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8화
에루나의 말에 무심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귓가에 띠링하고 이제는 익숙해진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상태이상 ‘혼란’에 빠졌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기능 ‘조화’가 이에 대응합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상태이상 ‘혼란’에 저항합니다. 일정시간동안 상태이상 ‘혼란’에 면역상태가 됩니다.]
귓가에 들려온 알림에 기분이 묘해졌다. 상태이상이라니. 상태이상이라고 불릴 만큼, 내가 받은 충격이 꽤 컸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조금 골치가 아팠을 뿐이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응,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혼란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었다.
“이지경님?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변명하다가 루시아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런 루시아의 눈동자에 비친 썩 좋아보이지 않는 안색의 내가 보였다. 응, 미안. 조금 허세를 부린 모양이다. 아무튼 이젠 괜찮아졌으니까 상관없지만. 그래도 괜한 걱정을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응, 이제 괜찮아. 일단... 에루나,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우선 루시아에게 괜찮다고 말하고서, 에루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자 에루나는 여느 때처럼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그런 에루나의 말에, 우선 가장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우선... 그 아이들이 원해서 내 시종이 되겠다고 한건 아니지?”
“지금은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렇다니, 대체 그게 무슨 대답인지 모르겠다. 내가 질문을 잘 못한 건가. 생각했지만 내가 한 말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아니, 문제라면 물어본 대상이 잘 못 됐던 것 같지만. 에루나의 말이 뭐라 할 말을 잃었다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로 당황해봐야 아무 쓸데없었다.
지금은 황당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음, 이게 나한테 필요한 일인거지?”
“네, 주인님께서 하루 빨리 투기를 익히셔야 되니까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번에는 제대로 된 에루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생각했다. 결국 이것도 나를 위한 일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건 분명했다.
애당초 그녀들이 나에게 두통을 주려고 이럴 리도 없었다.
루시아도, 에루나도, 나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난처했던 적은, 그녀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과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벌어진 일들뿐이었지, 그녀들이 내가 싫어하는 일을 일부로 골라서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둘이 굳이 이런 일을 권하는 이유는 내게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겠지.
에오시스 자매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인간이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다. 내가 마법이란 걸 조금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그 투기란 걸 쓸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 세계에서 태어났던 사람도 아니고, 마력이고 투기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소환된 나에게는 무리인 조건이지만. 아무튼... 이걸로 대충,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에루나의 말을 기다렸다.
“정보창.”
벌써 백번은 넘게 중얼거린 그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리자. 눈앞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정보창」
「이름 : 니아」
「칭호 : 없음」
「성별 : 여성」
「나이 : 14세」
「직업 : 무투가」
「종족 : 낙시안」
「근력 : 71(B)」
「민첩 : 68(B)」
「체력 : 81(B)」
「지력 : 31(D)」
「마력 : 12(E)」
「매력 : 46(C)」
「행운 : 7(F)」
「생명력 : 810/810」
「마나력 : 120/120」
「지구력 : 78%」
「고유 특성 : 열람불가」
「보유 특성 : 무투가(C), 투기(C), 열람불가」
「보유 기능 : 무투(B), 열람불가」
「상태 : 공포」
「호감도 : 0 (열람불가)」
눈앞에 떠오른 정보창을 살펴봤다. 솔직히 말해서, 0이라는 사상 최저의 호감도 탓에 볼 수 있는 건 고작 해봐야 능력치나 몇 개뿐인 특성과 기능뿐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단 그거로도 충분했다. 정보창에 떠오른 것들을 천천히 읽어보자 보유 특성이나 기능이나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준수한 능력를 갖고 있었다. 마력이나 행운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았지만 그건 낙시안이라는 종족의 특징이라도 되는지 대부분 거기서 거기여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남아있는 아이들을 확인해봤다. 일단, 겉으로 봐서는 몇 안남은 아이들 중에서 이 아이보다 나아보이는 아이는 없어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남은 아이들의 정보창을 확인해봤지만 역시 예상대로였다.
죄다 상태가 공포기는 했지만. 그건 이미 많이 봐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에루나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고.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니아라는 이름의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은 이 아이로.”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숙여 보이는 에루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 있던 침대에 걸터앉았다.
겨우 끝났다.
한 거라고는 정보창을 살펴보고, 능력치가 높은 아이들을 가려서 뽑은 거에 불과했지만. 그게 한두 명도 아니고 백 명에 가까운 아이들 중에서 뽑으려다보니 저녁 무렵에 시작했던 것이 이미 한밤중이 된 지금에서야 끝난 거였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에루나가 말해줬던 대로,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드는 아이를 뽑으라고 했을 때보다는 훨씬 쉬웠지만 말이다.
도중에 루시아가 했던 조언대로 정보창을 봤던 것이 아니었다면 더욱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다.
아무튼 이걸로 끝. 그렇게 생각하니 성취감 비스무리한게 있었다. 중간중간, 에오시스 자매들이 가져온 간식을 먹으면서 아이들을 고르고 있었을 때는 자괴감에 배가 아팠지만. 그래도 무언가 끝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끝난 거지?”
조금 쉬고서 그렇게 묻자 고개를 끄덕인 에루나가 말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상관없긴 한데...”
대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불안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루나의 말을 기다리자, 에루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중에서 주인님의 취향인 아이는 결국 한 명도 없던 겁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에루나의 말에 할 말을 잃었던 나는 무심코 옆에 있던 루시아의 얼굴을 흘끔 쳐다봤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리고, 에루나. 취향이고 자시고 어린 애들인데 대체 뭘 물어보는 거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취향과는 별개로 세상에는 그런 취미가 있는 분도 있기에...”
일단 내 명예를 지키고자 변명하건데, 나는 그런 취향도, 취미도 없었다. 애당초 뽑은 아이들 중에는 남자도 있었다. 내가 뽑은 아이들은 모두 세 명, 그 중에서 둘은 여자아이였지만 남은 한명은 남자아이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루나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고서 혹시나 싶어서 말했다.
“남색가도 아니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실례했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싶긴 했지만, 에루나의 성격이라고 해야 되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혼란만 가득하니까, 정말 가만히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이제 돌아오는 거야?”
원래 에루나의 목적은 이제 이뤘으니까 돌아오는 건가 싶어 묻자 에루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주인님이 고르신 아이들의 기본적인 예의 교육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서 당장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에루나의 뒤편에 서있던 바록인가 뭔가 하던 남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 잠깐 보였다가, 휙하고 사라졌다.
내가 잘 못 본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진 바록이라는 이름의, 내게 투기를 가르치기로 돼 있다던 남자 중 한명의 모습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그럼 당분간은 아가씨와 오붓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지금처럼만 하시면 금방 아기씨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잠깐, 에루나”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스르륵하고 처음 나타났을 때랑은 달리 힘을 잃고 바스라 지듯이 사라지는 거울이 보였다.
“......”
튀었다. 그런 느낌으로 사라지는 거울을 보고 있자니 그런 내게 다가온 루시아가 헛기침을 하고는 내 옆에 앉았다.
“수고하셨어요. 이지경님.”
“...아니, 수고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뭘.”
그보다 너무 가깝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루시아의 눈동자가 보였다.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 뒤로 꿀꺽하고, 말과 함께 침을 삼키자, 나를 보고 있던 루시아가 말했다.
“아뇨, 이번에는... 이지경님이 저희들의 고집을 받아주신 거니까요. 정말로, 고마워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의 말에,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겨우 이런 걸로 그러지 않아도 돼.”
고집이라니. 루시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런 걸로 내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별로 고집이라고 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결국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걸로 루시아가 내게 고개를 숙이는건 보고 싶지 않았다.
“저기, 이지경님?”
그렇게, 루시아의 손을 잡고 있다가, 루시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뗐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 아프지는 않았지?”
나도 모르게 조금 꽉 붙잡았던 것 같아서, 그렇게 묻자 고개를 저으며 루시아가 말했다.
“아뇨, 아프지는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가끔, 이지경님이 잊어버리시는 것 같지만, 저는 이지경님보다 훨씬 강하니까요.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더듬이며 내가 잡았던 손을 매만지는 것이 보였다. 괜히 이쪽이 부끄러워졌다. 덕분에 차마, 루시아를 볼 수 없어진 나는 시선을 피하고는 말했다.
“이야, 그보다 엄청 늦었네. 이제 슬슬 자야 될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러네요. 그럼...”
스윽, 하고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그대로 내게 팔을 뻗은 루시아가 꽉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루시아?”
“...그, 오늘은 하지 않으셨잖아요? 아직, 부작용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그, 그래? 그렇겠지?”
“네, 그런거에요.”
기분 탓일까,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아를 보고 있자니 이쪽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어제는 일주일에서 이주 간격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던 것 같았지만, 그런건 잠시 머릿속에 지워두기로 한 나는 천천히 루시아의 마주안았다.
“그럼, 실례할게요.”
보통 이런 건 반대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아진 나는 다가오는 루시아의 얼굴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