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75화 (75/370)



〈 75화 〉75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도통 모르겠다. 확실한건 엘프가 더 예쁘다고 말해서는  된다는 거였다. 우선, 책의 삽화로 그려져 있던 엘프보다 루시아쪽이 더 예쁜 것은 둘째치고서, 장난으로라도 지금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된다는 눈치정도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루시아가 더 예쁘다고도  수 없었다. 사실은 사실이라도 입 밖으로 내기엔... 그, 부끄럽잖냐.

“그러고 보니 에네스타와 나타, 에샤, 모네... 이지경님의 주변에는 엘프들이 잔뜩 있네요.”


대답이 없는 나에게 루시아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을 덮었다. 그러고서 천천히, 책의 표지를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저도 엘프의 모습으로 바꾸는 쪽이, 이지경님에게는  좋을까요?”

나 좀 살려주라. 아무나 좋으니까. 적어도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힌트라도 줬으면 좋겠다.


빤히, 대답을 기다리듯 나를 바라보는 루시아 덕분에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던 중에, 루시아가 입가를 가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후후, 농담이에요. 에오시스 자매도, 에네스타도, 전부 제가 이지경님의 곁에 둔 거니까요. 그걸로 이지경님의 곁에 엘프가 많다며 질투할 정도로 고약한 성격은 아니랍니다.”

그런 루시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하필 조금 전까지 드래곤의 질투니 뭐니 하는걸 떠올리고 있던 터라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말이다.

“물론, 이지경님의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지만요. 일단은 이지경님은, 저의...”

말을 잇던 루시아가 슬며시 나를 바라봤다. 뭐지. 아까랑은 느낌이 달랐다. 아까는 뭐랄까, 등골이 오싹오싹하고 저릿저릿했더라면 지금은 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아까랑은 전혀 다른 느낌에, 생소한 느낌이었다. 어째 분위기가 어색했다.


“루시아?”

하는 수 없이 루시아를 부르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휙휙 저은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참, 에루나는 어디에 있나요?”

갑자기 에루나는 왜...? 기껏 떼어놨더니 에루나를 찾는 루시아를 보고서 품속에 있는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거라면 이걸로 당장 에루나를 여기로 불러올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만. 에루나가 여기에 와서, 원래 예정되어있던 시간보다 훨씬 빨리, 그것도 내 방에서 나랑 단 둘이 있던 루시아를 보면 뭐라고 말할지는 뻔했다.

당장 침대를 가리키면서 어서 합방이나 하라고 말하겠지. 분명했다. 내 전재산을 걸어도 좋았다.  세계에서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이라곤 루시아가 준 핑크발랄한 옷들 밖에 없다만. 딱히 그걸 떠넘기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만큼 확신이 있어서 건거다.

아무튼 나는 에루나를 소환할  있는 보석을 만지며 말했다.


“에루나는 지금 내가 부탁해서 마야와 니아, 로로에게 시녀일을 가르치고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라면 지금 불러줄게.”

그런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은 루시아가 이내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런가요? 일을 일찍 마치길 잘했네요.”


응?


“나 여기 마력을 바쳐 바라건대. 바람이여 나를 경계로 주변에 퍼져라. 바람의 장막.”

짧은 영창. 루시아가  밖으로 얽어낸 주문이 그녀의 마력을 엮어내고, 방 주위로 넓게 그물처럼 퍼져나가는 것이 오른 눈을 통해 보였다.

이미 멀어버린 오른 눈을 통해서, 이전에 봤었던... 루시아의 마력이 넓게 퍼져서, 방 곳곳을 두르는 것이 말이다. 그때랑 다른 점은, 한없이 차갑고 어두워보였던 마력과는 달리 지금은 아주 적게나마 온기가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마력 자체에는 이렇다 할 형태도, 온도도, 뭣도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조금 긴장하는 듯한, 경직된 느낌도. 생물이 아닌 마력이 어쩐지 뻣뻣하다고 느껴진다니, 내가 이상해진 걸까. 아니면 그게 보이는 내 눈이 이상해진 걸까.

어느 쪽이던 간에 이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 건진 모르겠다. 혹시 이  때문인가? 원래대로라면 타인의 마력을 보는 건 특수한 능력이나, 마법, 혹은 기술이나 도구가 필요한 법이었다. 딱히 그런 능력도, 기술도, 하물며 도구도 없는 나에게는 루시아의 마력이, 정상적으로는 보이는 게 이상하다는 거였다.


흡정귀화를 하고 있었을 때는 루시아의 마력이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어렴풋이  수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도 아니었다. 다만 그때랑 지금이랑 다른 점이 한가지 있었다. 그때랑 다른 점은, 바로 새삼스레 효과나 내용을 읽어봐도 대체 무슨 능력인지 알 수 없었던 주시자의 눈이었다. ‘세계를 굽어 살피는 눈’이라는 설명과 ‘모든 것을 비춰보는 눈이다’라는 기묘한 효과를 가지고 있던 주시자의  말이다.

이 세계는 법칙을 근간으로 두고서, 마력과 이런저런 요소들로 구성되어있었다. 크게 말해서, 이 세계에서 ‘세계’란 그 근간을 이루는 법칙  자체와 마력을 비롯한 이런저런 요소를 뜻하는 거였다.


세계를 보는 눈이니만큼, 그 요소 중의 하나인 마력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딱히 이상할게 없다는 소리였다. 평소에는 새까맣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이 마력만 보여봤자 어디다 쓸까 싶긴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거지만.

“저기, 루시아? 지금 뭐하는 거야?”

“조금 결계를 치고 있었어요. 밖으로 소리가 퍼져나가지 않게 하는 간단한 결계지만요.”

저기, 루시아? 근데 그걸 왜 펼쳐?

“...이제 곧 있으면 이지경님은 이곳을 떠나게 되니까요. 한 가지 확실히 해둬야만  것 같아서요.”

대체 뭘, 하고 묻기도 전에 루시아가 먼저 움직였다. 스윽, 하고 내게 다가온 루시아가 바로 내 앞에 섰다.

“어...”


“이지경님이 이전에 말씀하셨었죠. 1년 안에 저희를 반하게 하겠다. 1년 안에, 저희에게 반하겠다고.”

빤히,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묻는 루시아를 보고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가슴팍에 얹었다.

“이 곳, 천공성은 도바난과 아투스... 저희들의 영지들과 인간들을 비롯한 모든 종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땅.  위를 날아다니고 있어요. 이번처럼,  영지인 파라모아에서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까지, 그 위를 날아가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로 몇 개월이나 전혀 다른 땅 위를 날아다니게 되는 경우도 있죠.”


천천히  가슴팍을 더듬는 루시아의 손길이 무척이나 간지러웠다. 동시에 뭔가에 홀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마, 며칠  이지경님이 저의 영지를 떠나게 된다면... 아마, 다시 제 영지로 돌아오는 것은 이지경님이 약속했었던 1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난 뒤겠죠.”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작게 한숨을 토하고서는,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들어야겠어요. 이지경님은, 저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셨나요?”


루시아의 물음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나를 흘끔, 바라본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는 상당히 별나셨던 분인지라 수천 년의 세월동안 ‘사랑’이란 것을 모르셨던 모양이라서요. 덕분에 제게 남겨진 기억에도 사랑을 하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전혀 남겨져 있지 않아요.”

정말로 웃긴 이야기죠, 하고 루시아는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지경님과 대화를  때면, 이지경님과 같이 있을 때면... 제 짧기 만한 용생을 통틀어서, 어느 때보다 즐겁다는 거에요. 처음이었어요. 이런 감정을 느낀  말이죠. 처음에는 호기심, 그렇게 시작했어요. 이지경님은 제가 알고 있던 인간들과는 조금 달랐으니까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이지경님은 그들과 다른지... 뭐, 제가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라고 해봤자 어머니가 남겨주신 기억뿐이긴 하지만... 그래서 확인해보려고 했어요.”

“확인해보려고 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이지경님께 실례가 될 일만 저질렀던 것 같네요. 네, 맞아요. 이지경님을 시험해봤어요. 에오시스의 자매를 이지경님에게 붙여준 것도, 제 가디언  하나인 에네스타를 이지경님의 스승으로써 곁에 둔 것도. 일단은 시험을 목적으로 했던 거였죠. 물론, 이지경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도 그런거긴 했지만... 그래도 실례를 저지른 건 사실이겠죠.”


정말로 죄송해요, 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던 루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금빛으로 빛나는 루시아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당혹으로 물들인  얼굴이 말이다. 사실 그게 맞았다. 지금 나는 엄청 당혹스러웠다.


지금 루시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확인해보려했다던가, 뭐라던가. 난 딱히 뭔가 한게 없는데... 아니, 애당초 루시아가 내게 사과를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딱히 나는 뭔가 당한 적이 없는데 말이지.


정말로 딱히 내가 루시아와 뭔가   없었다. 그나마 짐작 가는  개가 있기는 했지만. 내가 뭔가 하고나서 루시아가 이러는 거라면 이해라도 되겠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없으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 나를 본 루시아가 손짓하자, 그런 루시아의 손에 푸른빛을 띈 구슬이 나타났다. 오래된 물건인지 조금 금이 가있었지만, 구슬 자체로도 예술품이나, 어지간한 보석의 뺨을 후드려칠만큼 아름다운 구슬이었다.


갑자기 그런 구슬을 꺼내든 루시아가 구슬을  앞에 내밀며 말을 이었다.

“...?”

“이건 원경의 구슬이라고 부르는 아티펙트에요.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에 한정하지만, 그 대상이 어디에 있던 간에, 그 사람과 함께 주변의 광경을 비쳐 보여주는 구슬이에요.”


딱, 하고 루시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원경의 구슬에 나와 루시아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그동안, 이지경님을 이걸 통해 지켜보고 있었어요.”

“지켜보다니?”


나를? 그건 조금 무서워지는데요. 갑작스런 루시아의 커밍아웃에 당혹스러움이 증가했다.


“사실 몇 번이나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이지경님이 뭘 하고 계시는지는 쭈욱,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루시아의 말에 아까 오한을 느꼈던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몇 번인가 느껴졌던 것도 말이다. 설마... 아니, 정말로...?


“...알고 있어요. 이지경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는. 제가 이러는 이유가 이해가 가질 않겠죠. 사실 저도  이해가 가질 않으니까. 어째 설까요, 처음에는 호기심, 그 다음에는 궁금증, 그 다음에는 단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수시로 바뀔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천히  가슴팍에서 손을 떼어냈다.


“어쨌거나... 그렇게 지켜본 결과, 한 가지  수 있는 게 있었어요.”

스르륵, 하고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내 눈을 의심했다.

“하나, 이지경님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결벽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타인과의 관계에 거리를 두려고 하신다는 점이에요. 이유는 이지경님만이 알고 있겠죠. 아니, 이지경님조차 모를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확실한건... 이지경님이 저에게까지 그런 거리를 두는 것이 이제는 싫어졌다는 거예요.”

새하얀 루시아의 살결이 눈에 비쳐보였다. 그녀의 허리춤에 걸쳐져있던 붉은 드레스자락이 루시아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스륵스륵하고 흘러내려갔다.


“둘, 아까는 질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거짓말이에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지경님이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걸 보면 어쩐지... 네,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에요. 이걸 질투라고 할  있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오늘도 그랬었죠. 에네스타가 이지경님에게 안겼을 때.”


“아니, 딱히 안긴 건 아니었...”

“안겼을 때.”

넵. 안겼습니다. 그러니까 노려보지 말아주세요.

무서우니까.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었으니까요.”


나도 모르게 루시아의 손 위에 떠있는 원경의 구슬을 바라봤다. 혹시,  금이 그때 생긴 건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신이 된 루시아가 내게 다가와, 그대로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저 역시, 제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띠링~


[‘루시아네스 파라모아’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연애감정을 품습니다. 호감도가 3만큼 상승했습니다!]


띠링~


[‘루시아네스 파라모아’의 플레이어 ‘이지경’님에 대한 호감도가 40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어울려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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