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49화 (49/370)



〈 49화 〉49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시간이 가는 게 정말로 빨라서, 도중에 루시아가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면 오늘이 에루나가 오는 날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건 어디까지나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물론  알고 있었다. 덕분에 이러고 있으니까.


“어디보자... 뭐가 좋으려나.”

하나 둘 늘기 시작하더니 이젠 옷장에 가득해진 옷들을 보며 고민 끝에 금빛의 용이 수놓아진 옷을 꺼내들었다. 이게 진짜 금으로 뽑아낸 실로 수놓은 거라고 들었을 때 놀랐었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은 그런 감각이 맛탱이가 갔는지 그저 마음에 드는  중 하나에 불과해져버렸지만 말이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보다.

참고로 이 용 무늬는 루시아의 본신을 본떠서 만든 무늬라고 들었었다. 드래곤, 용, 그렇게들 말해서 뱀이나 커다란 도마뱀 같은 걸 어렴풋이 상상했었는데, 뭐랄까 봉황이나 주작같이 오히려 새에 가까운 모습이라서 신기했다.

뭐, 그건 루시아의 종족인 드래곤, 그 중에서도 금색용의 특징이라니까 모두가 그런건 아니겠지만...


“옷은 일단 이걸로 됐고...”

장신구도 필요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루시아에게 선물 받았던 장신구들이 담겨있는 수납장을 열어봤다.


“...응, 이번에는 관두자.”

이렇게 요란한  도저히 착용하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핑크발랄에 툭 튀어나왔던 옷도 입어보긴 했지만, 이건 무리였다.

요란하다고는 했지만 흔히 게임 속에서나 볼법한 장신구들처럼 생긴 거에 불과했다. 문제는 게임 속에서나 볼법한 것들이 떡하니 있다는 거지.

가시 같은 것이 잔뜩 나있는 팔찌라던가,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를 거슬이 잔뜩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게 루시아가 나름 알아보고서 선물해준 것들이라는 거였다. 즉, 인간들 사이에선 이런 게 유행이라는 거였다.


뭘까, 이 세계의 인간들은 단체로 중2병이라도 걸린 걸까. 아니, 중2병도 핑크발랄한 옷은 입지 않을 테니까 다른 무언가인가. 언젠가 인간들의 나라에 갔다가 컬쳐쇼크라도 받는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물론, 당분간은 그럴 일도 없겠지만.

“좋아, 이걸로 충분하겠지.”

그렇게 한참이나 결정을 거듭한 끝에 고르고 고른 것들로 갈아입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나랑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옷차림이었지만, 아주 요란하다고 할 정도로 화려하진 않았다.

딱, 굉장하다는 느낌만 들 뿐. 이정도가 딱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됐다. 이것만해도 어딘가의 왕이라도 되는 것 같긴 했지만.

“나타, 모네, 에샤. 안으로 들어오도록.”


대충 준비를 마치고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오시스 자매들을 부르자 스윽, 하고 조용히 문을 열며 세 명의 엘프 소녀들이 들어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숙여 보인 셋이 손에 들고 있는 분과 붓 비스무리하게 생긴 것들로,  얼굴에 무언가를 처덕처덕 펴바르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향유와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분을 섞어 만든 거라고 에루나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쉽게 말해서 화장품이었다. 여성용이랑은 다르게 미백 효과를 제외하면 별다른 것도 없지만.

아무튼, 평소라면 잘 입지도 않는 옷도 꺼내 입고 화장도 하고, 이렇게까지 단장을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에루나가 오늘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에루나 혼자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에루나와 같이 내가 고른 아이들과 더불어 내게 투기를 가르치기로  있는 낙시안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루시아의 말로는 위엄 있는 첫인상이라는게 필요하다고해서 이러는 거였다. 아무래도 나랑은 위엄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해서 나쁠 건 없다니까 해야겠지.


“그러고 보니 에네스타는?”

금빛으로 빛나는 반지나 팔찌 같은 것도 가져와서 내 손가락이랑 팔목에 끼고 있던 나타에게 그렇게 묻자, 나타는 손을 움직이는 와중에 대답했다.

“검주 에네스타는 먼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옷을 고르고 있는 동안 먼저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나타의 대답을 들은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샤의 시선에 고개를 처들었다. 그러자 에샤가 들고 있던 붓으로 목 부분까지 허옇게 칠하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지만, 진지하게 붓을 놀리는 에샤를 보며 간신히 참아냈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베헤노스님.”


“아, 그래. 고맙다.”

그렇게 몇 십 분이 지났을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이게 난가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는 어딘가의 왕을 코스프레한 서민이 있었는데, 거울에 비쳐 보이는 지금의 내 모습은 코스프레가 아니라 진짜 어딘가의 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옷이랑 화장이 최고다. 옷을 조금 바꾸고 화장을 한 것뿐인데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에네스타는 물론이고, 루시아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나는 최대한 지금의 모습과 어울리는 태도로, 그러니까 근엄한 느낌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안내를 부탁하마.”

“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방을 나서서, 루시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그러니까, 처음 내가 요정향에 도착했었던 곳. 커다란 공동으로 향하고 있자 에네스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에네스타도 나를 본 모양인지 다가와 말했다.


“오셨구려, 드래곤의 반려.”

“...어,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한 것은, 평소랑은 전혀 다른 에네스타의 모습 때문이었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몸에 걸치고, 허리까지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뒤로 땋아 넘긴 에네스타의 모습을 보니, 어디를 봐도 기사라고 할 만한 모습이었다. 에네스타라고 알아볼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투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기에서 얼굴을 가리는 투구까지 썼으면 에네스타였는지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언제나 두들겨 패면서 검술을 가르쳐주던 에네스타의 처음 보는 모습에 놀라고 있자 그런 나를 보며 에네스타가 말했다.

“고생이라고  만한 일도 아니니 걱정 마시게. 그나저나... 제법 어울리는 구려.”

칭찬인가?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니,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에네스타의 말에 아리송했다. 분명 말은 칭찬인데, 칭찬을 들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는 에네스타도 아주  어울리는걸.”

“나야 뭐, 이런 차림이 익숙하니 말일세.”

그건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에네스타가 말했다.

“이런, 루시아네스님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지. 어서 가세나, 드래곤의 반려.”

“어? 어어...”


그대로  손을 붙잡고 잡아끄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당황해서 옆에 있던 에오시스 자매들을 바라봤지만, 나만 빼고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에네스타는 카에네스의 누나, 즉 에오시스 자매의 고모였었다. 에네스타가 저러는 것도, 그녀들은 이미 익숙해진 일이라는 거겠지. 그래도 나도 체면이 있... 나?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으니까, 그냥 분위기에 맞추기로 했다.


평소 에네스타를 대하던 것과는 다르게, 근엄한 체 하며 내 손을 붙잡은 에네스타에게 말했다.

“그럼, 검주 에네스타. 이 몸의 보필을 허락하지.”


“아? 아하하, 알겠네. 오늘은 그대의 스승보다는 호위기사로써 움직이는 것이니. 나만 믿게나, 낙스에서 왔던 어디에서 왔던 간에, 드래곤의 반려에게 상처를 입히게 두지 않을 테니.”

호위기사라는 말은 처음 듣는데. 아니, 그래서 저런 차림이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에네스타에게 끌려가듯이 걸음을 옮기던 나는 생각했다.


왠지 기사한테 에스코트되는 공주님이 된 기분인데, 내 착각이겠지?


“미안, 오래 기다렸지?”


공동에 도착하자 보인 루시아에게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자, 나를 보고있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지경님이셨군요. 한순간 몰라볼 뻔 했어요. 잘 어울리시네요.”


 마음 이해한다. 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진짜 나인지 의심스러웠으니까. 그렇지만 잘 어울린다는 말은 동의하기 힘든데. 잘 어울리는거 맞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에네스타가 몇 번이나 내 얼굴을 보고 웃었거든?


처음에는 다들  어울린다고해서 진짜로 그런가 싶었는데, 여기 오는 동안 에네스타의 반응을 보고서 한줌 생겼던 믿음이 완전 박살난 이후거든?


그리고, 잘 어울린다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눈에 비쳐 보이고 있는 루시아의 모습을 말하는 걸테고.


나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루시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루시아도 엄청  어울려. 평소보다 훨씬 아름다운걸.”


“어머? 그럼 평소에는 아름답지 않다는 뜻인가요?”

가볍게 돌아온 잽에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평소에도 아름답기는 했지만. 오늘은 엄청 섹시하달까.”

“...섹시라고요?”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루시아를 보고서 내가 무슨 말을 잘  했나 싶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얼굴이 붉어지는 루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띠링~


['루시아네스 파라모아'의 호감도가 1만큼 상승했습니다!]

...왜지? 평소라면 엄청 듣기 힘든,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알림에 의아해하고 있자니, 그런 나를 보던 루시아가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고는 말했다.

“그럼, 이지경님도 오셨으니까. 슬슬 소환할게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말을 돌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 태도로, 손을 뻗으며 주문을 읊기 시작하는 루시아를 보고서, 나는 옆에 있던 에네스타와 에오시스 자매들을 봤다.

“...에네스타, 넌 또 왜 그러는 건데?”

에네스타는 그런 나를 보더니, 척하고 엄지를 내밀어보였고 에오시스 자매들은 차마 눈도  마주치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두, 귀가 엄청 시뻘겠다.

내가 뭔가 잘  말했다는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못한 건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 나를 보던 에네스타가, 척하고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말했다.

“이야, 루시아네스님과 드래곤의 반려의 금슬이 좋으니 정말로 부럽구려.”

“금슬이 좋다니...? 대체 뭐가?”


“방금 드래곤의 반려가 말했잖은가?”


내가 뭘, 내가 말한거라고는 루시아를 보고서 섹시하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러다가, 머릿속에 문득 든 생각에 나는 혹시나 싶어서 에네스타에게 말했다.

“저기, 에네스타. 묻고 싶은게 있는데. 섹시, 라고 하면 뭐라고 들려?”

“음? 뭐라고 들리냐니, 그야 당연히...”

에네스타의 대답을 들은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계에도 번역 오류라는 게 있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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