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4화 [고결한 대지]
“헤에,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드워프들도 제법이네.”
눈앞에 보이는, 드워프들의 마을을 보고서 크리샤네아는 내심 감탄했다. 특히나 마을의 외곽을 두른 방벽들을 보고서 감탄했다. 그저 외적에 대비한 방벽이라고 하기에는, 이렇다 할 지식이 없는 크리샤네아가 보기에도 워낙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성 역시,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비록, 저들이 아니라 저들의 조상들이겠지만. 그래도 그들 역시 드워프들이니까, 그 후손이 세운 마을이 크리샤네아가 보기에도 훌륭해 보이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크리샤네아는 몰랐다. 눈앞의 드워프들의 마을이, 사실 그녀의 자매나 마찬가지인 다른 드래곤들의 영지에서 살고 있는 드워프들의 마을과 비교해도, 번성한 것임을.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만. 사실상 이번이 크리샤네아의 첫 외출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크리샤네아의 앞에 보이는 드워프들의 마을은, 아니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상당히 커서, 도시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곳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었다. 그것이 홀몸으로 나타난 자신의 존재 때문이란 것을, 꿈에도 모르는 크리샤네아는 별 생각하지 않고 마을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런 크리샤네아 덕분에 작은 소동이 일어난 드워프들은 크리샤네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슈페리아에 자리 잡은 지 이미 수백 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마을정도였을지 몰라도, 그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아무런 발전도 없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크리샤네아도 감탄할 정도의 규모에 이르렀으니까.
물론 그것이 그냥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다른 종족들은 슈페리아에서 이렇게나 번성을 이룰 수 없었을 테니까. 오직, 그들이 드워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슈페리아에는 화산이 많았지만 그런 환경은 땅의 정령을 조상으로 둔 드워프들에게는 아무런 하자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화산지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각종 광물들은 그들이 불을 다루는 데 유익한 역할을 해줬다.
그뿐만이 아니라 화산 자체로도 쓸모가 많았다. 인간들은 다루는 것조차 엄두도 못내는 용암을, 드워프들은 열원으로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이 주로 용암을 사용하는 데는 그들의 용광로가 있었고 그 외에도 다른 곳에 비하면 나무가 적은 편인 슈페리아에서 겨울을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용암은 있으면 불안할 뿐인 그런 것이라도, 드워프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자원인 셈이었다.
덕분에 그들이 슈페리아에 자리 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인간들의 나라인 라이어스 제국이 바로 지근에 위치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야 드워프들이 살고 있는 이 땅, 슈페리아는 도바난, 드래곤의 땅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간 큰 인간이라도 그런 곳을 함부로 드나들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의 나라라고 할지라도, 군대를 이끌고 덤벼올 수도 없었다.
당연했다. 아무리 강병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드래곤이 한번 숨결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군대의 태반이 전멸할 테니 말이다. 그나마 드래곤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검주나 대마법사를 이런 하잘 것 없고, 이익도 되질 않는 데에 내보낼 리도 없고 말이다.
물론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라이어스 제국의 종교, 드워프들은 관심도 없는 어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인간 외의 종족들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슈페리아에 드워프들이 자리 잡은 지 수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대단한 일을 벌이지는 못했다.
기껏 해봐야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에 높은 관세를 매기는 정도일까. 제 아무리 백성의 대부분이 믿는 종교에서 타 종족을 배타한다더라도, 그것이 나라 자체의 의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종교 역시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이득이 되기에 이용할 뿐이지, 그 종교에 휘둘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천년이 넘는 세월을 유지해온 라이어스 제국은 그런 멍청한 황제를 배출한 적은 없었다. 그나마, 종교에서 압박을 넣어 만든, 드워프제 물건들에 대한 높은 관세 역시 나라에게 이득이 되면 이득이 됐지 손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물론, 드워프들이 라이어스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니까 그것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렇기에, 제국의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드워프들의 마을. 테 베르나, 인간들의 말로는 정과 망치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은 거진 도시의 규모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발전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나 대단한 곳에서 겨우 인간 소녀 하나로 소동이 일게 된 것은,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례가 없다는 것은 그들로써는 꽤나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전례라는 것을 함부로 세우면, 결코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리 어린 아이를 밖에 그냥 두자는 겁니까? 대부분 토벌했다고는 쳐도, 밖에는 아직도 고블린이며 오크들이 남아 있습니다!”
크리샤네아를 처음으로 발견한, 하지만 그것이 드래곤이 변신한 것임을 꿈에도 모르는 드워프가 장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인간들에게 악감정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 멀리, 도바난이 아닌, 인간들의 땅에 자리 잡고 있는 종족들이 서로의 이권 때문에 싸움질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들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인간들과 적지 않은 교역을 하고 있었다. 나라간의 교역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의 거래가 오가고 있었다.
주로,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무구를 비롯한 철제의 물건들과 각종 식료와 목재, 그리고 소금 등을 거래해왔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식료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그 중요가 더욱 상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체 농사를 짓기에는 힘든 땅인 것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도 비가 내리질 않기 때문이었다.
아예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적게 내렸다. 수천이 넘는 드워프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는 인간들과의 거래는 불가피했다.
그래서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 드워프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드워프의 말에도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전례는 중요한 것일세. 하물며, 인간이지 않은가? 다른 종족이면 몰라도...”
“하지만!”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네. 하지만 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자네의 말대로 이 근처에는 아직 몬스터들이 남아있지만 그 수가 무척이나 적으니... 만일에라도 일이 생긴다면, 그 뒤에 대처하더라도 늦지 않는다는 걸세. 거기에, 오늘은 인간들의 상단이 오기로 하지 않았는가?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맡기면 그만이지.”
장로의 말에 젊은 드워프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반론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이상 장로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워프의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니 자네도 이해함세, 내가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더라도 설마, 어린 인간이 죽게 내버려두겠는가? 일단, 상황부터 확인하고서...”
그렇게 말하고서, 이 소동의 원인이 된 인간 소녀라는 것을 보기 위해 망루로 올라간 드워프 장로가 이내 사색이 되어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어서 문을 열게나!”
“...방금 전까지는 그리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땐 그때고, 일단 당장 문을 열게!”
갑작스레 변심한 장로가 마음에 걸렸지만 젊은 드워프는 일단 장로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였으니까. 장로가 반대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간의 아이를 밖에 내버려두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 몰래 안으로 들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변심한 장로가 저렇게 허락을 내리니, 젊은 드워프로써는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었다.
드르르륵...!
장로의 허락이 떨어지자, 드워프들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인간들의 상단이 오더라도, 결코 열리지 않고, 마을 밖에서나 거래했었던 것이 고작 한 명의 소녀 때문에 열린 것이었다.
어떻게 들어가면 좋을까, 하고 굳게 닫혀져 있던 문을 보고서 생각하고 있던 크리샤네아는 돌연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이내 미소 지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애당초 열려고 했던 것이 알아서 열렸으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크리샤네아는 재밌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서, 드워프들의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한동안 소란스러웠던 테 베르나는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런 테 베르나로 향하고 있는 인간들의 상단이 저만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환대해주실 줄이야. 영광입니다.”
“영광이랄 것까지야...”
젊은 인간 상인의 말에 드워프 장로, 레무르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레무르의 모습을 보고도 젊은 인간 상인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뇨. 테 베르나의 문을 연 상인은 제가 처음이 아닙니까? 이거, 제 이름, 바론이 라이어스 제국의 역사에 남는 게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바론은 그렇게 말했다. 원체 거짓말을 하는 걸 밥 먹듯이 하고 속으로는 일을 꾸미는 것이 일상이라는 것이 인간 상인들이다. 그것이 드워프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었지만 레무르가 보기에도 바론이라는 이름의 젊은 상인은 무척이나 기뻐보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 기뻐하는지, 레무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그건 레무르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기는 했다. 화를 내는 것보다 기뻐하는 것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도 없고 말이다.
하긴, 드워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좋은 광물로,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망치를 두들길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으로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드워프들의 조상인 땅의 정령과는 다르게, 생명을 가진 육신을 갖고 있는 드워프들로써는 먹는 것도 중요하기는 했기에, 이렇게 인간들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 반대로 인간인 바론에게는 정말로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드워프의 마을, 테 베르나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문을 연 것이 아니었다. 무려 드워프들의 마을로 들어온 인간이 되기까지 했다. 그건 드워프가 아닌 인간인 바론에게는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니, 바론은 기사나 귀족 같은 것이 아니니,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을만한 업적을 남겼다는 의미 그 자체로 기뻐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상인이기에, 이 일로 인한 가치... 즉, 이득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적어도, 바론이라는 상인은 앞으로 이 일로 많은 이득을 볼 게 분명했다. 테 베르나와 거래를 하는 상단은 바론이 이끄는 작은 상단 외에도 여러 개가 있고, 그 중에서는 라이어스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상단이 있었다. 바론이 이끄는 상단의 수배에 달하는 규모로 거래를 하는 상단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결국 처음이자 유일하게 테 베르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론의 상단뿐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