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70화
“괘, 괜찮은데. 응, 오히려 아까부터 훨씬 나을지도?”
거짓부렁이지만. 아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다. 아니, 오히려 이런 건 처음인 에네스타가 실험이라도 하듯이 뿌득 뿌득, 팔을 꺾어대는 통에 더 아프면 아팠지 나아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고 그렇게 대답하자, 에네스타가 정말로 그러냐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거기서 그치면 좋겠는데.
“정말인가?”
우득...!
정말이냐고 물으면서, 순진무구한 표정을 한 채로 내 팔을 이상한 방향으로 접어버렸다. 우득 하고, 방금 전까지 뿌득뿌득 울렸던 것이 톡톡 건드려보는 수준이었다면 이번건 완전히, 본격적으로 접어버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끄어...”
이건 정말로 아프다. 얼마나 아프냐면, 책상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찧었을 때의 열 배는 더 아팠다. 덕분에 애써 꾸미고 있던 얼굴도 죄다 엉망이 되었다. 나는 볼 수 없어 모르겠지만, 내 얼굴 근육에 힘이 빡 들어갔으니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지 대충 상상은 갔다.
그런 내 표정을 살펴본 에네스타가 잠깐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몸을 움직이며 물었다.
“으음, 이렇게 하면... 자, 나의 주. 지금은 어떤가?”
꼬물꼬물, 자세를 바꿔 마치 뒤에서 팔을 잡아당겨 안는 듯한 자세를 취한 에네스타 덕분에 아까보다 한결 편해졌다. 팔이 뒤로 비틀려서 꺾인 것보다는 옆으로 당겨지는 쪽이 당연히 편하겠지만. 어쨌거나 에네스타 자세를 바꿔 준 덕에 편해진 나는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도로 제자리로 고개를 돌리고서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낫긴 한데...”
"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니, 없으니까 움직이지 말고."
사실은 있지만. 무슨 문제라도 있냐면서 이리저리 팔을 움직이려는 에네스타를 저지한 나는 이걸 어쩔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간단했다. 닿고 있다. 아니, 닿고 있었던 건 아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지만 경우가 조금 달랐다. 아까는 등 뒤에서 어렴풋이 아, 닿았구나 하고 느껴졌을 뿐이었다면 지금은 어디가, 어떻게 닿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팔에 닿은 부분이 지금 어떤 모양인지도 훤히 보였다.
이게 문제였다.
낙시안식 단련법. 사실 단련법이니 앞에 무슨무슨 식이니 붙어서 그럴 듯 해보였지만 실상은 그냥 마사지였다. 몸을 주물럭거리고, 근육을 풀어주고, 나아가서는 뼈와 신경을 자극하고, 호흡까지 정리해주는 일종의 요가랑 비슷한 운동인 것이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요가라는 운동은 꽤나 격한 운동이었다.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꺾고 휘젓고, 돌리고, 간단해보인다고 막상 따라 해봤다가 아, 내가 뭔가 잘 못 생각해도 단단히 잘 못 생각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으면 이미 몸은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배배 꼬여있는 상황이 종종 보고되는 그런 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낙시안들이 하는 이건 그 요가보다 더했다. 그나마 나는 혼자서 하기엔 몸이 안 따라줘서 누군가 도와줘야만 어떻게든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생각해보자, 그런 눈에 띄지 않지만, 사실은 격하기 짝이 없는 운동을 도와주기 위해, 옆에 달라붙어있는 에네스타가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말이다.
흔들흔들, 출렁출렁이었다. 표현이 다소 상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뭔 상관이야. 이미 충분히 상스러운 상황인데.
아, 젠장. 막상 눈에 들어오고 나니 평소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 새삼스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사실 워낙 이리치고 저리치느라 정신머리가 없어서 그렇지, 이 세계에 와서 강제로 금욕생활을 하고 있던 나였다. 하물며 원한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라고 말하고 앉아있는 미녀들과 함께하는 생활 중에 말이다.
후한이 두려워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건전한 남성치고는 참 용케도 참아내고 있는 거다.
하지만 이럴 때 써먹을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충격요법이라고 해야 하나, 딴 데로 생각을 돌리는 작전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내 팔에 닿아있는 그것이 신경 쓰인다면, 그것보다 더한걸 떠올리면 그만이었다.
루시아의 그거라던가. 아니면 그때의 그거라던가. 그리고 금방 이 작전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루시아의 가슴, 아니 그것이 엄청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비교 대상이 너무 엄청나서 그런지 아니면 정보가 부족해서 그런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니, 상상이 됐다쳐도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지금 그런걸 떠올렸다가는 이성의 끈이 끊겨버리잖냐. 그때의 그건, 떠올리면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고. 다시 방에 틀어박히고 싶어질 뿐이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별 효과가 없었다는 거다.
거기에 이렇다 할 정보가 없는 루시아보다 이쪽은 눈으로만 봤던 루시아랑은 달리 직접 팔에 닿아있었다. 아, 물론... 루시아에게 안긴 적이나 반대로 안은 적은 있었다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무슨 느낌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서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만.
그것도 그렇고 루시아랑 비교하면 그렇다는 거지. 에네스타의 가슴 아니 그것이 작다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루시아의 몸매가 너무 궤를 달리하는 경우라서 그런 거고, 에네스타 역시 몸매로는 어디서 뒤처지지는 않았다. 충분히 볼륨감이 느껴지는 훌륭한 가... 아니 그거였다.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지 여기 와서 본 것 중에서는 루시아와 카르네 다음으로 크다고 할 수 있었던 에네스타였다. 그런 에네스타가 꾸욱하고 밀착해오자 여러모로 곤란했다.
어디가 루시아와 카르네의 다음인지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겠지만. 속으로는 이미 죄다 까발린 것도 같기도 하지만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에루나뿐이니 별 문제는 없었다.
좋아, 아무것도 마무리된 건 없지만 일단 좋다. 우선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에네스타를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음? 자꾸만 쳐다보고...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건가? 나의 주."
그런 나를 보고서는 에네스타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출렁, 하고 그 밑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 흔들렸다. 한순간이지만 눈이 부릅 뜨였다. 지금까지 한쪽 눈이 안 보인다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눈으로 방금 전의 움직임일 눈에 새기는 건 버거웠다. 그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그리고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걸 눈까지 부릅뜨고 보고 있을 이유가 있었나 싶기도 했지만. 아무튼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 입었구나. 안에 아무것도 없어. 이 세계에도 속옷은 있었다. 예의, 여성의 가슴을 가리기 위한, 모양을 잡기 위한 브래지어 같은 속옷 역시 존재했다. 때때로 마법이 있는 이 세계의 속옷 쪽이 원래 세계의 그것보다 청결이나 미용의 면에서는 더 좋다고 여겨질 만큼 훌륭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는 에네스타의 그것을 보면,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평소에 입던 도복과 비슷한 옷이나, 마치 기사처럼 갑옷을 입은 게 아닌, 정말이지 편해 보이는 복장. 다르게 말하면 참 얇아 보이는 옷차림의 에네스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는 모양인지 자기 얼굴에 뭐라도 묻었냐며 손으로 뺨을 더듬고 있었다.
그런 작은 동작에도 출렁출렁, 흔들흔들 거리는 움직임이 뻔히 보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난감했다.
저 얇은 옷 너머로 떡하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두개의 과실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니, 과실이라니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에네스타의 가슴이 엘프라는 것치고는 보기 드문 크기다, 라는 거나 엘프의 가슴에서는 과일처럼 단 맛이 난다, 라거나 별로 원하지도 않았던 정보에 머릿속의 혼란이 가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단맛이라니. 정말로? 아니 이게 아니라. 그보다 그런 지식은 왜 있는 건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지식의 출처는 알고 있다. 드래곤들의 기억일거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걸 알고 있는 건데. 아니, 어째서 나한테 집어넣은 건데.
이해가 가질 않네. 진짜.
게다가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띠링거리면서 현자 타임이라도 온 것마냥 머릿속이 깔끔해졌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도 않았다. 물론 기능 조화는 어디까지나 확률로 발동하는 것이니 만큼 재수없게 발동을 안할 수도 있지만. 평소에는 잘만 되던게 안되니 여러모로 곤란했다. 어떻게 곤란하냐면, 도무지 이 번뇌가 끊이질 않는다는 게 곤란했다.
하지만 이런걸 신경 쓰는 건 나뿐인지 에네스타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다가 이내 아무것도 묻은 게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중얼거렸다.
“으응... 얼굴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그나저나, 이 자세도 뭔가 불편하군.”
“그야 매달려 있는 거니까 당연하지.”
위치야 조금 바뀌었다지면, 결국 내 위에 반쯤 올라탄 에네스타가 팔에 엉겨붙어있는 모양새니까 말이다. 당연히 불편할 거다. 그런 내 말에 에네스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가?”
그러더니 다시 한 번 영차, 하고 어울리지 않는 기합성과 함께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와락 내 팔을 붙들어 잡고는 말했다.
“확실히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좋군!”
...이래서야 그냥 껴안은 거잖냐. 그런 생각을 나만 한 것이 아닌지 바록과 바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료인줄 알았는데... 주인의 여자였나?”
“아쉽군. 강한 전사였는데...”
“꿈 깨라. 강한 여자는 강한 전사에게만 주어지니까. 주인은 별로 강해보이지는 않지만... 그 괴물의 주인이니 충분히 강하다.”
“역시 마야나 니아, 둘 중 한 명이랑... 그런데 그 둘도 주인이 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뭐, 주인이 알아서 하겠지. 전사의 짝을 정해주는 것은 족장... 아니, 지금은 주인의 몫이니까. 되도록 강한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거 아니다. 엄한 소리하지 말라고. 괜히 누가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 같은 거 하지 마라.
그나저나 내가 너희 연애문제도 해결해야하는 거냐? 진짜로? 그냥 자유연애하면 안되겠니?
아무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에루나가 이 이야기를 듣는 경우였다. 다행히 에루나는 지금 마야와 니아에게 시녀 일을 가르치느라 바쁘다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에루나 녀석이라면 언제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그건 싫은데. 만약 에루나 녀석이 여기에 나타나면 또 대뜸 이상한 소리나 해서 분위기를 죄다 이상하게 만들어놓을게 분명했다.
예를 들어, 지금의 꼴을 보면 에네스타보다는 루시아부터 안으라는 이야기할게 분명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 이 기회에 쇠뿔을 당기자며 이것저것 죄다 강행할지도 몰랐다. 끝내 내 고집으로 어떻게든 해결했던 침대의 동침문제나, 목욕탕에 멋대로 들이닥치던 것도 이 기회에 얼렁뚱땅 결정하려고 할지도 몰랐다. 내가 아는 에루나는 그런 인간, 아니 골렘이었으니까
그것만큼은 안됐다. 잠이야 별로 안자도 되니 상관없다 쳐도, 목욕을 하는 건 얼마 안 되는 나의 위안거리였다. 그것마저 빼앗기면 게임도 없는 이 세계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다. 최악의 일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나는 팔에서부터 전해지는 푹신푹신한 감각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고서 말했다.
"에네스타? 일단 떨어져 볼래?"
"음? 어째선가? 떨어지면 수련이 안 되지 않나? 역시 불편해서 그런가? 자세야 또 바꾸면..."
지금도 수련 같은 건 전혀 되지도 않고 있으니 걱정 말고 좀 떨어져 주지 않으련? 도통 말을 들어먹지 않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하는 수 없이 직접 손으로 밀어내려다가 멈칫했다.
음. 터치할 구석이 전혀 없다. 과연 검주, 이럴 때도 빈틈이 없었다. 아니, 터치할만한 구석이 있기야 했지만 만지기 참 뭐한 곳이었다. 저 커다란걸 터치해서 밀어낼 수도 없잖냐.
차라리 뿌리칠까 싶었지만 어째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에네스타가 껴안고 있는 게 사실은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왠지 몰라도 뿌리치는 건 너무 매정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