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50화
스스스슥, 루시아의 영창이 끝나자 푸른빛의 마력을 휘감으며 나타난 에루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왜 이렀습니까?”
오자마자 에루나가 꺼낸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루시아는 뭐가 그렇게 더운지 부채질을 하고 있고, 에네스타는 나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고, 에오시스 자매들은 여전히 귀를 새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까.
“주인님?”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부르는 에루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 역시 못 본척, 못들은 척 했다. 그러니까 나 보지 마라, 묻지도 말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언령이라는 법칙, 다른 세계에서 소환된 내가 딱히 말을 익힌 것도 아닌데도 이 세계의 사람과 아무렇지도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걸 지금 막 알게 된 참이니까.
딱히 대단한 문제점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언어에서 없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그와 비슷하거나, 그 언어의 본래 의미 그대로 들린다는, 이른바 번역기에서도 흔히 나타나고는 하는 의역의 문제였다. 거기까지는 정말로 대단한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나빴다. 나는 나름 칭찬할 생각으로 했던 말이었는데. 그게 그렇고 그런 말로 번역되어 귀에 들릴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러니까 묻지 마라. 안 그래도 뜬금없이 종아리를 걷어차인 기분이니까.
“흐음...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일이 재밌게 됐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숨기려고 들어도, 에루나에게 숨기는 건 무리라는 것이 두 번째 문제였지만. 나를 빤히 들여다보던 에루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의뭉스런 미소를 짓더니 옷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에루나 투아레, 지금 막 주인님께 돌아와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런 에루나의 말을 시작으로, 그녀의 뒤에서, 에루나보다 조금 늦게 소환을 마친 낙시안들이 거의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바쿠가 주인님께 인사드립니다!”
“바록이 주인님께 인사드립니다!”
“니아가...”
쩌렁쩌렁, 공동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로 연이은 인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루나의 옆에 있던 소녀가 못마땅한 얼굴로 서있다가 에루나의 눈짓에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로로가 주인님께 인사드립니다.”
에루나는 제외하더라도,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여섯 명의 낙시안들의 인사를 받은 나는, 이것까지 무시하기엔 좋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계획이었던, 최대한 위엄 있는 태도를 보이고자 했던 생각은 이미 저편으로 날아간 뒤긴 했지만.
“내 이름은 이지경, 아니 베헤노스라고 한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아직 베헤노스라는 이름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대외적으로 알릴만한 이름은 루시아가 지어준 베헤노스라는 이름이었다. 내 본명인 이지경은 여기에서는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무니까.
덕분에 조금 이상해진 내 자기소개에도 알겠습니다, 하고 제각각 대답하는 낙시안들을 보다가, 에루나에게 다가갔다.
“조금 늦었지만, 에루나 너도 수고 많았어.”
“주인님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전혀 수고스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했지만, 낙스라는 곳에서 고생했을 게 뻔한 에루나의 말에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음, 아무리 생각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한심하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줄 테니까 말만 해.”
그렇다면 몸으로 떼워야지. 그런 생각으로 말했다가, 에루나와 눈이 마주쳤다가 아차 싶었다. 뭐든 해준다고 하면 안됐었다.
“뭐든... 입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생각 좀 해보고.”
뒤늦게 조건을 달았지만. 덕분에 조금 꼴사나워져버렸다. 그래도 에루나에게 뭐든 해준다고 한다는 말만큼 위험한건 없으니까 별 수 없었다. 괜히 말 한 번 잘 못했다가 피보는건 나일게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저를 시녀장으로 임명해주시겠습니까?”
“시녀장...?”
“예, 본래대로라면 주인님의 곁에 있을 존재는 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벌써 주인님께 붙은 시녀가... 제가 없는 사이에 많이 늘은 듯싶기에.”
빤히, 에오시스 자매를 바라보며 말하는 에루나의 말에 조금 난감한 얼굴로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루시아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줬다. 에루나를 시녀장으로 임명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리라. 애당초 에오시스 자매는 루이사의 명령으로 내 시중을 들고 있던 거지, 내 시녀라고 하기엔 그랬으니까, 루시아의 허락을 받는 것이 맞았다.
“그래, 좋아.”
루시아에게도 허락을 받았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에루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앞으로도 주인님을 모시는 시녀들의 장으로써 성심성의껏 종사하겠습니다.”
호칭정도야 어떻던 별로 중요해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띠링~
[플레이어와의 ‘관계창’에 새로운 관계도가 추가되었습니다!]
띠링~
[새로운 관계 ‘가신’이 추가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이지경’님께 충성을 바치는 ‘에루나 투아레’가 새로운 관계로 성립됩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현재 영향력을 계산하겠습니다. 영향력은 지력과 매력을 포함한 능력치에 의해 결정됩니다. 현재 영향력은 11입니다. 새로운 가신을 11명까지 추가하실 수 있습니다.]
띠링~
[‘에루나 투아레’가 시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띠링~
[‘에루나 투아레’가 새로운 직업 ‘시녀장’을 습득하였습니다. 직업 ‘시녀장’은 주인이 된 자를 곁에서 보필하는 역할을 합니다. 직업 ‘시녀장’의 효과로 인해 ‘에루나 투아레’의 영향력이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50%만큼 포함됩니다. 현재 ‘에루나 투아레’의 영향력은 19입니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영향력에 9만큼 추가됩니다.]
띠링~
[새로운 가신을 19명까지 추가하실 수 있습니다.]
“어, 어어...”
머릿속에서 울려온 알림에 조금 당황했다. 내가 당황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것과 비슷한 시스템이 라이프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클랜 시스템이었다. 일정 호감도를 쌓아서 일행에 합류한 이들을 보통 파티라고 불렀고, 이런 이들과 플레이어 사이에서는 새로운 관계도, 신뢰가 형성되고는 했다. 이 신뢰가 일정수치 이상 쌓인 이들이 일정 수만큼 모였을 때 만들 수 있는 것이 조직, 즉 클랜 시스템이었다.
그것과 이름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똑 닮은 시스템이 나타나자 나도 모르게 당황해버렸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닮았을 뿐이라면 문제가 되질 않는 것이다. 문제는 그 내용물까지 똑같을 경우였다.
클랜 시스템은 애당초 라이프라는 게임의 특성상 발현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조차 힘든 시스템이었다. 플레이어 혼자서도 살아남기 버거운 곳에서 여러 npc까지 조종해가며 플레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이 조직 시스템에는 한 가지 메리트가 있었다.
내가 당황한 이유가 이 메리트 때문이었다. 이거 하나만 보고서, 클랜 시스템을 개방하려고 난리를 치기엔 그랬지만, 발현만 된다면 엄청나게 좋아서 게임이 눈에 띄게 쉬워져버린다는 단점도 달고 있는 시스템이 클랜 시스템이었으니까.
덕분에 내가 라이프라는 게임을 했었을 때는, 일부로 이 시스템을 해제하고 했었는데... 그것과 똑같은 것이, 가신이라는 이름으로만 바뀌어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단지 닮았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내 귀에, 에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바쿠, 바록, 로로, 마야, 니아, 슈슈. 저희의 주인님께 충성의 맹세를.”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앞서 무릎을 굽히며 그렇게 말하는 에루나를 따라서, 낙시안들이 하나둘 무릎을 굽히더니, 가장 덩치가 큰 사내, 바쿠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부터 말했다.
“바쿠가, 충성을 맹세합니다. 앞으로 저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띠링~
[‘바쿠’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바쿠’의 ‘정보창’에 충성도가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께 충성을 바치는 ‘바쿠’가 새로운 관계로 성립됩니다.]
띠링~
[‘바쿠’의 능력치에 의해 다음과 같은 직별로 임명하실 수 있습니다. 기사장, 집사장, 기사, 집사, 시종장, 시종. 임명한 직별에 따라 ‘바쿠’의 능력치에 일부 보정이 발생합니다.]
땡, 내용물도 완전히 똑같았다. 귓가에 울린 알림에 멍하니 있는 내 곁에 다가온 에루나가 말했다.
“바쿠는 비록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만, 힘만큼은 쓸 만하니 주인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시종으로써는 아직 교육이 모자랍니다만... 제가 빠른 시일 내에 교육을 마쳐두겠습니다.”
“아, 그래...”
일단 계속 당황해하기도 그랬다. 빠르게 진정한 나는 바쿠를 바라봤다. 힘은 확실히 좋아 보였다, 허벅지의 근육이 과장을 조금 보태서 내 허리만하니까. 그런 바쿠가 에루나의 입에서 교육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뭔가 초자연 현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될 뿐.
“...그럼, 앞으로 바쿠, 너는 내 시종을 맡도록.”
아주 약간, 고민을 했지만 이미 얻어버린 뒤였다. 이것도 결국 내 힘인 셈이었다. 생각을 마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예상대로 귓가에 알림들이 봇물이 터진 듯이 들려왔다.
띠링~
[‘바쿠’가 시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띠링~
[‘바쿠'가 새로운 직업 ‘시종’을 습득하였습니다. 직업 ‘시종’은 주인이 된 자의 손과 발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직업 ‘시종’의 효과로 인해 ‘바쿠’의 기능 일부를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띠링~
[‘바쿠’의 기능 ‘투귀화’를 습득하셨습니다. ‘투귀화’는 바쿠의 충성심에 따라 현재 모든 효과의 30%만큼 발휘합니다.]
「이름 : 투귀화」
「등급 : 전문(B)」
「효과 : 짧은 시간동안 신체능력을 극도로 상승시킵니다. 또한 기능이 효과를 발휘하는 동안 받은 피해로 인한 상태이상을 모두 무시합니다. 효과가 발휘하는 동안 지구력이 0이 되더라도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효과가 종료될 시에 현재 생명력의 90%가 소모됩니다.
「설명 : 근력, 민첩, 체력을 10분간 60%만큼 상승합니다. 지속시간동안 가해지는 모든 신체적 상태이상을 무시합니다. 지속시간동안 지구력이 0이 되더라도 생명력을 소모하는 대신에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바쿠를 시종으로 삼으면서 얻게 된 기능은 10분동안이지만 근력, 민첩, 체력이 무려 60%나 상승한다는 효과를 가진 기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상태이상 무시에 지구력이 0이 되더라도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다는 효과까지 달려있는 어마어마한 기능이었다. 대신 지속시간이 끝나자마자 생명력의 90%가 감소된다고 하지만...
내가 얻게 된 기능, 투귀화가 바쿠가 갖고 있는 투기화의 효과의 겨우 30%인걸 생각하면... 원래 투귀화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건지 모르겠다. 능력치의 상승폭이 훨씬 더 좋다거나, 디메리트인 생명력 감소가 줄어드는 정도겠지만.
띠링~
[새로운 가신을 18명까지 추가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 귓가에, 바쿠에게 뒤질세라 맹세의 말을 내뱉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