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45화 (45/370)



〈 45화 〉45화


마침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착한 곳. 그곳에 첫발을 딛은 에루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이곳입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군요.”


여태까지 보아왔던 낙스의 땅이, 버림받은 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황무지에, 도저히 쓸 수 없는 땅이었다면 이곳은 조금 달랐다.


구체적으로는, 이곳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아주 조금뿐이었지만. 거기에 물도 있었다. 샘물이라고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물은 반드시 필요로 했다. 그러니까 물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단지, 그 물이 너무나도 깨끗하다는 사실에 에루나는 의아해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니, 이곳에서조차도 적지 않은 독들이,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물이 전혀 오염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작은 의문에 불과한 일이었다.


겨우 작은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에루나는 흘끔, 사색이 된 바쿠를 보며 말했다. 비록 바록이 바쿠보다도 먼저 알게 된 자였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바록보다도 바쿠가 더 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자를 데려와, 이곳에 오게 하십시오.”


“노, 높은 자?”


“당신들을 이끄는 자를 말하는 겁니다.”

에루나의 말에 바쿠는 족장을 떠올렸다. 혼자서 전사 네 명이 겨우 잡을  있는 괴물, 마라를 혼자서도 거뜬히 상대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 족장이었다. 어제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은 괴물 중의 괴물은 오직 눈앞에 있는 에루나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괴물인 에루나가 하는 말을 거부할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알겠다. 그, 금방 데려온다. 진짜다. 금방 데려온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루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바쿠는 허겁지겁 족장이 있을 장소로 달려갔다.


“...레이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가다니 예의가 여전히 부족하군요.”

그리고 남아있던 셋은, 에루나의 말을 듣고서 오금이 저렸다. 반사적으로 다리가 풀릴  같았다. 돌아올 바쿠가 어떻게 될지, 눈에 뻔히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바쿠가 뛰어간지 얼마나 됐을까.

콰아앙!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졌다.

키가 거의 오우거만한 남자였다. 즉, 3미터는 거뜬해 보이는 거인이라는 소리였다.

반면 에루나의 키는, 인간 여성의 평균정도였다. 여성치고는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는 소리였다. 에루나는 거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름을.”

“그 모습... 너,  땅의 여자가 아니군. 어디에서 왔지?”

에루나의 옷차림을 살펴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대로 에루나의 옷은, 사냥한 마수의 가죽을 뜯어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옅은 보랏빛이 감도는 드레스에, 부분부분 진철과 진은으로 만들어낸 갑옷을 겹쳐 입고 있었다. 남자가 입고 있는 것은 에루나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옷이라고 보기에도 조금 우스울 정도의 거적데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곳의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질문에 이번에도 딴 소리를 했다는 것이었다. 에루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물어보기는 했지만, 역시  자도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의가 많이 부족해보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이곳까지 자신을 안내해준 멍청이 넷과는 조금 달랐다. 말하자면, 에루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일단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 중요도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주인을 극진하게 생각하는 에루나는,  주인인 이지경을 위해서 인내심을 발휘했다.


“알겠습니다. 우선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손을 뻗어, 이곳에 오기 위해 갈아입었던, 이지경의 시중을 들기 위한 하녀의 옷이 아닌. 전투를 위한 드레스의 밑단을 살짝 붙잡아 들어 올리고는 에루나는 말했다.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일만한 존재는, 눈앞의 남자가 아니었다. 오직 이지경과, 그의 아내가 될 아가씨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날 자손들만이 에루나가 고개를 숙일만한 존재들이었다.


비록 자신의 주인인 자는 오직 이지경뿐이었지만.

“저의 이름은 에루나 투아레. 오직  분만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지고, 오직 한 분만을 모시기 위해 400년의 세월을 기다려온 자. 유일하고 무이한 스스로 치장하고, 스스로 진화하는 골렘입니다.”

가볍게 자신을 소개한 에루나는, 남자에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다소 예의가 부족해 보이는 당신에게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줄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에루나의 말이 끝마쳐지기 무섭게, 남자는 콧김을 훅 내뿜으며 말했다.


“선생이라. 오랜만에 듣는 말이로군. 이 몸을 가르치던 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나? 여자?”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만, 예의상 물어는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내 손에 머리가 뭉개져 죽었다! 바로 이 몸, 자락스의 손에 말이다!”


쿠와아앙!


그렇게 말하며, 공기를 찢으며 내뻗은 자락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의 주먹을 에루나는 바라봤다.


빠르기로만 치면, 솔직히  빨랐다. 아가씨들 중에서 가장 빠르게 마법을 구사하는 샤르비오나와 비교해서도, 자락스의 주먹이 훨씬 빨랐다.


그렇다면 파괴력은?


콰아아앙!

자락스의 주먹에 맞은 에루나는 천천히 뒤로 젖혀졌던 고개를 되돌렸다.

꾸우우욱, 하고 그런 에루나의 힘에 밀려 자락스의 주먹이 주춤하고 뒤로 밀려났다. 에루나는 이마에 닿은 자락스의 주먹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과연 실력은 쓸 만합니다. 단지, 역시 이미 머리가 굳은 당신을 교육해서 주인님을 모시도록 하기엔 무리일  같군요.”


뚜두둑!


“크, 크아아아아아!!”


자락스의 주먹을, 손수 펼쳐주며 에루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주먹은 제 머리를 뭉개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적어도 이것의  배. 아가씨들의 마법의 티끌만한 위력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머리를 뭉갠다는 소리는 입에 담지도 마시길.”

물론, 아무리 아가씨들이라도. 이 속도로 연격을 가한다면 위험할지도 몰랐다. 아가씨들은, 명실상부 최강의 생물인 드래곤이었지만. 아직 드래곤의 기나긴 수명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 치면 이제 겨우 어린이정도의 나이였다.


힘만큼은 대단했지만, 경험이 다소 부족한  흠이었다. 선조로부터, 자신을 제작한 드래곤들의 기억을 물려받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옥을 지배하기 위한 기억. 싸움을 잘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니까.

그러니까  자락스를, 아가씨들이 상대했다면 마법을 채 완성시키기도 전에 공격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아무리 아가씨들의 마법이, 눈앞에 있는 자락스라는 녀석 정도는 단숨에 죽여 버릴 정도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더라도,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공격을 당한다면 위험한 건 위험한 법이니까.

뭐, 그렇게 두지 않기 위해 자신이 직접, 주인인 이지경을 홀로 두고서 온 것이니까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아니, 문제는 있었다. 지금 이 순간순간에도, 주인인 이지경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에루나의 견고한 인내심이 깎여나가고, 수백 년의 세월 동안에도 느껴본 적이 적었던 분노가 쌓이고 있다는 문제가.

하지만 에루나는 냉정했다. 자신의 분노로 일을 그르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에루나였다. 완벽하게, 주인을 위해 시중을 드는 것이 에루나가 가진 존재의 이유니까.

그러니까, 이건, 지금의 판단은 자신의 분노랑은 별개의 것이었다. 지극히 냉정하고, 지극히 논리적인 사고의 끝에 다다른 결론이었다.

에루나는 눈앞의 자락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의 당신이 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입니다.”


바로, 이 눈앞에 있는 존재가 아주 조금이라도 주인님과 아가씨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


결국 자신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곁에 있는 한 주인과 아가씨의 피부에 흠집조차도 내지 못하는 벌레만한 존재에 불과하더라도.

“나, 여기에 마력을 바쳐 바라노니.”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이들. 낙시안들에게, 드래곤들에 의해 이 버림받은 땅, 낙스로 추방된 존재들에게 결국 거의 무용할 뿐인 가능성에 불과하더라도. 에루나가 모시고 있는 존재들에게 위험이 될 만한 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위험이었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위험이 된다는 것은 즉, 자신의 주인인 이지경에게도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이르기를, 손의 끝에서 끝으로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완벽한 시종을 자부하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에게 조금이라도 위험이 되는 존재를 어떻게 해야 될까.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니. 오라. 분쇄하라. 파괴하라. 나의 손끝에서. 닿는 모든 것을 지워 없애라. 극소 소멸.”

공격을 위한 마법 중에서도 극히 위험한 마법. 파열하는 별이 내뿜는 빛과 같은 섬광과 함께, 파괴마법이 에루나의 손끝에서부터 이루어졌다.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스스스슥...


가루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언가로 분해되어 사라지는 팔을 붙잡고, 자락스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사라져가는 팔을 붙잡은 자락스의 손 역시, 마찬가지로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마법의 천적은 투기.

그것은 이 세계에서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반대. 투기의 천적 역시 마법이었다.

그리고 에루나의 몸. 그 속을 채우고 있는 수백에 달하는 드래곤들의 뼛조각. 그리고 그 뼛조각의 대부분에 새겨져 있는 것은, 마법의 천적, 투기를 봉인하는 마법이었다.

투기를 봉인하는 마법이, 그런 것이 간단한 마법일 리가 없었다. 수백에 달하는 드래곤의 뼛조각에, 세심하게 새겨져있는 수많은 마법들의 보조와 연계. 크고 작은 마법들의 결합.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우는 드래곤, 그들이 자신의 천적을 연구한 끝에 만들어진 마법. 그 결과가 투기를 봉인하는 마법이었으니까.

당연히 간단한 마법일 리가 없었다. 만약 투기를 봉인하는 마법이 간단한 것이었다면 마법사가 이 세상을 지배했을 거다. 실제로 드래곤들도 이 투기를 봉인하는 마법을 만들기만 했을 뿐,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같은 동족을 소재로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마력과 친화력이 뛰어난 드래곤의 뼈가 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으니까. 드래곤의 뼈와 비슷한 효율을 지닌 다른 소재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마법을 사용할 만큼의 양을 구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에루나에게는 그러기 위한 모든 조건이 결집되어있었다. 자그마치 넷이나 되는 드래곤, 그 소재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것이 에루나였으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투기를 봉인할 수 있는 존재가, 에루나라는 이야기였다.

에루나가 아니라면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투기를 봉인하는 마법이, 에루나에게는 있다는 것이 됐다.

그리고, 이곳은 버림받은 땅. 낙스.


희박한 마력과, 생명이 살아가기 힘든 험난한 환경.


그런 낙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낙시안들이 자연스레 몸에 익히고, 본능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투기였지만, 투기를 봉인하고 그 몸에 직접 마법을 쑤셔 넣는 에루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어떻게 할 수 없는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크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


난생 처음, 그리고 최후로 보는 마법, 그것도 오직 파괴만을 위한 파괴마법 중에서도 고위 마법. 손에 닿은 것을 지워버리는 극소 소멸에 지워지며 고통으로 가득한 비명을 내지르는 자락스를 보며, 에루나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당신의 마지막 선생님으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윽, 하고 에루나는 우아하게, 처음 자락스에게 자신을 소개했듯이, 옷의 밑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다음 생에는 부디 조금  예의를 갖춰주시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