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68화 (68/370)



〈 68화 〉68화

콰직!


검은 그림자가 크리샤에게 다가갔던 남자를 덮치더니,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에 둘러싸인 것이었다.  깜짝하는 사이에, 그림자에 둘러싸인 남자는 말 그대로 사라진 것처럼만 보였지만.

촤아아아앗!!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갈아버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꿈틀거리는 검은 그림자 밑으로, 피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철퍽, 철퍽하고 그림자 밑으로 갈려나간 장기며, 난자되어 피죽이 된 남자의 몸이었던 것들이 같이 쏟아져 내린 것이 아니였다면, 그 소리가 남자가 갈려나가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이 늦었을 지도 몰랐다.


그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명의 사람을 순식간에 시체, 아니 고기죽으로 만든걸로 만족하지 못한 듯이 사방으로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뻗어나갔다.

콰드드득!

크리샤에게서 뻗쳐 나온 검은 그림자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나무가 앞을 가로막는다면 나무를 부쉈다. 바위가 있다면 바위를 부쉈다. 앞을 막는 것들을 모조리 배제하면서 나아갔다. 이윽고 비명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드득!!!

검은 그림자들이, 수천, 수만 갈래로 나눠진 그림자들이 땅을 뒤엎고, 나무를 뽑아 던지고, 사방을 휘저었다.

천재지변,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힘 그 자체를 보는 것만 같았다.


대재앙.

지진과 태풍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투영해내는 구슬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크리샤 아가씨는 당시 다른 아가씨들과 비교해서 무척 강대한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크리샤 아가씨가 보옥을 지배하지 못한 이유도… 그 힘을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 때, 그런 크리샤 아가씨가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이 해방되었습니다."

슈페리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 일대는 삽시간에 죽음으로 가득한 땅이 되었다.


땅을 부수고 솟구쳐 올라오는 용암이 곳곳에서 부글거렸고, 그림자들은 새로운 희생양을 찾듯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던 땅을 넘어서,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는 영역까지 넘어서려는 찰나, 영상에 비쳐오는 광경이 뒤바뀌었다.

"만약 제가 크리샤 아가씨를 멈추지 않았더라면… 피해는 더 커졌겠죠."


그리고… 에루나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리샤 아가씨의 전신인 카르나시아.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기억의 덕에, 크리샤 아가씨가 가지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호감도 그 날을 기준으로 혐오로 바뀌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이해하실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드래곤인 크리샤 아가씨로써는 그만한 굴욕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 내 눈에, 크리샤가 폭주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어린 아이에서 지금과 별다를  없을 정도로 성장한 크리샤를 품에 안는 에루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크리샤 아가씨는 완전히 제어하시게 되었죠."

그렇게 말하는 에루나는 어쩐지 쓴 것을 삼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장하신 겁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드래곤이 폴리모프로 인해 변하는 모습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심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이라고 바르게 인식하는 것. 만약 자신이 그 종족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무의식적으로 그리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린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다.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말은 즉, 크리샤의 안에서 많은 것이 뒤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스윽, 하고 거기까지 말한 에루나가 손을 휘젓자 영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인 에루나가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주인님, 이야기는 충분하셨습니까?"




에루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러모로 생각되는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인간이 죽는 모습을 봤다.

처음으로 그녀들, 드래곤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봤다.


만약 내게 차원을 넘은 자라는 특성이 없었더라면, 아니, 설령 있었다하더라도 저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있었을지 모를 정도로 포악한 파괴를 봤다.

하지만 어째 설까. 그런 것으로 동요하지 않는 나를 봤다.


내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가 크리샤에 대한 두려움이나, 드래곤인 그녀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같은 인간에 의해 변해버리고만 크리샤에 대한 미안한 감정뿐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었던 기억만을 알고서, 마냥 인간에게 가지고 있던 호의를 배신당했을 크리샤에 대한 동정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원래의 나라면 무서워하고도 남았을 텐데. 정작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슬픔이었다.

어째서일까.

“이지경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그런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그렇게 말했다.

“저때의 크리샤는... 아직 너무 어렸을 뿐이니까요. 다시는 저런 일이 반복될 일은 없겠죠.”


내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루시아는 내가 크리샤를 보고서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느니, 설령 있더라도 나만큼은 반드시 지켜줄 수 있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루시아를 바라봤다.

“크리샤는 괜찮고?”

“...네?”

 물음에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아무도 크리샤에 대한 것은 걱정해주지 않는 걸까.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기 때문에, 이미 끝나버린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폭주.

마법을, 마력을 다루는 존재라면 한 번쯤은 겪는 현상이었다. 감정에 동조한 마력이 제 멋대로 날뛰고, 결국 이성을 잃고서 사방으로 마력을 흩뿌리는 현상.

거기에는 본인의 의지가 깃들지 않는다. 단순히, 폭주할 당시에 느꼈던 감정에 의해 마력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크리샤는, 폭주한 결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이 자신의 주인인 크리샤를 위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치워버린 것이었다.

크리샤는 대체 무엇을 느꼈던 걸까.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리고,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시아는 그저 나를 걱정해준 것뿐인데,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해버린 것 같다.

나중에 만회하자. 뭐로 만회할지는 모르겠다만.

“뭐~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크리샤는 저런 일도 있었고,  뒤로 인간들을 싫어하게  것도 같지만. 다들 그런건 아니니까~? 네가 신경  필요는 없어.”

그런 나와 루시아를 보고서 아르카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아르카마저 신경 쓰게 만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이것도 나중에 만회를... 내가 뭘 어쩌란 거지.


“으응~ 어려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재미있는 거 하자!”

“아샤 언니 말에 동감! 저기, 저기, 나는 낙시안은 처음 보는 건데, 얘네들은  할 수 있는 거야? 응? 보여줘!”

그거라면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마야나 니아, 아니면 로로에게 물어봐라. 그것도 아니면 저기서 무안하게 서있는 바록이나 바쿠나, 슈슈도 있고. 굳이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그걸 물어보는 이유가 뭔데.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전부 나를 신경써줘서 이러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보기에는 인간인 내가, 자신들의 동족인 크리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것이니까. 일단 그녀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셈인 나를 생각해줘서 이러는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아샤나 아냐는 그저 이런 이야기가 지루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다만.


“뭐어, 확실히 시간도 없으니까.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으니 그것부터 후딱 끝내는게 좋겠지이. 저기, 엘프의 모습이나 낙시안들을 보아하니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마안.”

“...세뇌? 정신조작?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아샤나 아냐와는 다른 방향으로, 낙시안들에게 호기심이 생긴 듯한 카르네와 샤르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마야와 니아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로로는 오히려 보라면 보라는 듯이 당당하게 내 앞에 서있지만. 너는 너무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다.


아무튼, 덕분에 원래는 그녀들을 비롯한, 낙시안들에 대한 문제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걸 떠올렸다. 낙시안들을 내 곁에 둬도 위험하지 않을까, 뭐,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에 왔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낙시안인 마야와 니아는 마치 내가 유일한 구원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신들을 쳐다보는 드래곤들의 눈을 피해 내 품에 숨을 뿐이었다.

응, 전혀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오히려 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겠다. 로로는 뭐, 저게 특이한 거고... 당장 카르네나 샤르의 시선의 밖에 있는 바록이나 바쿠, 슈슈도 안색이 질려있는데.

아무리 봐도 너는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지 않니?

“...좋아,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봐줘. 최대한 쥐어짜내서 대답해줄테니까.”


어쨌거나 이렇게까지 신경써주는데 내가 냅다 걷어찰 수는 없었다. 나는 루시아와 아르카가 깔아주고, 아샤나 아냐가 환기해준 분위기에, 카르네와 샤르가 새롭게 생성한 주제에 냅다 올라타기로 했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들을 대답해주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결국 늦은 저녁 무렵에서야 다들 영지로 돌아가야 된다며,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보옥이라는 것이 주인인 지배자들이 곁에 없다고 금방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냥 자신의 영지를 비워두고만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루시아는 지금, 천공성이 위치하고 있는 파라모아의 주인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었지만... 그런 그녀도 에오시스 자매의 일로 요정향의 장로들과 이야기할 것이 남아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결국, 천공성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나를 비롯해서... 너무 많이 남았네?


에루나와 마야, 니아, 로로. 거기에 내게 새로운 걱정거리를 안겨준 에네스타와 바록, 바쿠. 마지막으로 에오시스 자매들까지.


응, 엄청 많이 남았군. 가끔 루시아가 찾아오는 것을 제외하면 에루나뿐이었던 천공성에 사람들이 잔뜩 늘었다.

“저기, 나의 주. 죄송하다. 나 때문에...”


“...그건 됐고. 역시 어색하네. 그 호칭은 좀 어떻게  되겠어?”

이제 어쩐다,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에네스타가 우물쭈물해하며 말을 걸어왔다. 나의 주, 라니. 드래곤의 반려니 했던 것도 엄청 간지러운 호칭이기는 했다만 이건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 에네스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 역시 나 같은 것이 주를 모시기엔 부족한 건가?”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고. 느닷없이 우울모드로 들어간 에네스타를 보니 골머리가 아파졌다.

충성도가 지나치게 올라버린 탓에, 개개인의 성향마다 다르겠지만, 에네스타처럼 나에 대한 말에 과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게  거다. 또, 아까도 나에 대한 일에 지나치게 반응한 나머지 크리샤에게 검을 겨누기까지 한거고...

결국 이 문제는 에네스타만의 문제가 아닌 셈이었다. 아직 터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에네스타 말고도 잠재적 폭탄이 잔뜩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충성도 100, 만땅까지 찬 에루나는 이미 핵탄두에 버금가는 위험물인 거지만... 응, 위험물 맞는데?


이런 말을 에루나에게 할 수는 없지만…

"일단…"


꼬로록, 하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배고프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일지도 모르고,  옆에 있던 마야나 니아일 수도 있고, 로로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에네스타일 수도 있고.


아무튼 간에,

"밥이나 먹자."


뭐든 식후경이라잖아. 배부터 채워야지 머리가 좀 돌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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