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1화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크리샤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봤다. 뭐라고 말을 걸 수도, 차마 말릴 새도 없었다.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는 크리샤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뒤를 돌아봤을 때의 크리샤의 표정이 마치 울상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크리샤에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괜찮으신가요? 이지경님?”
내게 다가온 루시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처는커녕 먼지 하나 묻지 않았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괜찮아. 그것보다...”
내가 아니라 에네스타가 다쳤으면 모를까. 그런 생각이 든 나는 에네스타에게 다가가 물었다.
“에네스타, 몸은 좀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나의 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에네스타를 살펴보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에네스타에게도 별 다른 문제는 없어보였다. 겨우 방향을 튼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덕분에 에네스타에게 크리샤의 마법이 닿지 않았으니까. 충격에 날아온 파편 따위가 머리카락 같은데 붙어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것과 별개의 문제지만 여전히 내게 깍듯하게 대하는 에네스타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여전했다. 이미 엎어진 물이라 그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고민을 하더라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까. 나는 에네스타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파편들을 떼어내며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야할 건 이미 엎어져버린 에네스타의 일보다는 현재 상황이었다. 방금까지 벌벌 떨고 있었던 에네스타가 돌연 태도를 바꾸고, 크리샤에게 검을 뽑아들기까지 했다. 나야 알림을 통해 충성도가 올라서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돌변한 에네스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설명한다고 이게 설명이 될까 싶지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에네스타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돌가루 같은 것을 떼어내고 있자니 얼굴을 붉힌 에네스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건 제가 하면 되니까...”
“아, 그것도 그렇네.”
손을 다친 것도 아니니까 굳이 내가 떼어내 줄 필요는 없었다. 에네스타의 말에 손을 떼자 묘한 표정을 짓는 에네스타가 보였다. 마치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바로 그만둘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거면 말을 말던가.
그런 에네스타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얼굴을 붉힌 에네스타가 주섬주섬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돌가루들을 떼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내 귀에 카르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난리가 났네에. 천공성이야 알아서 복구되기는 하겠지마안... 루시아, 설마 일부로 이런 일을 꾸민 건 아니지?”
“카르네, 당신은 이게 제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설마아, 그저 혹시나 싶어서 그런 거니까아? 어쨌거나, 저 엘프는 네 가디언이었잖아?”
“에네스타가 제 가디언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뭐어, 너라면 굳이 이런 짓을 꾸밀 필요도 없기는 하겠지마안.”
그리고 내 생각했던 대로, 에네스타의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들의 눈에도 에네스타의 일이 이상하게 보였으리라. 나도 이상하게 보이는 걸 그녀들이라고 어련할까. 그녀들의 눈에 비친 에네스타가 어떻게 보였을지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갔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그녀들의 관심은 에네스타에서 금방 크리샤로 넘어갔다.
“그것도 그거지만~? 크리샤 녀석, 점점 심해지지 않아~? 그래도 전에는 아무리 불만이라도 저렇게 대놓고 난동을 부리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응, 크리샤. 엄청 무서웠어! 평소라면 조금 놀려도 짜증만 냈는데.”
“괜찮아, 아샤 언니! 아샤 언니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에~? 반대 아니야? 아냐는 내가 지켜줄 거라고! 내가 언니니까!”
“에, 나보다 약하면서.”
조금 졸린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아르카나 꺄꺄 거리면서 서로 자기가 지켜준다면서 떠들기 시작하는 아샤나 아냐도 있었지만, 결국 그녀들이 우려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는 있었다.
“...다음, 인간이 가는 곳은 크리샤의 영지. ...이대로 둬도 괜찮아?”
샤르가 나지막하게 꺼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루시아에게 모였으니까.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죠. 우선 정리부터 해둘까요.”
스윽, 하고 나를 쳐다본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난장판이 된 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정리됐다고는 했지만, 부서진 돌가루나 가구들이 사라졌을 뿐, 휑하니 뚫려있는 구멍은 그대로였지만.
아무튼 루시아의 말에 조금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루시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러시던지, 하는 태도로 방금 전의 일로 다시 입을 열지는 않은 덕분이었다.
나도 갑자기 돌변하는 이 상황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서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에네스타의 일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크리샤의 이야기로 빠졌으니 말이다. 일단 루시아의 말대로 그건 나중으로 미룬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저기, 혹시 다들 인간을 싫어하는 거야?”
몇 번인가 생각은 했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던 그걸 입 밖으로 내자 모두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
괜히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 걸.
“...이지경님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지만, 적어도 저는 아니에요.”
“나도, 싫어하지는 않아~ 애당초 관심이 없지만~?”
“나아는 조금 싫어하는 편이려나아. 일단, 시도 때도 없이 영지로 기어들어오니까 말이지”
“...생각해본 적 없어. ...그러니까 싫지도 좋지도 않아.”
“으응? 나는 싫어하지 않아!”
“아냐도 싫어하지 않아!”
내 말에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그녀들을 바라봤다. 죄다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생각이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영지였다.
나도 여기에 소환되고 나서 마냥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에루나에게 묻고 들은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지들에 대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우선 얼마 전, 아니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머무르고 있었던 요정향이 있는 땅. 파라노아의 경우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땅과 꽤 떨어져 있었다. 아주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타고서도 수십 일은 걸리는데다가 그 중간에는 커다란 숲이 있었다.
커다란 숲이라고 해봤자 아르카의 영지인 브란시아의 절반도 채 되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요정향이 위치하고 있기도 한 이 숲을 경계로, 파라모아의 영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전에 요정향에서 잡아들였던 노예 사냥꾼들도, 따지고 보면 파라모아의 초입, 숲을 얼마 들어온 것도 아닌 셈인 거다.
아르카의 영지인 브란시아는 인간들에게는 마경으로 분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렇게 커다란 숲이니까 마경이라고 부를 만도 했다. 거기에 조금 떨어져있더라도 오지 못할 정도는 아닌 파라모아에 비한다면 브란시아는 아예 갈 엄두도 못내는 땅이었다. 인간들의 나라가 수어 개는 자리잡을만한 거대한 숲으로 이루어진 브란시아는, 인간들이 아닌 수많은 종족들이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거기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종족들과 몬스터들이 애초부터 인간들이 침범도 못하게 하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카르네의 영지인 듀락시아는 바로 인근에 여러 왕국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카르네의 영지를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왕국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카르네의 영지인 듀락시아에는 화산들이 잔뜩 있기는 했지만, 그 때문인지 비옥한 땅들이 넓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지형도 험난하지 않고, 대부분이 평야였다. 몬스터도 다른 영지에 비한다면 무척이나 적은 편이었다.
시도 때도 인간들이 넘어와서 싫어하는 편이라는 카르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도 인간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탐욕적인 동물이다. 멀쩡한 땅이 놀고 있는 것이 보이면 욕심이 났을 게 분명하다. 드래곤의 땅인 것을 알고 있더라도, 욕심에 넘나들었던 인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아샤와 아냐의 영지인 아드리아는 바다 그 자체로, 인간이 어떻게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다가 작은 섬이 몇 개 있기야 했지만 대부분이 화산 활동으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섬에 불과해서 사람이 살만한 곳은 되지 못했다. 예전의 이야기지만, 나를 보고서 인간은 처음 본다고 얘기했던 아샤와 아냐의 말은, 말 그대로 인간 자체를 처음 봐서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리라.
샤르의 영지 역시 아샤와 아냐의 영지인 아드리아와 비슷했다. 바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샤르의 영지는 기후가 무척이나 험악했다. 추위는 둘째 치고 눈이 펑펑 쏟아져대는 통에 다른 종족은 몰라도 인간이 살아가기엔 조금 그런 땅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눈들이 수만 년이 넘는 세월을 걸쳐 쌓여져, 거대한 산들을 이루고 있는 땅이었다. 덕분에 살고 있는 종족들도 소수에다가 많지도 않았다.
이렇게 그녀들의 영지들과, 인간들에게 갖고 있는 감정들을 따지고 보니까 뭔가 보이는 게 있었다.
톡까놓고 말해서, 인간들이랑 자주 접점이 있는 카르네는 인간을 내 앞에서도 싫어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아르카와 아샤, 아냐 그리고 샤르의 경우에는 무관심이나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까 크리샤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그야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 그 바로 옆에 거대한 인간들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이름을 듣기도 했고, 하물며 그 나라의 검술까지 익혔으니까 알 수 밖에 없었다.
라이어스 제국. 그 땅의 바로 옆에 접경하고 있는 땅이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였다.
“...아니, 그래도 크리샤는 너무 싫어하는 것 같은데.”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크리샤는 유달리 인간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게 분명한데...
“그건...”
내 딴에는 작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들렸나보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루시아가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혹시 그거 때문인가~?”
“그거라니이? 아, 그거어?”
“응? 뭔데, 무슨 이야긴데?”
“언니, 그때 일을 말하는 거야.”
“그때가 언젠데?”
“...30년 전에 있었던 일.”
“아, 그거...”
뭔가 나 빼고서 전부 아는 이야기가 있었나보다. 샤르의 말에 아샤마저도 꾹 입을 다물자 순식간에 조용해져버렸다.
“그 이야기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입을 다문 여섯 명의 드래곤들을 대신하듯이, 에루나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30년 전, 아직 아가씨들이 어렸을 적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