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67화
하지만 이 소녀가 드네와 공작가의 후계는 아닐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향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다른 가문과 혼인동맹을 맺을 여자들… 후계자가 되지 못한 자들이겠지.
‘어떻게 한다...’
만약 이 소녀가 드네와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바론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드네와 공작가가 생겨난 지, 수백 년이 지났건만 그 가문에 대해 아는 이들이, 소문들이 이렇다 할 것들이 없다는 이야기는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니까.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만약 소녀가 드네와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바론의 목숨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가문에 대한 것을 꽁꽁 숨기고 있는 만큼, 그리고 공작가라는 권력을 지닌 만큼, 바론이란 일개 상인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손쉬운 일일 테니까.
‘하지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던 바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득에는 어디까지나 그에 상응한 위험이 따르는 법이었다. 이번에 따르는 위험은 자신의 목숨, 나아가서는 상단의 미래 그 자체였지만, 바론은 각오를 다졌다. 만약 자신이 걸게 된 것, 즉 목숨에 상응하는 이득이 함께한다면 하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그리고 각오를 다진 바론이 입을 열었다.
“제게 이 소녀를 보여주신 이유가... 레무르님이 부탁하실 일에 관련된 일이겠지요?”
“아아, 그렇네. 일단, 홀로 남은데다가 기억까지 잃은 소녀를 내버려둘 수는 없어 보호하고 있었지만… 이 아이는 인간일세. 그리고 우리들은 드워프지. 이대로 두기에는 아무래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말일세. 자네가...”
“이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면 되는 겁니까?”
레무르의 말을 자르며, 바론이 그렇게 물었다.
레무르에게 혹시라도 미운 털이 박힐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레무르의 말을 듣고만 있으면 덜컥 부탁을 들어줘야할 판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대로의 이야기라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아니, 이 소녀가 정말로 드네와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소녀와 만났다는 것 자체도 위험한 일이었지만. 여기서 소녀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바론 혼자뿐이니, 자신의 입만 조심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이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약속을 해버리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드네와 공작가의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냅다 받아들일 정도로 바론의 간은 크지 않았다.
목숨은 소중한 법이니까. 그런 부탁이라면, 설령 드워프들과의 관계가 조금 틀어질지라도 거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바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레무르는 고개를 더으며 말했다.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그저 그 소녀를 자네들, 인간이 사는 나라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네. 그렇게만 해준다면... 앞으로 자네와 거래할 양을 늘릴 수도 있네.”
레무르의 말에 바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이 소녀가 드네와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이를 보호해주고 무사히 돌려보내준 것으로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바랄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은 소녀의 정체를 아무것도 모른 척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소녀가 드네와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소문을 조금 흘리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사람이 찾아올 테니까. 그렇게 사람이 찾아오면, 모른 척 소녀를 넘겨주면 그만인 이야기였다. 소녀의 정체를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소녀의 정체를 아는 누군가가 나타나기까지 기다리는 것과 직접 소녀의 가문을 캐고 다니는 것은 위험부담 자체가 다른 이야기니까.
그리고 소녀가 드네와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좋았다. 그렇다면 소녀는 꽤 대단한 가문의 여식이라는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니.
귀족들과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은 상인으로써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좋았다. 귀족들이란 어쨌거나, 돈이 많은 소중한 고객들이였다. 거기에 드워프들의 장로인 레무르의, 거래량을 늘리겠다는 약속까지 더해진다면... 이번 건은, 꽤나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긴 했지만, 잘만 된다면 어느 쪽이든 바론에게 막대한 이득과 이권이 생기는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 소녀를 무사히 저희들의 땅으로 돌려보내주겠습니다.”
결정을 내린 바론은 이내 레무르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침대 위에 누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약속하마. 너를 반드시 돌려보내주겠다고.”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보고서 바론은 미소 지었다.
《드래곤의 남편, 베헤노스》
에루나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생긴 의문점에 고개를 갸욱였다. 크리샤가 인간을 싫어하게 된 계기라고 들어서, 내심 대체 무슨 끔찍한 일을 당했기에 저럴까, 각오를 다지고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훈훈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뭐, 이해관계가 여러모로 얽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바론이라는 상인이 기억을 잃은 소녀, 를 연기하던 크리샤를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샤가 인간을 싫어하게 된 계기로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너무 상세하지 않아?
마치 곁에서 보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에루나를 게슴츠레 보고 있자니, 내 표정을 본 에루나가 말했다.
“무슨 궁금한 점이 있으십니까?”
있긴 잔뜩 있지. 근데 어떻게 말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에루나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루시아의 얼굴이나, 보기 드물게 졸린 얼굴 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아르카나, 분위기가 상당히 그랬다.
“아니, 계속 이야기 해줘.”
하지만 나는 굳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을 택했다. 이제 며칠 뒤면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로 향해야 했다. 크리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알아둬야 했다.
내 말에 에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상인 바론은 크리샤 아가씨를 인간들의 나라, 라이어스 제국으로 데려다줄 수 없었습니다.”
태연하게, 에루나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눈앞에 작은 영상이 떠올랐다.
어깨에 화살을 맞은 채,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바론과 홀로 남은 어린 크리샤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영상이었다.
“상인 바론이 이끄는 상단, 그리고 그 상단의 호위를 맡고 있었던 용병단이 상인 바론을 배신했기 때문이었죠.”
휘리릭, 하고 에루나가 보여주는 영상의 흐름이, 마치 되감기하듯이 감겨지기 시작했다.
레무르와 약속을 한 바론은 이윽고 비밀리에 크리샤를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서 라이어스 제국으로 향했다. 그런 바론의 손에는 레무르와 약속을 맺은 증거로, 드워프들의 친구라는 증표인 작은 단검이 들려져 있었다.
드워프들과 친구를 맺은 상인이라니. 아마 인간으로써는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 있다면 앞으로 바론의 상단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동료라고만 생각했던 상인과, 고용했던 용병들의 배신만 없었더라면.
테 베르나에서 떠나온 바론은 멍하니, 창밖을 들여다보고 있는 크리샤네아를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오지 않는 기회를 붙잡은 셈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알아차렸을 이상을 눈치 채는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아무리 지나도 도저히 도착할 생각을 않는 것에 이상하다고 여긴 바론이 마차의 문을 열고, 고용한 용병을 불러 이유를 물으려고 했을 때. 그 용병이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바론이 상인치고는, 상당한 검술을 익히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면 그 용병의 칼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케 용병의 칼을 피한 바론이 되려 허리춤에 달고 있던 호신용 단검으로 용병을 쓰러트렸을 때는, 이미 배신할 작정이었던 용병들에게 둘러싸인 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퀴고!”
오랜 세월 거래를 함께해왔던 동료이자, 아버지가 상단을 이끌었을 당시부터 상단에서 일해 왔던 자가 그런 용병들의 곁에 서있는 것을 본 바론이 배신감에 사무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바론 도련님. 일이 이렇게 된 건 정말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퀴고의 모습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스윽, 하고 퀴고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일제히 겨누어진 석궁들이 아니었다면, 그가 배신한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만 생각했을 정도로.
하지만 상황을 봤을 때, 용병들은 명백하게 퀴고를 따르고 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상행의 호위를 맡는 용병들을 구한 것 역시, 눈앞의 사내인 퀴고였다.
“당신이 나를 배신하다니...”
믿어왔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에 사무치는 감정으로 이를 가는 바론을 보며 퀴고는 눈을 찡긋거렸다. 평소, 바론이 실수를 할 때마다 퀴고가 이을 알려줄 때 사용하던 제스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단을 이어받게 되었던 바론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거나 가르침을 줬던 것이 퀴고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바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퀴고의 작은 제스처마저 눈에 띄었다.
지금이야 저 행동마저 증오스러울 뿐이지만.
“배신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요. 바론 도련님. 저는 거래를 한 겁니다. 상인이 돈을 위해 거래를 하는 일은 흔한 일이죠.”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인 퀴고가 천천히 바론에게로 다가가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호오? 이 소녀는 대체 누구입니까?”
“네가 알 필요 없다!”
이윽고,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소녀를 본 퀴고의 물음에 윽박지르듯이 대답한 바론은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소녀는 백치다. 충격으로 인해 스스로는 거동조차 불가능한 존재인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서 바론이 살아남을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물며, 백치상태의 소녀까지 보호하고자 한다면... 아마, 반드시 죽을게 분명했다.
당장 퀴고가 손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바론은 석궁에 벌집이 되어버릴 테니까.
“이거야 원, 도련님도 남자가 다 되었군요. 그 나이가 되도록 성혼을 하지 않으셔서 이 퀴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덕분에, 저야 다행이기는 하지만요.”
소녀를 음흉하게 바라보던 퀴고의 말에, 바론은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퀴고가 자신의 상단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도.
만약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막말로 자신의 후계가 없는 지금은 퀴고가 다음으로 상단의 주인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래...
“...한 가지만 묻게 해다오. 에스란 상단인가?”
“과연, 영명하십니다! 도련님.”
바론의 물음에 웃으면서 대답하는 퀴고를 보며, 바론은 그대로 소녀의 손을 잡고서 뒤에 있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스란 상단.
라이어스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상단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테 베르나와 거래를 하는 상단의 이름이기도 했다. 또, 바론과는 상당한 악연이 있는 상단의 이름이기도 했다.
바론의 아버지는 에스란 상단과의 어음거래에서 커다란 손해를 보고, 그 피해를 갚기 위해 고생만 하시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 어음거래에 대한 것을 알아보던 중에 거기에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은,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였다.
바론의 상단과 에스란 상단을 비교하면 반딧불과 달빛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테 베르나와의 거래에서만큼은, 오늘의 일로 바론의 상단이 우위에 설 수는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규모의 거래량이나, 금전력, 정보력, 모든 것을 통틀어서 바론의 상단은 에스란 상단과는 상대가 되질 않았다.
바론은, 아버지의 복수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어음거래를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퀴고의 자책을 들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었다. 하지만 이번의 배신으로 확실해졌다.
아버지 때의 일도 퀴고의 짓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는 그때부터 배신자였던 것이다.
“이런, 귀찮게 구시는 군. 이봐, 도련님이 천천히 걷게 하게.”
퀴고의 말에, 용병들이 일제히 석궁을 쏘아댔다.
“읏!”
날아오는 석궁의 화살들을 본 바론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화살들은 소녀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땅바닥에 꽂혔고, 오히려 소녀를 방패삼고 있던 바론의 어깻죽지에는 정확하게 화살이 꽂혀 들어갔다.
“이런 제기랄!”
욕지거리를 내뱉은 바론은 어깨를 움켜쥔 채, 도망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미 다친 바론이, 소녀마저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방치된 소녀는 주저앉은 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그런 소녀를 본 퀴고는 씨익, 하고 웃으면서 용병들에게 말했다.
“가서 도련님의 마지막 걸음을 쓸쓸하지 않게 도와주도록. 나는, 이 소녀와 이야기 좀 해야될 것 같으니. 너희들도 일이 끝나면 이 소녀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
“호오, 약속했수다?”
“아아, 약속하지.”
퀴고의 말에 용병들이 시시덕거리며 바론의 뒤를 쫓았다. 그런 용병들을 본 퀴고는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과연, 엄청난 미색이군. 소개해준 여자들을 죄다 쳐냈던 바론, 그 녀석이 이런 여자를 숨기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백치인 것 같지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괜찮지.”
소녀의 외모를 가까이서 살펴본 퀴고는 음흉한 표정을 지은 채 스윽, 하고 소녀의 옷고름에 손을 뻗쳤다.
‘어떻게 하지?’
갑작스럽게 돌변한 상황에, 이를 지켜보고 있던 크리샤네아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살들이 날아왔을 적에는, 자신이 바론이라는 인간의 방패 대용이 됐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눈치 챘을 정도로, 크리샤네아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만약 그녀의 목걸이에, 화살따위를 튕겨내는 마법이 걸려있던 것이 아니였다면, 한 두 개 정도는 맞았을지도 몰랐다.
본신의 몸이라면, 화살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의 몸은 어린 인간 소녀의 몸이였다. 당연히 보통의 인간보다 조금 튼튼할 뿐, 대단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생각했던 유희는,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계획대로라면, 바론이라는 인간의 안내를 받아서, 인간들의 나라라는 라이어스 제국을 조금 둘러보고, 마법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만인 그런 것이었을 텐데.
그렇게 어쩔 줄 몰라하던 크리샤네아의 몸이 휙, 하고 앞으로 당겨졌다.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크리샤네아의 옷을 거칠게 움켜쥔 퀴고의 손에 옷이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크리샤네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