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7화 〉47화 (47/370)



〈 47화 〉47화

《드래곤의 남편, 이지경》



에오시스 자매들이 준비해놓은 욕탕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나오자 욕실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오시스 자매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서, 내 몸을 봤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어보였다.

그때 나타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베헤노스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선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나타. 내가 옷 하나 제대로  입는 게 아니라 옷이 너무 복잡하게 생긴 거다. 나타가 고쳐준 것도 결국 목 언저리의 옷감이 조금 꺾여있던 것을 고쳐준 것에 불과하고... 응, 처음에 비한다면야 옷도 이제 제대로 입는 편이라고.

뭔가 속으로 변명하다보니까, 어릴 적에 어머니가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니라고 하셨을 때마다 제대로 입었거든? 하고 말하던 때랑 같은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나타가 옷매무새를 고쳐주고서 고개를 숙여보이자 나는  나름대로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그럼, 가볼까.”

“네, 저희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목적지야 요정향에 있는 내 방이니까 굳이 안내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루시아가 그녀들에게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모셔오는 것이니까, 나 역시 그녀들의 안내를 받는 것이 맞았다. 사실 요즘은 누가 옆에 없으면 그쪽이 더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어색한 나를 볼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모셔지는 입장도 이제 슬슬 익숙해져가는  자신이 무서웠다. 언젠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중을 받으며 지내다가 결국 꼼짝도  해서 살만 디룩디룩  내 모습이 그려지는 듯 했다.


아, 그럴 리는 없으려나. 개변자라는 특성 덕분에  몸은 언제나 최적의 상태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살이 찔 일도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게으름뱅이 완성이다.

물론 이미 이곳에 소환되기 전부터 게으름뱅이는 완성되있던 것 같지만...! 오히려 여기에 와서 더 많이 움직이니까, 전과 비교해서 게으름뱅이가 아닌 쪽은 이쪽이 아닐까.

어쨌거나, 루시아가 무슨 일로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했다.

“나타, 조금 서둘러도 되겠나?”

“아, 네, 그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 에오시스 자매들의 뒤를 쫓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설마 나를 부른 이유가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인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 설마가 사람을 잡은 게 한두 번도 아니라서 조금 긴장됐다. 대낮부터 그런  때문에 부를 리가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아, 젠장.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다시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이 빨갛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나 자신을, 내 얼굴에 깔린 철판을 믿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도 그럴게 고작 입을 맞춘 것뿐이었다. 고작이라고 하기엔 조금 길게 입을 맞춘 것도 같지만, 겨우 그런 걸로 얼굴이 붉어지다니, 얼마나 순정남인거냐고. 동정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방 앞에 도착해버렸다.

똑똑, 하고 나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방의 주인은 여기에 있지만.


“루시아네스님. 베헤노스님을 모셔왔습니다.”


나타의 말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아가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아, 당신들은 거기서 대기하고 있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나타가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옅은 녹색빛깔을 띄는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응, 오는 동안 진정이 됐는지 이제 멀쩡했다. 홍익인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내 얼굴의 붉기를 확인하는 나는 말했다.


“그럼 들어갈게, 루시아.”


내 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방을 내준 것도 결국 루시아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나보다는 루시아의 허락을 받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방주인과 집주인의 차이라고 해야 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타가 열어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셨나요? 이지경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으로 들어오자 어쩐지 조금 딱딱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들어왔을 때 살짝 움찔했던 것도 같았다.


그래도 조금 표정이 딱딱할 뿐, 평소랑 다름없는 루시아였다. 아마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내 쪽이 긴장해서, 루시아의 표정이 굳어있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안녕, 루시아.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부른 거야?”

“그건... 직접 보시는 쪽이 이야기하기 빠르겠네요.”

내 말에 잠깐 고민을 하던가 싶었던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고서는, 손을 움직였다.


우우웅...

어쩐지, 평소랑 다르게 루시아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무언가가 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흐릿하게, 마치 무늬라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글자들이.

“...‘비쳐라. 나에게 보여라. 만상의 거울?’”


내 중얼거림을 들은 루시아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왜, 뭔가 내가 실수라도  건가?


“이걸 읽을  있는 건가요?”

“어? 어어, 응.  보이는데.”


조금 읽기는 힘들었지만, 나도 이세계의 문자는 읽을 수 있었다. 읽기 힘들다는  어디까지나 내가 읽는다는 것이, 내가 갖고 있는 드래곤의 기억을 들춰서, 보고 있는 글자들과 기억을 비교해가며 읽어내는 것에 가까워서 읽기 힘들 뿐이지.


대충 처음 보는 글자를 읽기 위해  옆에 사전을 펼쳐두고서 찾아가며 읽는 것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아무튼 내가 글자를 읽지 못했더라면, 애당초 이세계의 책을 읽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책을 읽어대는 것이 전부였다는 걸 루시아 역시 알고 있을 텐데, 이제 와서 내가 글자  읽은 걸로 놀라는 루시아를 이상하게 바라보자, 그런 루시아는 그런 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연, 제 마력을 흡수했기 때문인가요.”


아까랑 비교해서 오히려 이쪽의 얼굴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왤까. 역시 아까 짓고 있던 표정은 내가 착각했던 게 아니었나.


무언가 생각하던 끝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는지 이쪽은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이쪽이 아니었죠.”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손을 휘젓자. 마지막 글자가 떡하니 그 무늬의 마침표를 찍듯이 허공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내 눈앞에 커다란 거울 같은 것이 일렁거리며 나타났다.

그 거울에 비쳐 보이고 있는, 에루나의 얼굴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인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안녕이고 자시고... 하루만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뭔가 엄청난 일이 있던 것도 같지만. 아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에루나보다도, 그 뒤에 있는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뒤에 있는 애들은 또 뭔데?”

마법이 있는 세계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무리였다.

그야 당연했다. 처음 보는 드레스 차림의 에루나가 우아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거야 뭐, 항상 메이드 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에루나여서 새로운 모습을 봤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문제는 그 에루나의 뒤에 비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이지경님을 부른 이유가 바로 저 아이들 때문이에요.”


에루나를 대신해서, 루시아가 그렇게 말했다.

“나를 부른 이유가 저 아이들 때문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에루나의 등 뒤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헐벗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헐벗었다고는 했지만, 알몸이란 건 아니었다. 헐벗은 거나 다름없는 차림인건 맞았지만.


햇살에 그을린 듯한 옅은 갈색 빛의 피부 대부분이 전부 드러나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짐승의 것인지도 모를 가죽을 대충 이어붙인 듯한 옷을 입은 탓이었다. 그런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런 아이들의 머리에 혹? 아니, 뿔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피부의 색보다 조금 더 진한 느낌으로 솟아있다는 걸까. 너무 작아서, 언뜻 보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만큼 작은 뿔이었다. 머리카락에도 감춰질 것 같았다. 마족? 기억 속에 있는 마왕이 순간 떠올랐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시체와 같아보이던 마왕의 것과는 다르게, 그들은 꽤 말라있었지만,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처럼, 혈색도 좋았다. 까놓고 말해서 살아있다는 듯한 느낌이 나고 있었다.


연령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아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큰 아이들이 에루나와 비슷해보였다. 에루나의 진짜 나이는, 아니 제작된 지는 벌써 400년이 훌쩍 넘었다는  알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소녀였으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주인님.”


그리고 에루나가 그렇게 말하며,  아이를 자신의 앞으로 내보였다.


“히끅!”

에루나에게 붙잡힌 아이가 히끅하고, 딸꾹질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마치 괴물의 아가리 앞에 놓여있는  같은 얼굴이었다. 말하자면, 엄청 불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루나가 말했다.

“주인님이 보기에는, 어떤 아이가 가장 마음에 듭니까?”

...덕분에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필리핀에서 막 귀국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때 그 꼴을 보다 못했던 친구들이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며 사진들을 잔뜩 가져왔을 때의 기억이었다. 아직 내게 친구라고 부를만한 녀석들이 있었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는 그런 친구들의 배려고 뭐고, 나는 전부 무시해버려서,  주위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하나도 남지 않아버렸지만.


나중에 가서 후회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음, 잠깐 우울해질 뻔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우중충한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무튼 그때랑 비교해서, 여러 가지로 달랐지만, 그때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른 건 주로 연령대였지만.


에루나가 누가 가장 마음에 드냐고 말했지만, 마음에 들고 자시고 우선 눈에 보이는 아이는, 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어렸다.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그 아이들과 비슷한 샤르나, 아샤와 아냐가 있었지만 그녀들은 별개였다. 드래곤이니까. 드래곤이니까 문제없었다. 오히려 내가 더 어리다.


응, 아무튼 지극히 정상적인 나는 말했다.

“아니, 마음에 들고 자시고...”

“흐음, 그럼 이 아이는 어떻습니까?”

내 말에 스윽, 하고 그럼 이건 어떠냐는 얼굴로 다른 아이를 앞으로 들이민 에루나가 그렇게 말했다. 조금, 루시아를 닮은 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의 아이도, 전에 보았던 어릴 적의 루시아의 모습을 조금 닮아있었던  같았다.


물론 루시아쪽이 더 귀엽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굴 닮느니 마니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과연... 얼굴은 논외입니까? 그럼 이 아이는 어떻습니까?”

다음, 이번에는... 뭔가 장난이 아니었다. 얼굴은 분명 앞선 두 아이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그러니까... 몸매가 어울리지 않았다. 순간, 옆에 있던 루시아와 비교할 뻔했다가 간신히 참아내고서 입을 열었다.

“...루시아? 이게 어떻게  일이야?”

에루나와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아서, 루시아를 바라보자, 슬쩍하고 루시아가 내 시선을 피했다.

“...루시아?”

“하아, 사실... 에루나가 이지경님을 떠나, 저곳에 있는 이유는 이지경님께 도움이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이지경님에게 투기를 가르칠만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에요.”

빤히 루시아를 바라보고 있자 루시아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렇게 말했다. 투기가 에네스타가 슝슝 날아다니는 이유인  투기를 말하는  알겠다. 근데 그거랑, 에루나가 절찬리 소개팅을 주선하는 듯한 모양새로 저러고 있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애당초 투기를 배우려면 에네스타가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검주, 투기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인재니까.


그런 내 시선을 느낀 듯, 루시아가 말했다.


“이지경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에네스타에게 배우면 그만 아니냐는 생각이겠죠. 하지만, 그건 무리에요.”

“...어째서?”

“그녀가 조금 특이한 방법으로 투기를 익혔고 검주가 되었기 때문이죠. 덕분에, 이지경님에게 투기를 가르칠만한 조건이 되질 않으니까요. 그래서... 차선으로 에루나를 낙스로 보냈어요.”

낙스...


예전에  이름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버림받은 땅, 마물과 마족을 비롯한... 많은 종족들을 드래곤들이 전쟁의 끝에 내몰아 넣어버렸다는 땅의 이름이었다.


“...저기가 낙스라는 거야?”

“네, 지금 에루나는 낙스에 있어요.”

루시아의 말에,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울에 비쳐 보이는 에루나의 뒤로 보이는 곳을 바라봤다. 언뜻 봤지만 마치 사바나 같은 풍경이었다. 사바나랑 비교해서, 풀 한포기, 나무 한 뿌리조차 안보였지만. 저기가 낙스, 버림받은 땅... 버림받은 땅이라는 이름답게, 버림받을만한 풍경이었다.

저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알겠어. 에루나가 어째서 저기에 있는지는 이해했어. 근데, 저건 대체 무슨 상황인데?”

잠깐 이야기가 샐 뻔 했다. 중요한 건 에루나가 저기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었다.

내 말에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루시아가 한숨을 연이어서 쉬는 장면은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루시아를 대신하듯 에루나가 말했다.


“쉽게 말해서, 주인님의 시중을 들 만한 아이로 누굴 뽑아 가면 좋을지,  아이들의 주인이 되실 주인님께 직접 여쭤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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