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3화 [고결한 대지]
그리고 그 다짐은 정확히 6시간 만에 깨어졌다. 크리샤네아는 6시간 전에 했던 것처럼, 들고 있던 보옥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물론 보옥은 어림없다는 듯이 둥실~ 하고 떠올랐다. 덕분에 분하다는 듯이 발을 구른 크리샤네아였지만, 애꿎은 바닥에 금이 갔을 뿐 보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였다.
“이걸 대체 어떻게 지배하란거야?”
보옥은 마법의 정수. 마력의 덩어리였다. 비슷한 것으로 드래곤의 심장이 있었지만, 이 보옥은 그 심장이 가진 힘의 무려 열배에 달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보옥을 지배할 수 있다면 드래곤 열에 버금가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됐다.
하지만 말이 쉽지. 솔직히 말해서, 드래곤 혼자서 드래곤 열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보옥을 지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역대 보옥의 지배자들이 그랬듯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크리샤네아는 보옥을 지배하기 위한 지식을, 전신인 카르나시아로부터 전해 받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보옥을 지배하는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경험이지만. 지식과 경험은 별개의 것이니까. 도통 뜻대로 되지 않아서 결국 잔뜩 골이 난 크리샤네아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옮겼다.
“다들 뭐하고 있으려나.”
부웅, 크리샤네아의 손짓에 날아온 자그마한 구슬을 바라보자 그곳에 여러 가지 화면이 비쳐보였다.
드워프며 엘프며, 여러 종족들의 모습이 말이다. 구슬의 정체는 원경의 구슬이었다. 대상이 어디에 있든 간에, 찾아서 살펴볼 수 있는 마법도구였다.
물론 크리샤네아는 그 대상이랄 것을 딱히 정하지 않았다. 원경의 구슬은 대상이 어디에 있건 찾아내서, 그 모습을 비쳐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어떤 지점을 골라서 거기에 있는 것들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원경의 구슬이 비쳐 보이는 것들. 여러 종족들의 모습은 모두 크리샤네아의 영지, 슈페리아에서 살고 있는 종족들의 모습이었다.
천공성에 있었을 적에는 심심하면 다른 자매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힘을 겨루거나 하며 놀았지만 이렇게 보옥의 곁에서 수련을 거듭하는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 이후로는 크리샤네아의 유일한 낙은 자신의 영지에서 살고 있는 종족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아직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원... 또 인간들에게 손을 빌려야하나?”
그렇게 원경의 구슬을 살펴보며 다른 종족들을 지켜보고 있던 중에, 한 드워프의 한탄 소리가 크리샤네아의 귀에 들려왔다.
크리샤네아는 그 드워프를 보고서 괜히 미안해졌다.
슈페리아에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는, 크리샤네아가 아직 보옥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기후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불안정해져서, 곳곳에서 땅이 갈라지거나, 큰 가뭄이 들기도 했다.
크리샤네아의 영지인 슈페리아는 오래전부터 비옥한 땅이었다. 화산들이 많지만, 그 덕분에 수만 년을 거듭하며 쌓였던 화산재가 땅을 비옥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땅이 비옥해봐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소출은 기대할 수 없었다.
덕분에 원경의 구슬에 비친 드워프처럼 곤란해지는 자들도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크리샤네아가 제대로 보옥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인간이라...”
크리샤네아는 드워프의 입에서 나왔던 종족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
솔직히 말해서, 크리샤네아는 인간을 직접 마주해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카르나시아, 크리샤네아의 전신이자 유희를 즐겼던 드래곤이 가장 많이 유희를 하기 위해 취했던 몸이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 지식 역시 방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 그들 개인의 힘을 다른 종족들과 비교하기에도 미안할 만큼 미약하기는 했지만 극히 일부, 그렇지 않은 자들이 태어나고는 했다. 초월자라던가, 검주라던가, 드래곤인 크리샤네아가 보기에는 어림 반 푼도 없지만 그들 스스로 대마법사라고 부르기도 하는 존재들까지. 물론, 다른 종족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인간들은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그만큼 특출한 재능이 있는 자들이 많이 태어나는 것도 당연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드래곤들이 자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종족이기도 했다. 다른 종족들이야 워낙 예민해서, 아무리 드래곤이 완벽하게 변신을 하더라도 알아보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들 중에는 그만큼 예민한 자들이 드물었다. 하지만 가끔 드래곤이 변신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큼 재능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태어나고는 하니까 유희를 하기 위해 숨어들기에 딱 좋았다.
정체를 숨기고 역할놀이를 하기에 딱 제격인 종족이라고 할까...
거기에 크리샤네아의 영지, 슈페리아의 옆에는 그 인간들이 세운 제국, 라이어스라는 나라가 있었다.
자신의 영지에 이웃하고 있기까지 하니 모를 리가 없었다. 간혹 가다가 원경의 구슬에 비친 인간들도 본적이 몇 번인가 있었고.
“나도 유희나 해볼까?”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도리질을 쳤다. 보옥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무슨 유희. 카르나시아도 유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옥을 완전히 관리 하에 둔 뒤에나 그랬던 것이였다.
카르나시아에 비하면 아직 한참 어린데다가, 보옥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크리샤네아로서는 유희는 꿈도 못 꿨다.
“그래도... 구경하는 건 괜찮겠지?”
스윽, 하고 크리샤네아는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자신이 봐도 인간 여자아이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미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신이 변한 모습이니까 꽤나 예쁠 것이 분명했다.
인간들은 미인들을 좋아했다. 그건 고금을 통틀어서 변치 않은 것이었다. 자신이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어려 보이는데다가 얼굴도 제법 예쁠 테니까, 인간들의 앞에 나서도 정체를 들켜 부끄러움을 살 일은 없으리라. 설마하니 자신이 드래곤인 것을 들킬 일도 없을 테고.
그래도 보옥이...
역시나 마음에 걸리는 건 보옥이었다. 루시아보다 1년이나 뒤쳐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이상 보옥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됐다. 바로 좀 전에 보았던 드워프의 일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에, 원경의 구슬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비쳐보였다. 여느 때처럼,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기 위한 상단이었다.
그 모습을 본 크리샤네아의 머릿속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마치 이때다, 싶을 정도로 타이밍이 좋게도 인간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훌쩍 가버리면 방금 전까지 고민하고 있던 건 뭐가 될까. 덕분에 고민을 거듭하던 크리샤네아는 곧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자신의 영지였다. 잠깐 몰래 훔쳐보는 것쯤이야 별 문제 없겠거니와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크리샤네아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우우웅...!
그런 크리샤네아의 앞에 작은 문이 생겨났다. 전이문. 한 번에 먼 거리를 건널 수 있는 전이마법 중에서도 상위에 위치한 마법이었다. 보옥을 지배하는 것은 못했지만, 크리샤네아는 이미 하나의 드래곤 몫은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 땅은 자신의 영지. 지배를 할 수는 없더라도, 대지의 보옥의 힘을 조금은 받아 사용할 수는 있었다. 전이문 정도는 영창 없이도 만들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잠깐 기분 전환하는 것도 중요한 법이니까!”
크리샤네아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이문을 건넜다.
이 일을, 30년이 넘도록 후회하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서.
훌쩍, 전이문을 넘어 인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던 길목에 발을 내려놓은 크리샤네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원경의 구슬에 비쳐보였던 인간들의 상단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근처로 전이해 온 것이니 이 근처에 있을게 분명했다.
쫑끗, 크리샤네아의 귀가 움직였다. 드래곤의 귀는, 귀가 밝기로 유명한 엘프들도 한 수 접어줄 만큼 작은 소리도 예민하게 잡아냈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런 능력이 어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본신일 때랑은 다르게 다소 집중해야만 하지만.
그렇게 귀를 쫑긋거리며 집중하자,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인간들의 목소리였다.
“찾았다!”
크리샤네아는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했다. 따져보니까 자신의 모습이 영 수상쩍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인간, 그것도 나이가 어린 소녀였다. 그렇기에 이런 곳에 있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이곳, 슈페리아는 크리샤네아의 영지였지만 그렇다고 몬스터들이 아주 없다는 건 아니었다. 크리샤네아에게 있어서는 위협조차 되지 못하는 몬스터들이기에 굳이 정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내버려둔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꾸민 모습, 인간 소녀가 그런 몬스터들이 있는 곳 한복판에 홀로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다...”
아주 잠깐 고민을 해본 크리샤네아는 이내 밝아진 얼굴로 손뼉을 쳤다. 짝, 하고 작게 박수소리와 함께 크리샤네아는 희희낙락해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니라 드워프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인간 소녀? 그것도 혼자?”
드높은 망루 위에서, 오늘 오기로 한 상단을 기다리고 있던 드워프는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보고서,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인간 소녀. 그것도 인간들의 나이로는 열댓 살은 될까 말까 싶은 어린 소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필이면 오늘 당직이라서 괜한 고민을 하게 된 드워프는 잠깐 고민해봤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여자를, 그것도 한참이나 어려보이는 소녀를 밖에 내버려둘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문을 열 수도 없었다. 비록 그가 드워프들의 마을의 문을 지키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그런 일에 대해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판단으로, 마을의 드워프들, 수천이 넘는 그들의 목숨에 위협이 갈지도 모르니.
그렇기에 드워프들은 의견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