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71화
왤까. 평소였다면 에네스타에게 이보다 더 매정하게 굴 수 있었을 텐데. 톡 까놓고 며칠 전만해도 한대만 때려봤음 소원이 없을 것 같은 무지막지하게 엄한 스승이기도 했고... 머리로는 여기서 딱밤이라도 날려서 에네스타를 떼어내라고 하는데 몸은 도무지 그 말을 따르려고 들지 않았다.
사실 이건 에네스타만이 아니라, 가신으로 임명했던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있는 바록이나 바쿠도 그렇고, 로로나 마야, 니아도 그렇고, 눈이 마주치면 괜히 얼굴을 붉혀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싶게 만드는 슈슈도 그랬다.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하나. 마치 개울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호욕구라고 해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뭔가 챙겨주고 싶어진다.
바록이나 바쿠, 에네스타의 경우에는 내가 보호하거나 챙겨주기보다는 오히려 보호받고 챙김 당해야할 것 같기는 해도. 마야나 니아, 그리고 로로와 슈슈처럼 겉보기에는 내가 보호해야할 것만 같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괜히 오랜만에 놀러온 손주들의 입에 간식이라도 물려주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이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비유가 조금 이상한 것도 같다만. 아니, 내가 로로나 마야, 니아에게... 아니 겉보기로는 미소녀로도 보이는 슈슈에게 간식을 입에 물려주고 오구오구 거리고 있으면 범죄자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잠깐, 그건 이미 저지르지 않았나? 어제 그런 짓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뭐, 넘어가자. 어차피 여기에도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이런 문제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가신 시스템. 이게 문제였다. 애당초 가신 시스템은 라이프의 클랜 시스템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도 대충 유추해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가신으로 임명하게 된 것으로 나 역시 나는 볼 수 없는 호감도인지 뭐시긴지가 대폭으로 상승해버렸을 경우였다. 라이프에서는 플레이어가 NPC의 클랜에 들어가 클랜원이 될 경우에 생성되는 신뢰도가 아마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관련된 녀석일거다.
본래 신뢰도의 경우에는, 플레이어가 클랜의 클랜장인 NPC... 그러니까 지금의 경우에는 가주인 나에게 해당되는 존재에게 부여되는 것이었다.
플레이어가 업적이나, 클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경우에는 이 신뢰도가 올라가면서 클랜장인 NPC로부터 신뢰와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신뢰도가, 내가 볼 수만 없을 뿐이지 내가 가신들로 임명한 이들에게 호감도가 부여됐듯이 역으로 나에게도 적용되었던 것이라면... 어제 꼬박 고민했던 것이 근본부터 시작해서 죄다 헝클어졌다.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도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배는 더 심각한 경우라고 볼 수 있는 거니까... 응, 아닐 거다. 아니라고 믿자.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막나가지는 않겠지. 적어도 나는 NPC가 아니었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NPC가 아니니 이런 걸로 무슨 사고 같은걸 저지르지는 않을 거다.
아무튼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던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이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요즘 대련도 안했었잖아? 모처럼인데 지금 할까?”
내 말에 에네스타가 혹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하지만 괜찮겠나? 주는 아직 몸 상태가...”
내 몸 걱정해주는 거라면 아까 팔이나 꺾지 말지 그러셨어요. 에네스타가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니고, 나름 나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겠지만. 엄청 아팠다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제 멋대로 발동하던 ‘차원을 넘은 자’도 발동하지 않은 모양이고.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에네스타에게 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도 나고, 괜히 허세 부린답시고 괜찮냐고 묻는 에네스타에게 괜찮다고 말한 것도 어쨌거나 나였으니까. 일단 그 문제는 덮어두기로 하고서, 나는 태연하게 에네스타에게 말했다.
"걱정 말고. 오히려 가만히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거든."
그것보다는 이대로 있다가는 몸이고 정신이고 남아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 그냥 치고 박는 게 훨씬 낫다 싶은 거지만. 한대 얻어터지면 에네스타에게 그런 생각도 들지 않을 테고.
그런 내 마음을 전혀 모를 에네스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원래 수련이 그런 거다. 하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막상 안하면 어색하고 뭘 하더라도 영 개운하지가 않지. 갑갑하다고 할까. 답답해진다고 할까. 사실 나도 주먹이 간질거리던 참이었다. 마음이 통했나보군. 나의 주.”
아, 그거 나도 알아, 정말 그렇지? 하고 마음이 통한 친구에게 말하는 느낌으로 신이 난 에네스타가 수련의 좋은 점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내가 수련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뭐다하는 이야기도 시작됐다.
별로 즐겁거나 하지는 않은데. 얻어맞고 떼굴떼굴 구르는 것뿐이니까 즐거울 리가 없지.
그리고 주먹이 간지럽다니. 그건 요즘 검은 내팽개쳐두고서 나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서 그런게 아닐까 싶은데요. 내가 배우고 있는 건 분명 검술이고, 에네스타가 가르쳐야하는 것도 검술일 텐데 말이지. 검을 휘두르는 건 나뿐이고, 정작 에네스타가 주로 사용하는 것 주먹이나 다리다.
맞아도 아프지는 않았다지만 주먹이나 발에 얻어맞고 공이라도 된 것 마냥 땅에 통통 거리면서 굴러다닌 내 심정이 어떨지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굳이 지금 이런 말을 해서 산통을 깰 생각은 없었던 나는 적당히 에네스타의 말을 받아주며 말했다.
“그래그래, 그러니까 이건 여기까지 하고, 대련이나 하자고.”
“아무리 주께 충성을 맹세했다지만, 대련을 할 때의 나의 역활은 어디까지나 주의 스승인 입장이니만큼 봐줄 생각이 없다만?”
“나도 이번에야말로 한 방 먹여 줄테니까 각오하라고.”
내 말에 에네스타가 씨익,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그렇게 다시 에네스타와의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두들겨 맞고서 대짜로 뻗어있을 때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인님.”
“에루나? 언제부터 온 거야?”
대체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뻗어있던 나에게 다가온 에루나가 말을 걸어왔다. 에루나 옆에는 마야도 있었다. 어쨌거나, 내 물음에 에루나가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에네스타에게 턱을 걷어차이고 날아가셨을 쯤부터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봤다는 거구나.”
대련 시작부터 기습이랍시고 냅다 덤볐다가 곧바로 반격으로 얻어맞은 턱에 뒤로 날아갔다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두들겨 맞았으니까. 그때부터 보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다 보고 있던 셈이었다. 나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때부터 보고 있던 거라면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은 보지 못했다는 얘기가 됐다. 내 감을 믿어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에네스타가 내 옆에 찰싹 붙어있던 꼴을 에루나에게 들켰을 거다.
내심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며 에루나가 말했다.
“그래서... 수련은 어떠셨습니까?”
“효과는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투기는 못 배웠어.”
효과는 있었다. 바록과 바쿠의 도움으로 낙시안식 단련법이니 뭐니, 몸을 배배 꼬아대는 짓을 한 결과 근력과 민첩, 체력. 특히 민첩이 상당히 올랐으니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투기라는 녀석은 대체 뭔지 감도 안잡혔다.
에루나가 나에게 이 투기란 녀석을 가르치기 위해서, 낙스까지 가서 고생해가며 데려온 바록과 바쿠가 양 옆에 달라붙어서 가르쳐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본 에루나는 단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보다, 오늘 점심으로는 어떤 것을 하면 되겠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끝이었다. 정말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그것보다는 오늘 점심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미안해하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전에 먹었던 그 물고기? 그게 먹고 싶은데.”
그걸 또 대답하는 나도 어딘가 맛탱이가 간 듯하지만.
대짜로 뻗어있는 나에게 태연한 얼굴로 묻는 점심으로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묻는 에루나와 그런 에루나의 물음에 대답하는 나. 스스로도 참 이상한 모습일거라고 자각은 하고 있지만 남이 본다면 더더욱 이상해 보이는 광경일거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일단 나부터 일으켜 세우고 묻거나, 아니면 일단 몸부터 일으키고 대답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테니까.
하지만 에루나에게 나를 일으킨다는 선택지는 없었나보다. 나도 귀찮아서, 아니 그보다 힘들어서 움직이기 싫고. 그래도 이것만으로 이상한 광경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했다.
그리고 그 부족한 것을 채워넣은 게 바로 나와 에루나의 위치였다.
그야 에루나가 서있는 위치가 바로 내 머리 위였으니 말이다.
대짜로 뻗은 채로 에루나를 올려다보면 치맛단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하녀복을 입고 있는 에루나의 허벅지가 훤히 보였다.
정말로 골렘인가 싶을 정도로, 잘빠지고 매끈해 보이는 허벅지다. 이쪽 세계에도 있었던 모양인지 검은 가터벨트의 끈도 보였다. 그 너머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 일부로 보려고 본 건 아니었다. 보이니까 본 것뿐이지. 나는 아무 죄도 없었다.
아무튼 원인은 에루나니까 말이다. 분명 일부로 이러는 거다. 이걸 일부로 노리고서 해도 가능한가 싶다만... 근데 왜 허벅지까진데?
딱히 아쉬운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니, 아쉬울 리가 없지. 내가 변태도 아니고, 속옷을 보는 걸 좋아하거나 그러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궁금한 거다. 어째서 허벅지만 보이는지.
아니, 그치만 이상하잖아? 에루나 옆에 나란히 서있는 마야는 속옷이 훤히 보이는데 말이지. 마야의 속옷을 본다고 쳐도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애초에 애들이나 입을법한 호박팬티를 보고서 이상한 생각 같은 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드는 쪽이 이상한 거다. 아무튼 옆에 있는 마야는 훤히 보이는데 에루나는 왜 허벅지뿐이냐는 거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쉬운 건 아니다. 그냥 지성체로써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과 호기심일 뿐이다.
"이게 그렇게 신경 쓰이십니까?“
그런 나를 보던 에루나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내심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서 내가 말했다.
"뭘?“
"주인님이라면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뭘.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저는 모르겠는데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빤히 나를 쳐다봤다. 순전히 내가 올려다보고 있는 입장이라서 그런 거겠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에루나의 시선이 상당히 도발적으로 보였다.
안쪽이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렇게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니, 전혀 궁금하지는 않은데. 궁금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보여주고 싶다면야 못 볼 것도 없는데 말이지.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여서 꼴깍, 삼켰다가 등 뒤가 섬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아니... 그냥 조금 오싹해서."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셔서 그런걸 겁니다."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치맛단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뭐하냐?"
"주인님의 땀을 식혀드리고 있습니다."
세상 천지에 그런 식으로 땀을 식혀주고 있다는 소리를 하는 건 너뿐일 거다. 저런 와중에도 아슬아슬하게 가장 중요한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신기하지만.
왠지 계속 보고 있었더니 오싹오싹한게 심해져갔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아니, 이건 누가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날 노려보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 거지만. 설마하니 이게 양심의 가책이란건가.
그건 아닐거다. 그렇게 바른 양심이 내게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그럼 이건 대체 뭘까. 어쨌거나 이러고 있는 것도 뭐해서 에루나에게 말했다.
"장난은 그쯤 해둬.”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진심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보란 듯이 입술을 혀로 핥았다. 대체 진심이랑 그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직접 혀로 주인님의 땀을 핥아드릴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 싶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