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7화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잠깐 고민해봤지만 사실 고민해볼 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거진 한 시간이 넘도록 논의하고 있던 것은 내게 편린이라는 힘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봉인해야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봉인해야하나 같은 이야기들이었으니까.
애당초 그녀들이 이야기하고 있던 것의 대명제 자체가 내게 편린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에서 이뤄지는 이야기였다. 내가 편린이 없다면 굳이 논의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결심한 이상 가만히 있는 것도 뭐했다. 훌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대충 구겨진 옷을 털어내고 고쳐 입고는 한창 논의로 열이 오르고 있는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저기, 루시아?”
“네, 이지경님. 무슨 일이신가요?”
이야기를 하고 있던 루시아에게 갑작스레 말을 걸었는데도 루시아는 곧장 그렇게 대답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입을 열려던 샤르도, 내가 다가오자 불편한 기색이던 크리샤도. 일단은 내가 말을 걸어오자 뭔데,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부담스럽다.
지금은 제법 나아졌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못하는 편이었다. 오랫동안 방구석에만 있다 보니까 사교를 담당하는 어딘가가 퇴화한 모양이라서.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지금이 그 때고.
“일단... 내가 확인해봤는데 전이랑 별다를 바 없었거든? 정말로 내게 편린이라는게 있는 게 맞아?”
내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던 루시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루시아를 제외한 나머지는 죄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 루시아나 에루나를 제외하면 내가 나를 포함해서, 상태창이나 정보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에오시스 자매나 로로 같이 낙스에서 온 아이들의 앞에서도 정보창을 본 적이 있었지만, 애당초 정보창은 내 눈에만 보이는데다가 그녀들은 그걸 어떤 의식 비슷한 걸로 의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즉, 정보창에 대해서 아는 것은 루시아와 에루나뿐이라는 거였다.
아무튼 루시아만은 내가 한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알아차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루시아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우연의 결과였다고... 이지경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글쎄다.”
우연이고 뭐고 아는 게 없으니 확답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게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걸 말해줄 수 있을 뿐이지. 아무 변화도 없다고는 하기엔 그렇지만, 일단은 한 쪽 눈이 맛탱이가 가버렸으니까. 그래도 그것과 예의 편린이라는 것이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는 몰랐다. 내가 알 수 있는거라고는 상태창을 통해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어찌됐던 상태창에서 특별히 무슨 특성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EX라는 처음 보는 랭크의 기능인 주시자의 눈이 있었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죠.”
그런 내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드래곤들에게 말했다.
“불확정인 사항이 많이 남아있지만, 결국 이지경님이 저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인 것은 변하지 않아요. 편린이라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나, 확실치 않은 일로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겠죠. 우선 상황을 지켜보는 걸로 할까요. 만약을 대비해서, 각각, 특정한 조건이 되면 곧장 이지경님 앞에 소환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고...”
“...하아? 이야기가 다르지 않아?”
루시아의 말을 크리샤가 자르며 딴죽을 걸었다.
“...무슨 말인가요? 크리샤.”
“무슨 말이라니. 그새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루시아? 인간과 어울리다보니까 머리마저 인간처럼 됐냐는 말이지. 우리가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건데? 전부 네가 부른 거잖아. 저 인간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고, 하도 수선을 떨어서 다들 하던 일도 관두고 여기에 왔단 말이지?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방금까지 그렇게까지 이야기해놓고 갑자기 두고 보자고? 돌았어? 일이 생겼는데 해결도 안하고서 냅두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면, 네 말대로 확실치 않으니까 일이 터지는지 아닌지 두고 보자고?”
나야 저 인간이 죽던 말던 상관없지만, 하고 중얼거리는 크리샤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너무했다. 상처받을지도 모른다고. 진짜.
하지만 크리샤의 말대로였다. 애초에 루시아가 여기까지 그녀들을 부른 이유가, 그 편린이라는 것 때문이었다면. 내 말 한 마디에 갑작스레 의견을 바꾸자는 루시아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게 당연했다.
내 능력에 대해, 정보창과 상태창에 대해 알고 있는 루시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를게 분명하니까.
“그건...”
크리샤의 말에 말문이 막힌 루시아가 힐끗하고 나를 바라봤다. 루시아에게도 이야기했던 거지만, 나는 되도록 내가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미 루시아와 에루나는 알고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직접 밝힌 거였다. 그리고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루시아와 에루나 역시, 나에게 남에게 내가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 좋다고 이야기 했었고.
갑작스레 자신의 의견이 바뀐 이유가, 전부 나한테 있고 그걸 설명하자면 내가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하니까, 마음에 걸린 거겠지. 그런 루시아를 보고서, 나는 크리샤에게 말했다.
“그건 내가 설명해줄게.”
“...지금, 내가 루시아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 보이지 않는 거야? 눈이라도 멀었나보지? 뭐하면 내가 치유 마법이라도 걸어줄까?”
직감이 대단한걸.
드래곤이라서 그런가.
순간 찔끔했지만, 크리샤의 말이 그런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말했다.
“내 눈은 말짱하니까 걱정 마. 그래도 걱정해주니 고마운 걸.”
“내, 내가 언제 너 따위를 걱정했다고...! 쓰러졌었다더니 눈이 아니라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네?”
내 말에 버럭, 하고 소리를 내지른 크리샤의 모습에 나는 얼굴에 철판을 두르기로 했다. 뭐 그런 말도 있잖아. 결국 뭐든 받아들이기 마련이라고.
크리샤의 태도를 흔히 게임 속에서 나오던 캐릭터의 그것이라고 여기면 뭐든 것이 편해졌다. 뭐, 흔한 클리셰의 소꿉친구나 그런거라고 생각하면 지금의 한 말도 다르게 들리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방금 전의 말도.
‘걱정되니까 넌 좀 가만히 있으라고! 환자라면 까불지 말고 좀 쉬란 말이야!’ 하고 알아들으면 그만이다.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내가 스스로 생각한 거지만 속이 쓰린데. 정말로 저래줬으면 좋겠다. 상냥함을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첨가해달라고.
아무튼 나는 크리샤의 말에 대답했다.
“내 머리도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일단 내 얘기 좀 들어줘.”
“내가 어째서 그래야하는...”
스윽, 하고 다시 한 번 내게 뭐라고 하려던 크리샤가, 이내 입을 꾸욱하고 다무더니 다시 말했다.
“...좋아! 너무 시간을 끄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빨리 해결하는 게 좋겠지. 그래서 무슨 이야긴데?”
“헤에~? 난 또 날뛸 줄 알았는데. 용케 참았네?”
그리고 그런 크리샤의 옆에서 히죽, 하고 아르카가 그렇게 말했다. 크리샤를 향해 손을 뻗고 있던 걸 보니 또 크리샤가 뭐라고 했으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조치라도 취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뒤에서 대놓고 마력을 풀풀 풍기고 있으니까 당연하지! 전에도 그랬지만, 그때는 단지 방심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또 다시, 그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아르카.”
“하지 않아~ 귀찮고~? 이번에 하려고 했던 건, 또 날뛰면 그대로 푸욱~ 하고 찔러버리려고 했던 거니까~ 그럼 좀 얌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아르카,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으응~? 불가능할 것 같아~?”
부탁이니까 눈앞에서 싸우지 좀 마라. 자꾸 말하려던 게 끊기잖아. 전에 에루나에게 듣기로는 옛날에는 친했다는 모양인데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하기사 어제까지 친했다더라도 오늘 틀어지는 것이 관계라는 것이니까,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하려던 이야기는?”
다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던 내게, 여태껏 잠자코 있던 카르네와 샤르, 아냐와 아샤 중의 한명인 샤르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 잠자코 있던 것은 카르네와 샤르뿐이고 다른 둘은 어느 새인가 내 옆에 와서는 쭉쭉, 하고 내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는 중이긴 하다만.
아무튼 한창 옆에서 아르카와 크리샤가 투덕거리던 와중에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온 샤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할 뻔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일까. 갑작스레 입을 열어온 샤르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금방 그 시선들이 나에게 다시 돌아왔지만.
결국, 샤르가 말한 것은 내가 할 이야기가 뭐냐는 거였으니까 당연했다.
“...어, 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는데, 괜찮으려나?”
먹기 좋도록 입 앞에 떠밀어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시선도 모이고, 어수선하던 것도 단번에 정리된 김에 냉큼 받아먹기로 했다. 그래서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제일 먼저, 내게 물어온 샤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상관없어.”
좋아, 일단 한 명.
“이지경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확정표였던 루시아까지. 이걸로 두 명째.
“...하던가 말던가, 이미 듣기로 했으니까 또 묻지 말라고.”
“되도록이면 짧게 부탁하고 싶은데~? 너무 길면 졸리니까~”
아르카와 크리샤까지 한 번에 두 표를 포함해서 네 명째에 이르자 카르네와 아냐, 아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마안, 루시아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고오? 빨리 얘기 하라고오, 궁금하니까아.”
“나도 인간씨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
“비밀 이야기? 비밀 이야기야? 아샤는 그런 거 엄청 좋아하니까!”
좋아, 만장일치다. 그녀들의 허락을 얻은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처음에 여기 소환됐을 때 알게 됐던 건데...”
잘은 모르겠지만 책 한권은 족히 나올 법한 이야기를 마치자, 반응은 이랬다.
“...어째서 그런걸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건데!”
“이미 이지경님이 이야기 해드렸잖아요? 비밀로 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비미이일?!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알고 있는 건데!”
“그야, 이지경님이 보시기에는 저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하아!?”
일단 다시 싸우기 시작한 용이 두 명.
“아~ 아아아~ 또 싸우네~ 이제 됐어, 이젠 말리기도 귀찮아~”
그 두 명을 방치하기 시작한 용이 또 한 명.
“...중요한 정보, 너무 늦게 알려줬어.”
무표정하게 나를 나무라는 용이 한 명.
“중요한 건가아? 잘 모르겠는데에. 요점은, 그, 상태창인가 뭔가를 봤는데 편린에 대한 게 없었다는 거잖아?”
“저기, 저기~ 내 정보창은 어때? 뭐라고 적혀있어?”
“나도, 나도 알고 싶어! 나는 뭐라고 적혀있어?”
이도저도 아닌, 용이 셋... 아니, 이도저도 아닌 용이 한 명에 나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용이 둘. 즉, 혼돈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돌연 라운드 2로 들어간 크리샤와 루시아에 이제는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하품을 하는 아르카에 내 양팔을 잡아당기면서 정보창을 보라느니 뭐라느니하는 아샤와 아냐에. 그나마 얌전한건 샤르와 카르네뿐이었다.
일단 팔 좀 잡아당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어째서 발동이 안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양팔을 잡고 잡아당기는 아샤와 아냐 덕분에 팔이 뽑혀지는 것 같으니까.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랬었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벌써 까마득하게 옛날로 느껴지는, 막 이곳에 소환됐었던 기억과 지금이 오버랩되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엄청 소란스러웠는데. 그때도 이렇게 마구 잡아당겨졌었고.
이것도 지나가리라.
내 팔이 뜯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그러니까 살살 좀 잡아당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