와 마야, 니아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서 도착한 물건인지 뭔지를 확인하러 갔었다.

이게 지금 내가 혼자... 아니, 로로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혼자 연무장으로 가고 있던 이유였다.

아무튼 내 질문에 로로가 말했다.

“응. 나는 주인님의 직속. 그러니까 주인님의 명령만 들으면 된다고 했어. 그리고 명령이 없을 때는, 내가 하고 싶은걸 하랬어.”


로로의 대답에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야나 니아와 달리 로로는 에루나의 휘하의 시녀가 아니었던가? 확실히, 임명했던 직책도 시녀가 아니라 암살자였기도 하고... 애를 암살자로 임명하다니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어쨌거나 로로의 대답 덕분에 로로 혼자서만 따로 행동하는 이유는  수 있었다.

로로도 이러니까, 아마 시종으로 임명했던 바록이나 바쿠, 그리고 집사로 임명했던 슈슈도 자기 알아서 뭔가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딱히 내가 뭘 시켜둔 것도 없으니까 알아서 지내고 있는 거다.

이거 말고도, 아예 정해두지 못한 에오시스 자매들도 있고,,, 에루나와 비슷한 직책, 기사장을 맡고 있지만 밑으로는 단원 하나 없는 에네스타도 있었다.

...여러 가지로 나도 신경써야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방치해둔 것이 너무 많았다.

머리 아픈 건 사양이라서, 루시아만큼은 아니겠지만 해야할 일이 천지인 나는 현실도피를 하며 로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로로는 뭘 하고 있을까?”


아, 무심코 우리 로로라고 불러버렸다.

로로를 비롯해서, 내가 가신으로 삼은 이들에게 공통으로 느끼는 유대감 때문이었다.


가족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대하는 듯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였기에 무심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까놓고 말해서, 덩치가 산만한 바록이나 바쿠나, 나보다 훨씬 강한 에네스타, 에루나는 몰라도 겉보기에도 아이 같고, 실제로도 아이인 로로나 마야, 니아, 슈슈들은 마치 자식같이 여겨지고는 했다.


아니, 자식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내가 보호해야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게 부성애라는 걸까. 아직 아이도 없는데 부성애라니 뭔가 웃긴데.

어쨌거나, 실수했다고 생각하던 나랑은 다르게 로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주인님을 지키고 있었어.”

나를? 난 왜? 의아해하며 로로를 보자니, 로로는 어디선가 많이  듯한 표정으로, 즉 에루나와 같은, 무척이나 당당하면서도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주인님은 약하니까.”


...내 허리쯤 오는 꼬꼬마한테 약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 아니, 일단... 응, 약하기는 한데... 그래도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거든?


본의 아닌 도핑으로 급성장을 이룬 지금은 로로보다 약하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그럴 거다.

능력치상으로라면 아직 어린 낙시안인 로로보다는 이쪽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대견한 소리를 하는 로로에게 그런건 필요 없다고 매정하게 말하기는 그랬다. 제 딴에는 나를 위한다고 하는 행동인데 여기서 딱 잘라서 그렇게 말하면 비뚤어질지도 몰랐다. 나는 기왕이면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보다는 또래의 친구들인 마야나 니아, 슈슈랑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왜 내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애매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알고 있었다.


“뭐어, 열심히 해라.”

나는 로로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면서 그렇게 얘기했다.

“...응.”


그런 내 손길에 지그시 눈을 감은 로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로로도 아이이니 금방 질릴 거다. 하는 것도 없는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보다 또래 친구들이랑 노는 쪽이 더 즐거울 테니까. 몇 번 따라다니다가 말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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