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2화 [고결한 대지]
《고결한 대지, 크리샤네아 슈페리아.》
후욱!
펼쳤던 날개를 거둬들이며 땅에 내려선 크리샤네아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혹시나 싶어서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나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쫓아올 리가 없지. 그 난리를 부렸는데 쫓아올 리가 없었다. 다들 자신보다도 그 인간의 비위나 맞추고 있을 테니까.
특히나 루시아, 그 녀석은...
그런 생각을 하자, 뿌드득 하고 이를 간 크리샤네아는 저만치, 천공성이 있을 곳을 바라봤다.
“그 인간 따위가 뭐가 좋다고... 어차피 인간들이 다 똑같지.”
1년 안에 자신들을 반하게 하겠다니 뭐니 했지만, 인간들이란 족속들은 어차피 다 똑같았다. 탐욕적이고, 욕망에 충실하다. 금을 좋아하고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다 그런 녀석들뿐이었다.
“게다가 낙시안들, 그 녀석들은 왜 다들 어려?”
그건 루시아와 에루나가 일부로 어린 자들만 뽑은 것이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크리샤네아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전부 그 인간, 이지경의 취향이겠거니 생각할 뿐이지. 그렇게 생각했기에 크리샤네아의 안에서 이지경의 평판이 다시금 떨어졌다. 이지경으로써는 억울한 일이지만 별 수 없었다.
“그 녀석도... 어차피 다 똑같을 게 분명해.”
30년 전, 그 날 보았던 인간들이랑...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른 녀석들은 인간이란 족속들이 얼마나 더러운지,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잘 몰랐다. 그야 그럴 것이다. 그 녀석들이 인간을 볼 기회가 몇이나 될까.
그 녀석들의 영지들은 죄다 외진 곳에 있었다. 기껏 해야 루시아나, 카르네 정도만 인간들의 땅과 맞닿아있을 뿐 나머지는 두 눈으로 직접 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작 30년 전에 있었던 일을 벌써 까먹었다고? 내가 그 날, 인간들한테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데.
“...다 똑같아.”
어차피 그 인간도, 지금이야 가식을 떨고, 루시아의 곁에서 아양이나 떨고 있는 것이겠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돌변할 게 분명했다.
크리샤는 3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직 어릴 적의 일을... 물론 지금도 수천 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으로써는 어린 축에 들기는 했지만, 30년 전에는 아직 보옥조차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나이도 나이지만, 우선 힘이 부족했다.
부모이자, 전생이었던 드래곤. 흑색용 카르나시아의 힘을 그대로 물려받은 크리샤였지만, 그걸 완전히 다룰 수 없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어린 이상 물려받은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없는 법이니까.
다시 그때 있었던 일을 떠올린 크리샤는 뿌득, 이를 갈았다.
“두고 보라지. 반드시 그 인간의 가면을 벗겨 낼테니까. 그때 가서 내게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해 줄까봐?”
그렇게 중얼거린 크리샤네아는 이윽고 다시 날개를 펼쳐보였다. 영지인 슈페리아야 얼마든지 마법을 써서 이동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기분이 꿀꿀했다. 하늘을 날며 찬바람이라도 쐐야지 화가 풀릴 것 같았다.
후욱!
다시금 날개를 펼쳐낸 크리샤네아는 이윽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이미 30년이나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30년 전.
아직 크리샤네아가 어리기만 했을 시절에 있었던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대지의 보옥을 지배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던 크리샤네아는 신경질을 부리며 들고 있던 보옥을 땅에 내팽개쳤다. 물론, 보옥이 내팽개친다고 그대로 땅에 떨어질 일은 없었다.
둥실~
땅에다가 있는 힘껏 내던진 보옥이었지만, 이내 둥실하고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크리샤 아가씨. 보옥은 귀중한 귀물입니다. 아무리 부서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다루지 말아주시길.”
“아, 알고 있어! 알고 있거든?!”
그런 크리샤네아를 지켜보고 있던 에루나의 말에 크리샤네아가 짜증을 부리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짜증을 부려봐야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하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야 벌써 1년 전에, 루시아가 천공의 보옥을 자신의 힘으로 지배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일곱의 드래곤.
한날, 한때에 동시에 부화한,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들. 크리샤네아는 어떻게 보면 자매나 마찬가지인 그녀들에게 대항의식을 갖고 있었다. 아니, 대항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크리샤네아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드래곤들은 원체부터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진 생물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남아있는 유일한 적수는, 당연하게도 같은 종족은 드래곤들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서로를 라이벌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라이벌 중의 하나인 루시아가 벌써 1년 전에 보옥을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같은 날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녀들의 성장속도는 제각각이었다. 자신이나 루시아, 아르카처럼 빠르게 성장한 경우도 있는가하면 샤르나 아샤, 아냐처럼 성장이 느린 경우도 있었다. 이도저도 아닌 카르네의 경우도 있기야 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크리샤네아는 자신이 다른 자매들. 루시아나 아르카를 포함해서 모두와 비교해도 자신이 훨씬 낫다고 여겼다.
그야 자신의 전신, 카르나시아는 이 세계에 남아있던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을 물려받은 크리샤네아 역시, 다른 자매들과 비교해서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가장 강하다. 그것은 드높은 드래곤으로써의 자존심을 채우는 데에 충분한 가치였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보옥을 지배하는 일은 루시아보다, 벌써 1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드래곤, 그 중에서도 제일인 크리샤네아로써는 그 사실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덕분에 루시아가 보옥을 지배하는 것에 성공한 날부터, 하루도, 한시도 빠짐없이 보옥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아무리 해도 보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성장해서, 보옥을 관리할 수 있기 전까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관리자의 명령에는 곧이곧대로 따르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간들의 언어로 열불이 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크리샤네아는 알 수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입을 벌리면 그대로 독기로 이루어진 숨결이 흘러나왔다. 아직 헤츨링에 불과한 크리샤네아였지만, 전신인 카르나시아의 힘을 그대로 물려받은데다가, 본인 그 자체로도 하나의 드래곤이었다.
그녀가 내뱉은 숨결은, 어지간한 고위마법 저리가라할 위력을 갖고 있었다. 크리샤네아는 자신이 내뱉은 숨결로 자신의 성이 상하기 전에, 숨결을 갈무리했다. 어차피 성이 좀 부서져봐야 드워프들을 시켜 고치게 하면 그만이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다른 종족에게 떠넘겨야한다는 것도, 크리샤네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를 참은 크리샤네아는 이윽고 자신의 뒤에 서있던 에루나를 보며 말했다.
“에루나! 뭔가 방법이 없는 거야?”
“방법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그야...”
이 보옥을 지배하는 거지. 툭, 하고 손가락으로 둥실 떠오른 보옥을 찌른 크리샤네아는, 그럼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볼을 부풀렸다.
그런 크리샤네아의 모습이 보옥에 비쳐보였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열 살 쯤 넘어보였을까. 그런 외모의 소녀가 볼을 잔뜩 불린 채 토라진 모습이 썩 귀여워보였다. 하지만 크리샤네아는 그것 역시 불만이었다.
“그리고 키는 대체 언제 크는 거야?!”
그야 당연히 너무 어려보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모두가 모였을 때 보았던 루시아는 고작 1년 사이에 엄청나게 자라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서로 거기에서 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보았던 루시아는 크리샤네아가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키도 키지만, 무엇보다도 가슴이 커졌다.
그렇게 올려다봐도, 루시아의 얼굴은커녕 젖소만 해진 루시아의 가슴밖에 보이지 않았다.
딱히, 크리샤네아는 외모에 대해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니, 크리샤네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완벽이란 단어는 드래곤을 위한 단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딱히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드래곤은 본연의 모습 자체로 완벽했다. 게다가 이 모습은 진짜도 아니었다. 본신의 모습은 이따위 인간 꼬맹이의 모습과는 달리, 훨씬 크고 웅장한 드래곤의 모습이었으니까.
물론 성체인 드래곤과는 달리 헤츨링에 불과한 크리샤네아는 진짜 드래곤이라고 하기엔 위엄이 다소 부족한 모습이기는 했다. 짜리몽땅한 다리에 드래곤이라고 하기엔 좀 통통한 모습이니까. 그래도 크리샤네아는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샤네아의 영지, 그리고 그 영지에 자리 잡은 크리샤네아의 성은 인간의 기준으로 세워져 있었다. 카르나시아의 취미가 인간이나 다른 아인들의 모습을 취하고 유희를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드래곤들 모두가 그렇기는 했다. 본신의 모습으로 성에서 거주하기에는 여간 불편할 따름이었다.
그들도 드래곤의 모습보다는 인간이나 아인의 모습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 별종이기에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이 모습 역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대부분은 이런 모습으로 지내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 모습이 남들보다 못하다는 사실 하나로 크리샤네아는 자신의 발육상태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드레스를 들춰, 아직 가슴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평탄한 것을 바라본 크리샤네아는 볼을 부풀렸다. 대체 이게 어떻게 하면 자라는 건지... 루시아에게 물어보면 되려나 싶었지만, 물어보는 것도 크리샤네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크리샤네아를 지켜보고 있던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도 금방 자랄 겁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나는 빨리 자랐으면 좋겠다고!”
빼액, 하고 에루나에게 소리를 질렀던 크리샤네아였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에루나에게 이래봤자 별 수 없다는 것쯤은 크리샤네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에루나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에루나 투아레.
자신의 전신, 카르나시아를 포함해서, 이 세계에 남아있던 드래곤들이 만들어낸 골렘. 그녀는 자신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알이었을 적부터, 수백 년을 지켜준 존재니까. 어찌 보면 알을 낳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카르나시아보다는 에루나 쪽이 진짜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미안, 에루나. 내가 말이 심했지?”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기에 에루나에게만큼은, 자존심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인 크리샤네아도 고개를 숙이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에루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 크리샤네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대답하는 에루나를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크리샤네아도 에루나에게 미움을 사는 일은 싫었다.
“...시간이 됐군요. 이만 저는 물러가보겠습니다.”
“에? 벌써 가게?”
“네, 아르카 아가씨를 깨울 시간이 되었기에.”
에루나의 대답에 크리샤네아는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좀 자게 냅두면 어때서. 깨어있으나 자고 있으나 어차피 똑같은 녀석인데.”
“그도 그렇습니다만, 그대로 자게 냅두면 백년이 지나도록 잠들어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건...”
그렇긴 하지.
1년 전에 루시아가 보옥을 지배하게 되어, 자신의 영지인 파라노아에 머무르게 되고, 자신 역시 그것 때문에 영지에 틀어박히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자매들은 한 곳에서 머물렀다.
천공성.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후 무후한 요새이자 성.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소환될 누군가가 지낼 성이자, 어떻게 보자면 이 세계에 남아있던 모든 드래곤의 보금자리나 마찬가지인 성에 말이다.
아무튼, 그곳에서 십 수 년을 같이 살을 맞대며 자라온 크리샤네아였기 때문에, 아르카가 어떤 드래곤인지 잘 알고 있었다.
톡 까놓고 말해서, 아르카는 게으름의 화신이었다.
자신이나 루시아, 그 다음으로 빠르게 성장한 드래곤이면서도, 익힌 마법도 아직 천 개가 넘지 못하고, 하물며 보옥을 지배하는 시도조차 안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 철이 들까 싶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 봐.”
“알겠습니다. 크리샤 아가씨.”
고개를 숙이며 전이 마법을 통해 아르카가 잠들어 있을, 천공성에 있는 침실로 가버린 에루나를 배웅한 크리샤네아는, 다시금 보옥을 움켜쥐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걸 어떻게든 해서, 루시아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