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6화
멍하니, 입가를 더듬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 입술이 맞췄다기보다는 살짝 닿았다는 느낌의 가벼운 키스. 아니, 키스가 맞나? 진짜로 나 키스당한거야?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가 뭘 당한건지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더듬은 입가에 남은 루시아의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전해진다는 것이었다.
나랑은 다른 체온. 살짝 뜨거운 듯한, 따듯한 듯한 그런 온기가. 루시아의 온기가. 더듬거리며, 사라져가는 루시아의 온기를 매만지고 있는 나에게 루시아가 말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이지경님이... 당신이 알려주셨으면 해요.”
그런 나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를 보자 점점 현실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 키스 당한 거 맞구나. 키스를 당했다고 표현하니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당한 건 당한거지. 아무튼 조금 진정되니까 상황이 매우 좋... 아니, 안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내 앞에 있는 루시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존재자체만으로 내 이성이 위험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내 아들내미가 사고를 칠 기세였다.
일단 루시아를 진정시켜야겠다. 그런 일념으로, 최대한 루시아의 나신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내게 반쯤 몸을 기댄 루시아를 밀어냈다.
“저기, 루시아. 일단 진정하고...”
“아...”
애써 손에 닿은 루시아의 살결에 대한 감촉을 무시하면서 떼어내자, 그런 나를 보며 루시아가 눈에 띠게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내가 엄청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엄청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가? 웬지 일단 사과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아무튼 루시아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풀이 팍 죽은 루시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지경님은 제가 싫으신 건가요?”
“그게 아니라... 뭔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구체적으로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하긴 했다. 루시아의 성격상 이런 일은 하지 않을 텐데. 그런 나에게 루시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제가, 이지경님에게 입을 맞춘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게...”
“그게 아니라면 뭔가요? 역시... 제가 싫으신 건가요?”
살짝 주눅 든 듯한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 루시아. 거기서, 그런 자세로, 그런 눈으로 보는 건 반칙이잖아... 아니지, 이지경아 여기서는 정신 단단히 잡아야 된다. 깜빡하면 꼴깍 잡아먹힐 판이니까.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고쳐 잡고는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루시아, 대체 무슨 일이야?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우와. 내 말에 루시아의 눈이 아주 한순간뿐이었지만 뾰족하게, 전에 한 번 봤던 그런 눈이 된 것이 보였다.
무서워라. 잡아먹힌다는 게 그쪽의 의미가 아니라 원래의 의미로 잡아먹히는 게 아닐까 싶은 눈이었다. 덕분에 바짝 쫄아 있는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한숨을 내뱉었다.
“아아... 그랬었죠. 이지경님은 이유가 없다면, 도통 그 말을 믿지 않는 분이셨죠.”
“...엉?”
갑작스런 루시아의 말에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루시아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믿질 않는다니. 내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믿을만한 사람 자체를 만나질 않았다. 방에 틀어박혀만 지냈으니까. 가끔 보는 사람은 매달 바뀌는 편의점 알바나 슈퍼마켓 주인아줌마, 배달원 정도뿐이었고.
자랑은 아니니까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면,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서, 한 발짝. 내게서 떨어진 루시아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한번쯤은 이런걸 해보고 싶었거든요. 책에서 읽어본... 연인의 입맞춤이라는 걸요. 뭐... 그런 책을 읽게 된 것도, 이지경님을 이해하고자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된 것이기는 했지만요. 마침, 제게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이지경님뿐 밖에 없기도 하고요.”
“......”
연인이라... 엄청 낯간지러운 말인걸.
“그러니까 이지경님도, 해주실 수 있나요? 그, 연인의 입맞춤이라는 걸요. 제가 한 것은 아무래도 조금 다른 것 같아서...”
“...하긴, 방금 그건 연인의 입맞춤이라기보다는 도둑 키스에 가까웠으니까.”
“도둑 키스요?”
그런 게 있다. 아니, 없지만. 그런 단어가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 그냥 도둑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당해서 그렇게 붙였을 뿐이니까.
왜 자꾸만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역시 분위기라고 해야할까. 평소의 루시아랑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달랐다. 말로 이쪽을 휘둘러대는 것은 언제나의 루시아랑 같은 것 같지만. 아무튼 뭐라고 할까... 술에 만취한 상대랑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이쪽의 말은 제대로 전달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는, 뭐 그런 거. 이런 사람을 대할 때는 일단 얌전해질 때까지 달래다가 재워놓고는 맨 정신일 때 이야기하는 게 최곤데...
빤히 나를 바라보는 루시아를 보먼 잠들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루시아, 역시 뭔가 이상하니까 우선 옷부터 입고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
"싫어요."
으응…?
"또 이렇게 넘어가면, 이지경님이라면 다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저랑 단 둘이 있으려는 걸 꺼려할게 뻔하니까요."
“그건...”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다는 것부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겠지. 아마 루시아의 말 대로였다. 적어도 한동안은 루시아랑 단 둘이 있을때마다 이번 일이 생각나서 난감해할게 분명했다.
"……"
"……"
결국 입을 꾹 다문 채, 루시아를 바라봤다. 루시아가 이렇게까지 나온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리고 아마, 그건 내 탓일게 분명했다.
사실 내가 말로는 1년 안에 꼬셔주겠다니 뭐니 해놓고서 한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몇 번인가 루시아가 내게 물었던 적도 있었고 말이다.
나보고 정말로 자신들을 꼬실 생각은 있긴 하냐고. 글쎄...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처한 상황이 지금도 그리 실감이 가질 않기도 하고. 물론, 알고는 있었다. 별안간 이 세계에 소환되어, 별안간 묘한 처지가 된 것을 제외하면 내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말이다.
딱히 새로 말을 배우지 않아도 제대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매일 컵라면이나 인스턴트,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호화스러운 음식들이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나오고, 하나같이 원래 있던 세계의 연예인들 뺨치는 미녀들의 수발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게임이나 뭐 그런건 없다지만 일단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것들은 대부분 이뤄주고 있으니 행운아라는 말이 적절했다.
몇몇 게임의 클리셰처럼 다짜고짜 소환되어 나무 뭉둥이 하나만 덜렁 들고 밖으로 나가 몬스터를 패야하는 입장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게임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정작 그 당사자가 된다면 무슨 기분일까. 마왕보다는 자기를 소환한 놈을 먼저 패고 싶을 것 같은데.
아무튼, 내가 이 세계에 소환된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루시아처럼 아름다운 미녀들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해서 아이를 만들뿐이면 그만인 것이다.
적어도... 목숨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디 낯설고 험한 곳에 떨어져서 굶어죽거나, 맹수나, 나는 전에 봤던 프록이 전부였지만 사실은 꽤나 흔한 모양인 몬스터 따위에게 습격당할 일도 없이, 그저 매일 같이 미녀들과 살을 맞대기만 하면 될 뿐인, 간단하다면 간단한 일인 거다. 대부분은 양 손 들고 환영해 마다하지 않을 그런 이야기.
다소 불편한 게 아예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목숨이 날아가거나 그런 일은 없으니까. 지금 생각해봐도 이게 웬 횡재냐 싶을 정도로 좋은 조건인 셈이다.
하지만 처음, 루시아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녀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거였지만 그녀들은 받아들여줬다.
뭐, 이래나 저래나 아무래도 좋으니까 상관없다는 느낌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받아준 건 받아준 거다. 그 점을 나는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 루시아를 비롯한 드래곤들의 입장에서는 마법이 통하지 않더라도 힘으로 눌러서 침대에 눕혀버려도 내가 저항할 수는 없고... 지금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계에 보호받는다는 특성인 ‘차원을 넘은 자’도 여러모로 어설픈 모양이고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특성, 내가 신뢰하고 있는, 혹은 내가 거부하지 않는 선에서 접촉이나 물리적인 데미지는 그냥 내버려두는 모양이라서 말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공격이라도 지멋대로 막아주지만, 내가 인지하고서, 아 저건 괜찮겠다 싶은 것들은 죄다 통과해서 두들겨댄다. 그 예시로, 에네스타의 본의 아닌 팔 꺾기가 그대로 먹혀들어갔던 것처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건,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니, 상황이 아니라...
나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펴보고 있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어째서 루시아가 나 같은 놈의 눈치를 보는 걸까. 알고 있었다. 루시아는 두려워하는 거다. 나 같은 녀석한테,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긴, 내가 여태껏 해왔던 행동 때문이겠지.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 건, 전부 거절이나, 거부... 싫다고 했던 것뿐이니까.
내가 먼저 루시아를 만나려고 한 적도 없었고, 언제나 루시아가 먼저 나를 찾아와줬다. 지금도 그렇고, 전에도, 여태까지 계속해서. 불안할 만도 했다. 내가 한 번이라도 먼저, 루시아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적어도 오늘 같은 일도 없었을 거다.
'왜?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는 거야? 이래서 동정들은...'
그때와 같았다. 그때도 나는 누군가가 떠밀지 않는 이상은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이였다.
녀석이랑 처음 만났던 계기도,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였었다. 반쯤 분위기나, 흐름 같은 것에 떠밀려서 엉겁결에 그런 상황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때도, 나는 멍청하니, 샤워를 마치고서 타월로 알몸을 두른 채로 녀석을 그저 기다리게만 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그 녀석이 말했다.
'…아니면 내가 더럽기라도 해서 그래?‘
아, 아아...
“아니야...”
“...네?”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저, 내가 겁쟁이에, 멍청이에, 남자도 아닌 병신새끼여서 그랬을 뿐이지. 널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었어.
그때는 그저 몰랐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나는 몰랐었다. 내가 그저, 엉거주춤해하고 있을 뿐인 것을, 그녀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지금도 내가 만약 루시아를 거절한다면, 또 다시 그때의 일을 되풀이하게 되는 걸까.
그때 내가 그 녀석을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땐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짝!
’병신새끼, 남자가 쫄기는... 야, 입술 내밀어봐.‘
스스로 뺨을 치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바짝 굳어있던 나에게, 팔랑팔랑, 가느다란 손으로, 자기도 아팠을 텐데. 붉게 부어오르는 손바닥을 흔들며 장난치듯이 그렇게 말했던 녀석이 떠올랐다.
“아, 이거 장난 아니게 아픈데...”
세게 친다고 했는데 너무 세게 쳤다. 양 뺨이 얼얼했다. 그동안 늘었던 근력을 너무 간과했던 모양이었다. 루시아가 그런 나를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루시아의 눈에는 갑자기 지 뺨을 후려치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쳐보였을 거다.
"이지경님?"
"아, 미안. 기합 좀 넣느라."
뺨 한대 맞으면 정신이 든다는 것도 그 녀석이 알려줬었지. 알려줬다기보다는 알아버린 쪽에 가깝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니까 걔도 참 손이 매웠지.
"루시아?“
아무튼, 덕분에 기합이 좀 들어갔다. 나는 내 알길이 없는 대답에 멍하니 있는 루시아를 불렀다.
"...네?"
"...오랜만이라서. 조금 서툴러도 봐주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루시아의 턱을 잡아당겨 입술을 맞췄다.
"읍…?!"
동그랗게, 크게 뜨여진 루시아의 눈이 놀란 듯이 나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