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4화
순식간에 끝나버린 일. 아니, 순식간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끝나있었던 일을 본 나는 저릿저릿, 아파오는 오른쪽 눈을 짓이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내 팔을 붙들고 있던 에루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놓아줘도 돼.”
“하지만...”
처음에는 제멋대로 움직이던 내 몸을 붙잡기 위해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에루나가, 이제는 내 몸을 지탱하는 모습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옷에도, 내가 토해낸 핏물이 묻어있었다. 세탁하기 엄청 힘들어 보이는 옷인데, 미안한걸.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서, 나는 내 말에도 여전히 나를 부축하고 있는 에루나를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강압적으로. 그러니까, 명령하듯이.
“놓으라고 말했어. 에루나.”
“...알겠습니다. 주인님.”
스윽, 하고 오른팔을 붙들고 있던 에루나가 떨어졌다. 휘청, 하고 몸이 기울어졌지만,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쓰러질 뻔했지만 에루나 말고도 나를 부축하고 있던 에네스타 덕분에 쓰러지지 않은 거였지만. 그래서 이번에는 에네스타를 보며 말했다.
“에네스타, 너도... 이제 괜찮으니까, 놓아줘.”
“...알겠네, 드래곤의 반려.”
에네스타마저 붙잡고 있던 것을 놓자 간신히 몸의 자유를 되찾은 나는, 오른손을 쥐락펴락해봤다. 다행히 아까처럼 제멋대로 날뛰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예 꿈쩍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루시아가 다가오더니, 곧 내 몸을 부척해주며 물었다.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괜찮다고 하기엔 그런데. 루시아, 치유 마법 좀 부탁해도 될까?”
“그럼요. 얼마든지...”
이래서야 혼자서도 움직일 수 없겠다는 생각에 루시아에게 부탁하자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순식간에 영창을 마쳤다. 그러자 루시아의 손에서 푸른빛이 나와 내 몸을 둘렀다.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푸른빛의 마력이, 마치 햇살에 비쳐진 것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응, 한결 몸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편해졌다.
“고마워.”
“아뇨, 그보다... 어째서?”
루시아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물어본 건지는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이 됐냐는 거겠지. 글쎄다. 나도 모르겠다. 제 멋대로 몸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고, 이상한 것까지 눈에 보이고.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일투성이라서, 전혀 모르겠거든. 단지, 하나만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로로.”
눈앞의 소녀를 보며, 이름을 부르자 움찔하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푸른빛이 감도는 눈 안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핏물이 흘러내려 말라버린, 내 눈두덩이를 보니 꼭 호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만 보였으니까. 더듬더듬, 눈가에 묻어있던 핏물을 닦아내고서, 다시 로로의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암살자로 임명하마. 이제부터 너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내 곁에서, 나를 지켜라.”
“......”
침묵.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여전히 나를 두려워하는 모습에 속이 쓰렸다. 그런 로로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에게 주어진 부당한 운명은 너의 주인인 내가 거두마.”
스윽, 하고 눈앞에 떠올라있던 로로의 정보창에 손을 뻗었다. 어째선지 이렇게 하면 된다고, 누군가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스으윽, 하고 손가락을 뻗어, 로로의 정보창에 떠올라있던 칭호를, 부덕의 아이라는 이름의 칭호를 덮었다.
파짓!
칭호에 닿은 손가락에서, 마치 불꽃이 튀듯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내 귓가에 띠링하고, 알림이 들려왔다.
[황금률! 선한 자는 선으로, 악한 자는 악으로! ‘로로’가 쌓아온 업보로 인해 황금률의 천칭이 멈춰섭니다.]
개소리였다. 대체 누가 정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귀에 들려온 개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뭐라도 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들려온 말이, 선하고 악하고 정하는 기준이 개만도 못하다는 건 알겠다. 도대체 뭐가 로로가 쌓은 업보라는 걸까. 태어난 것으로, 태어나버린 것만으로 죄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이세계의 법칙이라는 걸까.
나는 우뚝 멈춰선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귓가에 들려온 알림에 저항하듯이.
아니, 저항이 아니었다. 당연한걸, 당연하게 고치는 것을 저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니까. 태어나서, 부덕하다고? 더럽다고? 개소리였다. 그딴 건 개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되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개소리여만 했다. 그런건, 너무 불쌍하잖아. 태어난 것뿐인데,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은 너무 불쌍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적었다. 나는 이미 지나가버린, 이미 마침표를 찍어버린 과거를 어떻게 해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인간일 뿐이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뿐이니까.
그러니까 인간으로써, 나는 적어도 한가지만큼은, 약속할 수 있었다.
미래를.
다시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을 미래를 내가 약속할 수 있었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루시아와 에루나, 그 외에도 나에게 손을 뻗어줄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리 앞에서만큼은,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너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없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해줄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누가 반대하더라도, 내가 해줄 테니까.
파지짓, 하고 손가락 끝에서 튀어대는 불꽃이 강해졌다. 이윽고, 검붉은 불꽃이 손가락의 끝부터 시작해서, 손 전체를 덮어 버렸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띠링~
[계속해서 진행할시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페널티가 부여되고 자시고, 애초에 나는 족쇄 플레이하는걸 엄청 좋아하던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깟 페널티쯤이야 얼마든지 부여해도 상관없으니까, 나라면 얼마든지 지지고 볶아도 좋으니까.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서 알림이 말해오는 경고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띠링~
[황금률! ‘로로’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한 명의 영혼이 플레이어 ‘이지경’님께 부여된 페널티의 일부를 대신 받습니다. ‘로로’에게 황금률의 천칭이 미세하게 기웁니다.]
그런 알림과 함께 프슷, 하고. 정보창에 떠올라있던 로로의 칭호가, 부덕의 아이가 일그러졌다. 글자가 파쇄하듯이, 하나둘 쪼개지기 시작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가신 ‘로로’의 칭호 ‘부덕의 아이’를 소거하였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칭호 ‘부덕의 군주’를 얻었습니다.]
부덕의 군주라, 이름 한번 거창하구만. 일단 벌레보다 못한 자보다는 훨씬 낫게 보이는 건 왤까. 아니, 벌레만도 못한 자가 그만큼 임팩트가 컸던 거에 불과했던 거니까 대단한건 아니지만...
부덕의 아이, 로로를 거둬들여서 군주라는 칭호가 붙은 걸까. 너무한 이야기였다. 제멋대로 이상한걸 붙여놓고서, 누가 떼어내니까 그럼 너도 부덕!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 애도 아니고, 자기가 정한 걸 거절하니까 좀팽이같이 냅다 던져준 걸 받아버린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부덕의 군주라는 칭호를 자세히 살펴봤다.
「이름 : 부덕의 군주」
「등급 : 칭호」
「효과 : 모든 피해를 200%만큼 추가로 받는다. 모든 내성이 30%만큼 감소한다. 작은 일로도 악명이 크게 증가한다. 선성향을 가진 자들에게 배척받는다.」
「설명 : 금기를 저버린 자를 거두고 운명을 바꾼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법칙에 따라 크나큰 저주를 받는다.」
괜히 봤다. 눈만 버린 기분이었다. 아, 이 농담은 이제 하면 안 되겠다. 안 그래도 한쪽 눈이 맛탱이가 가버렸으니까. 여기서 하나 더 맛탱이가 가버리면 완전히 장님이 되는 거다. 역시 그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앞으로 이런 농담은 자제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칭호 한번 작살나는구만. 모든 피해를 두 배 입는다고? 모든 내성이 감소한다고? 악명도 있었어? 배척은 또 뭔데.
로로 때랑은 다르게, 내 칭호라서 상세한 내용도 볼 수 있던 탓에 체감되는 데미지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로로가 가진 부덕의 아이도, 이것만은 못하더라도 비슷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겠지.
...응, 역시 지워버리길 잘했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두 배 정도 아프게 맞는다고 쳐도, 애당초 내겐 아무런 데미지도 들어오지 않는데다가, 내성은 조금 무섭지만, 나는 내 기능인 조화를 믿는다. 악명? 쌓을만한 일을 안 하면 되겠지.
선성향에게 배척받는다는 건 조금 걸리지만... 괜히 입 밖으로 낼만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솔직히 내 주위에 선성향이라고 부를만한 인물은 없어 보이니 괜찮았다. 끽해봐야 에네스타... 아니지, 에네스타 역시 검주. 나이도 나이였으니까 그만큼이나 경험한 것도 많을테지.
그 성격을 보면 선하다고만 할 수 없으니까 역시나 제외.
솔직히 말해서 선하다고, 떡하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할까. 갓난아이라도 태어난 것만으로 부덕의 아이니 뭐니하는 부조리한 것이 떨어지는 곳이 이세계라는 걸 알게 되버리니 이 젊은 나이에 회한이 다 찾아오시겠다.
이런 세계니까, 용사... 그래, 내 기억 속에 있었던 용사. 그, 마왕의 가랑이에 막타를 넣고서 용사로 추앙받던 제임스 같은 녀석이라면 선성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다, 그 녀석도 결국 나중에 공주들이랑 떵떵거리며 지냈으니까 아니려나. 완전 주지육림이던데. 전에 읽었던 라이어스 제국의 역사서에도 이름이 떡하니 새겨져 있었다고. 부인만 열이 넘고 첩만 수십에 딸만 백에 가깝게 낳은 호색왕 제임스하고.
말년에 아내들의 등쌀에 재산이나 권력을 이곳저곳 나눠준 탓에 폭망했다는 모양이지만...
아, 아아아... 귀찮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아니, 귀찮다기보다는 졸렸다.
“...나머지는, 자고 일어나서 할 테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서 까무룩 정신을 잃듯이 잠에 들었다.
“...이지경님.”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기절하듯이 잠에 들은 이지경을 바라보던 루시아네스는, 그런 이지경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에루나. 방금의 그건... 신이 남기고 간, ‘편린’이 확실한가요?”
그리고서 지금의 상황. 그저, 이지경에게 새로운 시녀를 임명시켜줄 뿐인 간단한 이벤트에 불과했던 일에서, 급작스럽게 바뀌어버린 상황에 대해 묻자, 루시아네스의 물음에 에루나 대답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주인님의 오른쪽 눈, 그리고 손... 지금은 없어졌지만, 미약하게나마 ‘편린’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드래곤에게조차도 까마득한 과거. 신들이 드래곤들에게 이세계의 관리와 보존을 명령하고서 떠나가 버린 이래로, 단 한번, 이 세계에 등장했던 것이 편린이었다.
법칙을 고치고, 사물을 바꾸고,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신의 힘을 담아놓은 조각. 이세계를 만들고, 관리했던 신들이 가졌던 힘.
그것과 비교하면 드래곤들이 관리하는 보옥은, 여섯 개가 모두 모여서 고작 해봐야 세계를 관리할 수 있을 뿐인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편린이라면 귀찮게 그런 짓을 할 필요도 없이, 애당초 이세계가 갖고 있는 모순. 법칙에 쓰여진 명제부터 뜯어고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일개 인간이.
하물며,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남자에게서... 느껴졌다는 것 자체가 이변이고, 이상 상황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오류였다.
“...이제와서 돌아온 당신께 미안한 일이지만.”
“아닙니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부탁할게요. 에루나.”
이 상황이, 이지경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기만을 기도하면서, 루시아네스는 품에 안긴채, 아무것도 모르는 양, 아니,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지경을 바라봤다.
《천검의 주인. 아리스》
“......”
스으윽, 하고. 온통 새하얗게 물들은 거대한 방. 아니, 신전이라고 부를만한 곳에서 기도를 드리듯이, 손을 포개고 눈을 감고 있던 알몸의 소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리스님...?”
그리고 그 곁에 지키고 있던 시녀가, 소녀의 알몸을 가리기 위해서 가져온 비단으로 된 천을 그녀의 몸에 덮다가, 이내 경악했다.
투둑, 하고 반개한 소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계시가... 계시가 내렸어요.”
“...계시라고요?”
시녀가 되물었지만, 아리스라고 불린 소녀는 대답 대신에, 자신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을 훔쳤다.
소녀의 이름은 아리스.
과거, 라이어스 제국의 왕이 되었던 용사. 제임스와 여섯 번째 공주였던 프레야 사이에서 나온 일곱째의 공주. 그녀가 분가한 가문, 드네아 공작 가문의 공녀였다.
과거에는.
지금은, 천검의 주인으로써. 라이어스 제국이 보유한 열 명의 검주 중의 하나였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하나의 별명이 있었다.
성검, 아리스.
아리스가 열 넷이라는 터무니없는 나이에 검주가 된 날. 신전에서 계시가 내렸다. 그녀에게 신전에서 모시고 있던 보검, 천검을 내리라는 계시가.
그리고 그 계시를 받들어,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서 천검의 주인이 된 소녀, 아리스. 아니... 나이로만 따지면 이미 소녀라고 부르기엔 힘든 나이가 되도록, 아리스는 오직 신께 기도만을 드리며 지내왔었다.
그렇기에 성검이라고 불렸다.
검주이면서도, 제국을 위해 싸우거나, 몬스터를 토벌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고, 오직 기도만을 드리는 그녀를 보고서, 마치 신전에 보관된 검이나 마찬가지라고. 조롱을 담아서 그렇게 불렀다.
그럼에도 성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녀가 성스럽다고 여겨질 만큼 빼어나게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검도 검이지만, 저건 성검이 따로 없군, 하고 누군가가 이야기했던 것이 그대로 별명이 된 것이었다.
그런 아리스가, 예정되있던 기도의 도중에 몸을 일으킨 것도 모잘라서, 계시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입에 담자 시녀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열 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전에 끌려와서, 십년이 넘는 세월을 기도만 하며 지내다가 드디어 머리가 어떻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