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1화
부웅~ 하늘을 날며 날아가다가, 그대로 땅에 꽂힌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런 내 눈에 스윽, 하고 다가온 에네스타의 얼굴이 보였다.
적어도, 한 가지 전보다 나아진 것이 있다면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숨을 고르는 에네스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걸까. 전혀 지쳐보이지는 않았지만, 장난치듯이 두들겨 패던 첫날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에네스타도 그렇게 생각했었나 보다.
“흐음... 확실히 전보다는 제법 괜찮아졌구려. 그래도 아직 멀었으니 좀 더 정진하길 바라네.”
“나아졌는데 왜 더 얻어터지는 건데?”
지금 건 꽤 잘 들어갔다고. 호신의 방패를 사용해서 이동, 그리고 동시에 라이어스 제국검술의 연격. 내가 생각해도 꽤 좋은 연계였다고. 좀, 한 대라도 좋으니까 맞춰봤으면 좋겠다. 그런 내 물음에 에네스타는 딱 잘라 말했다.
“그만큼 진심을 다했으니 당연한 결과네만?”
잘해서 더 맞았다는 말이었다. 너무한 소리였다. 아마 지금보다 두 배는 더 강해져도 두들겨 맞는 미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단순히 에네스타와의 능력치 차이로만 봐도 그랬다. 여기에 경험이나, 센스, 그 외의 임기응변까지 전부 더하면 아마 지금의 세 배, 네 배는 더 강해져야지 뭔가 되지 않을까.
...뭐, 에네스타와는 곧 이별이겠지만. 에네스타는 요정향의 검주였다. 내가 곧 파라모아를 떠나,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로 떠나는 이상 에네스타와는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얼마 남지 않은 기한동안 설욕할 수 없다면 다시 보게 되는 건 한참 뒤라는 이야기였다.
수명이 긴 엘프인 에네스타니까 기회는 많겠지만... 내가 늙어 죽기 까지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내 손을 잡으시게.”
“고마워.”
에네스타가 내민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킨 나는 툭툭, 옷에 붙은 먼지들을 털어냈다. 오늘도 잔뜩 먼지를 뒤집어썼다. 내일도 변함없이 흙투성이가 되겠지.
“그나저나, 어째 오늘은 기운이 없구려?”
“응? 그래 보여?”
“아니, 기운이 없다기보다는... 딴 생각이 많아 보인다고 해야 하는 게 맞겠구려.”
에네스타의 말에 나는 옷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내다 말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날씨도 참 좋았다. 이런 날에는 그냥 낮잠이나 자는 게 최고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괜히 먼 하늘을 바라보는 나를 보고서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는 에네스타가 보였다.
눈치가 있으면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았을 텐데. 에네스타에게 그런 눈치를 바라는 건 사치였나 보다.
“음, 그냥 그런 일이 있었거든...”
남에게 밝힐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에 오늘은 루시아를 어떻게 보나, 엄청 긴장했는데 막상 아침 식사 시간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그렇고, 오늘 하루 종일 루시아를 보지 못해서 엄청 신경 쓰인다고 어떻게 밝힐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건 비밀로 간직할 일이었다.
그런 내 말에 에네스타가 조금 뚱한 표정을 짓고는, 내 어깨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떼어주며 말했다.
“별 일 아니라면 내게 좀 더 집중해주게나.”
“응.”
확실히 에네스타와 수련하는 와중에도 계속 이러는 건 좋지 않겠지. 아무리 루시아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100명도 안 되는 검주인 에네스타가 직접 검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나는 힘들어 죽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바라도 얻지 못할 기회일 것이다. 따지자면 한 분야의 최고에게 그 기술을 배우는 셈이니까. 그걸 둘째치더라도 에네스타에게 실례이기도 했다.
“미안, 제대로 할게.”
“음, 그러면 됐네. 참, 그러고 보니 루시아네스님이...”
자세를 고쳐 잡고,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던 나는 에네스타의 말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런 나를 보던 에네스타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루시아네스님이.”
나도 모르게 또 움찔해버렸다. 이래서야 무슨 일이 있다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뭐, 왜, 자꾸 말을 하다가 말아?”
그런 나를 보며 씨익, 하고 기분 나쁘게 웃는 에네스타의 얼굴이 보였다.
“호오, 호오호오. 과연 어젯밤 드래곤의 반려의 침실에서 루시아네스님께서 나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그 반응을 보니...”
“내, 내 반응이 뭐 어쨌다고...”
사실 엄청 어색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니, 그보다 평소에는 눈치라고는 죄다 어디다가 버려둔 것처럼 굴던 에네스타가 이런 쪽에만 민감하다는 게 짜증났다.
분명 노처녀라서 그런 거겠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큰일 나겠지만, 속으로 말하는 건데 무슨 수로 알까. 그러니까 문제없다.
“아차, 드래곤의 반려의 반응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놀릴 뻔 했군. 하마터면 루시아네스님한테 결례를 저지를 뻔 했구려.”
“나한테 그러는 건 괜찮고?”
“그야, 나는 드래곤의 반려의 스승이 아닌가? 루시아네스님은 나보다 윗분이지만 적어도 자네에게는, 검에 대해서는 내가 위라는 거지. 게다가 지금은 검술 수련 시간이고?”
별로 이런 이야기가 검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지만.
이번에는 내가 뚱한 표정을 지을 차례인가. 나는 에네스타에게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럼 본업인 검술이나 가르쳐 주라고.”
“그래그래, 그래야지. 자, 오늘도 즐겁게 수련하세.”
“알겠어... 그래서? 오늘은 뭘 하면 되는데?”
내 말에 에네스타가 씨익하고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오늘은 대망의 실전일세.”
“...실전?”
불길한 소리였다. 실전이라니? 대체 누구랑... 만약 에네스타와 실전을 하라는 소리라면 지금 즉시 도망칠 생각이었다.
“자, 카에네스. 부탁하마.”
“오래간만입니다. 베헤노스님.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군요.”
에네스타의 말에 스으윽, 하고 언제 왔는지 모를 카에네스가 앞으로 나오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실전, 그리고 카에네스. 나는 에네스타와 카에네스를 번갈아보다가 물었다.
“카에네스랑 하라고?”
“음! 정확히는, 카에네스가 소환할 마수와의 실전일세.”
“소환이라니... 마수를?”
소환이라는건 나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에루나가 건네주었던 보석을 목걸이의 형태로 만들어서 항상 챙기고 다니고 있었으니까. 사용해본 적은 몇 번 없지만. 확인차로 사용했을 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에루나를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단지, 지금은 에루나가 루시아의 명령으로 떠난 상태라서 쓸 수 없을 뿐.
하지만 마수를 소환한다니, 마수라면 그거잖아. 마력에 의해 보통과는 다르게,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된 동물들.
쉽게 말해서 괴물이었다. 약한 건 약해서, 딱히 훈련하지 않아도 성인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하지만 마수는 마수, 괴물은 괴물이었다. 루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파라모아, 거기에 검주인 에네스타가 존재하는 요정향에는 그 흔한 마수도 본적이 없었다.
근데 그걸 카에네스가 소환한다고? 아니,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내 의아심이 표정으로 나왔는지 에네스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카에네스는 말이지. 꽤 우수한 마수 소환사라네. 거기에 세 가지 속성의 상위 정령까지 소환할 수 있는 뛰어난 정령사이기도 하지.”
가슴을 펴며 그렇게 말하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옆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는 카에네스를 바라봤다. 어째서 카에네스의 일을 에네스타가 자랑스러워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내 시선에 카에네스가 뭔가 떠벌떠벌 카에네스의 자랑을 하기 시작하는 에네스타를 말리며 말했다.
“...누님, 베헤노스님한테 저를 너무 추켜세우면 부끄럽습니다.”
“...누님?”
“음? 모르고 있었나?”
오히려 왜 몰랐는데, 하는 듯한 의아함이 담긴 눈초리를 보내는 에네스타를 대신해서 카에네스가 말했다.
“에네스타는 제 누님이십니다. 저랑은 나이가 조금 차이가 나지만… 누님, 아픕니다.”
“나이 이야기를 한 네 잘못이다.”
누님이라고? 에네스타가... 카에네스의 누나?
“하지만, 카에네스랑 에네스타는 이름이 다르잖아? 카에네스는 에오시스인데.”
“아, 그건 제가 결혼한 아내의 성입니다. 딸들도 아내의 성을 따랐죠. 엘프들은 결혼할 때 보통 아내의 성을 따라가거든요. 제 원래 성은 누님과 같은 시오니스였습니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아니, 에네스타랑 카에네스가 남매라니… 아니,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나.
서로 머리카락의 색도, 성격도,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지만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남매는 남매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카에네스와 에네스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자, 에네스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어쨌거나. 카에네스. 어서 마수를 소환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베헤노스님. 지금부터 소환할 마수는 프록이라고 하며, 거대 개구리가 마력에 의해 변이한 마수입니다. 주공격 수단은 혓바닥과 독성을 지닌 침, 위험도는 E정도라더군요.”
위험도라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내가 물었다.
“위험도라니?”
"인간들이 만든 기준입니다만, 제일 위로는 A, 제일 밑으로는 G까지 있는 위험한 정도를 나타낸 등급입니다. E라면, 훈련된 병사가 무난하게 잡을 수 있는 정도의 위험도라는 의미죠. 가장 밑의 G는 성인이라면 혼자서도 어떻게 상대할 수 있는 정도, 제일 위의 A는 드레이크를 비롯한, 도시가 위험한 수준의 마수나 마물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드래곤은 이 위험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보기에도 드래곤은 규격 외의 존재라는 거겠죠."
“헤에…”
몰랐던 이야기였다. 내가 갖고 있는 이세계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드래곤들이 부여해준 것과, 이곳에서 내가 보고 배운 것뿐이니까. 그런걸 알 턱이 없었다.
“어쨌거나, 프록정도라면 지금의 베헤노스님이라도 어렵지 않게 상대하실 수 있겠죠. 그럼 소환하겠습니다.”
카에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나 여기서 마력을 바쳐 바라건대. 나의 의지에 속박된 자여 이곳에 오라. 하위 마수 소환!”
쿠오오오,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카에네스의 손끝이 빛나더니 이내 여러 가지 마법 문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눈앞에 커다란 개만한 크기의 개구리가 나타났다.
“...이게 프록?”
“예, 제법 귀엽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프록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자 쿠겍, 하는 의미모를 소리로 우는 것을 보며 귀엽다고 말하는 카에네스의 감성에 전혀 동감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으로 본 마수에 어쩐지 기분이 고양되는 것 같았다.
드래곤, 엘프, 그리고 몬스터!
어쩐지 판타지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판타지적인 세계에 있던 건 맞지만. 판타지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도 맞고. 그래도 직접 눈으로 몬스터다운 걸 보니까 뭔가 실감이 온다고 해야 할까.
“자, 베헤노스님. 루시아네스님의 마법과 누님의 공격도 통하지 않는 베헤노스님이니 위험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야 수련이 되지 않겠죠. 최대한 이 프록에게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 선에서 처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에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는 상관없어.”
지금의 상황을 게임으로 비유하면 무적 치트키를 치고서 잡몹을 잡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까. 컨트롤, 아니 이 경우에는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경험을 제대로 얻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내가 제대로 된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노히트, 상대에게 단 한 번의 공격도 받지 않고 상대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건 익숙했다. 적의 패턴을 알기 위해서 한 대만 맞으면 죽는 사양에 맞춰서 끊임없이 로드해서 사냥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프록, 내 눈앞에 있는 자를 공격하라.”
쿠겍,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프록이 나를 보더니, 입을 쩌억 벌렸다. 징그러웠다. 뭔가 혀가 엄청 징그럽게 생겼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퓨웅!
“오, 오오!”
갑자기 쏘아져온 프록의 혓바닥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가, 이내 정신을 차려 검을 휘둘렀다. 생긴 게 커다란 개구리라서 우습게 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개구리가 생각보다 엄청 잽싼 동물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라?”
그리고, 내가 휘두른 검을 프록의 혓바닥이 휙하고 휘어지면서 피하고는 곧장 내게 날아드는 것을 보고서, 나는 잽싸게 호신의 팔찌를 발동시켰다.
“팔찌여, 나의 몸을 보호하라!”
퉁!
루시아가 아무렇게나 쏘아보내는 마법의 창보다 훨씬 약한 공격. 그리고 에네스타의 검보다도 훨씬 느린 공격이었다. 내 몸이 힘에 밀려서 뒤로 날아가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겨우 그런 공격에 놀라 허둥거렸다는 사실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시선을 돌려 에네스타와 카에네스를 보자, 이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두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