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34화 (34/370)



〈 34화 〉34화

에루나에게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미 떠나간 일이었다. 되도록 여느 때 같은 에루나의 장난 이였거니 하기로 했다. 여행의 준비를 해야 된다던 에루나를 붙잡고서 캐물을 수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서 어느덧 하루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시간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식사시간은 조금 부담스러운 시간이었다. 아니, 루시아와 마주하고서 식사하는 시간이 부담스럽다는  아니고, 그저 내가 먹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요리들이 부담스러운 시간이었다.

천공성에 있었을 적에는 에루나가 내 식성에 맞춰 준비해줬지만 이곳은 달랐다. 덕분에 루시아와 비슷하게 준비되고는 했는데, 루시아는 이렇게 말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내 열배 가까이는 먹었다. 어쩔 수 없다는  알았다. 그래도 그런 루시아에 맞춘 식사가 나에게도 주어진다면 그건 꽤나 큰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이제 슬슬 내 식사량에 익숙해진 이곳에서도 내게 맞춘 요리들이 준비되기 시작했다는 걸까. 항상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식탁 위가 넘치도록 많은 음식들을 먹느라, 또 그래도 다 먹지 못하고 남는 요리를 볼 때마다 불편했는데 이제는 내가 적당히 배부를 정도의 식사가 준비됐다.

덕분에 지금은 고된 수련이 끝나고 즐기는 행복한 시간이 된 식사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몇 없는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던 나에게 루시아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지경님께 소개해줄 사람들이 있어요.”

“소개해줄 사람들?”


“네, 제 부탁으로 에루나는 당분간 이지경님의 곁에 없잖아요? 그 동안 이지경님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불편한 점이 없도록 에루나의 빈자리를 대신해줄 사람들이에요. 이지경님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제 겨우 에루나의 시중을 받는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에루나 외의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는 것은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런 내 의중을 살핀 듯,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당분간이에요. 물론, 이지경님이 계속 원하신다면 그녀들도 에루나를 도와 이지경님의 시중을 들겠지만요.”


“그녀들?”


“예, 그녀들. 자, 여러분. 안으로 들어와 주시겠어요?”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며 세 명의 엘프를 식당으로 불러들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자매처럼 꼭 빼닮은 얼굴의 소녀들은 곧 안에 있던 나와 루시아를 보고는 옷자락을 집어 들어 올리고는, 한발을 굽히며 몸을 숙였다.

이세계의 인사 중에서도, 가장 정중한 인사였다.


“천공의 지배자, 파라모아의 주인이신 루시아네스 파라모아님과 그의 반려, 베헤노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들이 나를 보고 칭한 반려라는 말에 조금 낯간지러웠다. 아직 반려는 아닌데도, 이미 에네스타로부터 그렇게 불리고 있는지라 그런 호칭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부끄러운 건 여전했다. 하지만 가장 낯간지러운 것은 그녀들이 나를 지칭한 것, 베헤노스라는 나의 이름이었다.


베헤노스는  이름, 이지경을 루시아네스나, 에루나처럼 이 세계의 고대 문자를 써서 풀이한 이름이었다.

땅을 의미하는 베헤와 경축의 의미를 담은 노스. 그 둘이 합쳐져서 베헤노스였다. 그렇다.  이름인 이지경은 한자로 풀이하면 땅의 축복이었다. 왜 이름이 그따구인지는 내 아버지한테 물어봐야  거다. 정확히는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한테 물어봤으면 좋겠다.

내 이름이 지경인 이유는 내가 아직 뱃속에 있었을  할아버지가 저놈은 꼭 지경이라고 붙여야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내 성은 어디로 갔냐고?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라.

베헤노스 이, 이 베헤노스, 어느 쪽이든 이상하잖아.

어쨌거나 내가 베헤노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루시아는 나를 내 본래 이름인 이지경이라고 불렀고, 에루나는 주인님, 에네스타는 드래곤의 반려라는 호칭으로 불렀으니까.


“으음...”


사실상 처음으로 불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름에 다소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신가요?”

“아냐, 아무것도...”

내 나이가 조금만 더 젊었으면 베헤노스라는 울림에 뭔가 느끼는 게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이름으로 불리면 소름이 쫙 돋고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는 뭘까...


아니, 이름이 필요한 것은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지경이라는 이름은 애당초 이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이 세계에는 언령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덕분에 말이 통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름은 발음상의 문제가 있었다. 루시아나 에루나 이외에는 다들 이지경이라는 이름을 발음하는데 어려워했으니 말이다.  탓에 이 세계에서 쓸 이름이 필요한건 맞았다.

근데 그 이름이 하필 베헤노스인걸까. 어딘가에서 나오는 짐승의 이름 같잖아. 그 어딘가의 이름은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걸 모르는 루시아와 에루나는 좋은 이름이라고 칭찬 해줬지만 말이다.


어째서 부끄러움은 항상 내 몫인 걸까. 핑크발랄한 옷도 그렇고.

그래도 내 세계의 상식이나 지식을 들이밀면서, 이 이름은 쪽팔리니까 싫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베헤노스라는 이름도 익숙해져가야만 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흠흠, 이제 괜찮으니까 소개 좀 해줄래?”

“알겠어요. 그럼 순서대로, 장녀인 나타, 차녀인 에샤, 그리고 삼녀인 모네라고 해요. 모두 이곳의 장로, 카에네스의 딸들이죠.”

“뭐?”


카에네스의 딸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나타, 에샤, 그리고 모네라고 루시아가 소개해준 소녀들을 바라봤다.  카에네스의 딸이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 닮아있는 것도 같았다. 조금이라고 해봤자 기껏 해봐야 푸른빛이 감도는 머리카락 정도지만... 그나저나 카에네스의 딸이라니. 확실히 카에네스도 엘프들의 연령으로도 그렇게 젊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가장 늙은 것은 에네스타지만 말이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나보다 어려 보일 때도 있는 카에네스였다. 하지만 그가 이곳 요정향의 장로 중의 하나라는 사실과,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딸 하나  쯤은 있어도 놀라울 일은 아닐게 분명했다.


그래도...

“유부남이었다니... 딸이 셋이나 있었다니...”

알고 있던 것과 실제로 보게 된 것은 느낌이 달랐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유일한 남자였기에 말이 통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 카에네스였다. 그만큼 쉬는 시간에는 사적으로 가끔 카에네스를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했던 나로서는 그런 카에네스가 사실 유부남에, 그것도 세 딸을 둔 아버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루시아가 말했다.


“카에네스는 그래보여도 엘프로서는 드물게도 자식이 많은 편이랍니다. 이들 말고도 두 아들이 더 있으니 말이죠. 보통 일생동안 하나나 둘 정도의 자식을 두는 엘프로서는 많은 자식을 둔 편이죠.”

“진짜?”


“네, 나중에 비결이라도 들어보시는 게 어떤가요?”

은근슬쩍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를 보고서 나는 눈을 돌렸다. 아주  순간이지만, 루시아의 눈이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문제는 사냥감이 나라는 거였다.


최근에 들어서 이런 경우가 잦아지고 있었다. 틈틈이 나를 유혹하려는 듯한 루시아의 언동에 어쩔  몰라 하는 건 언제나 나였고 말이다.

나도 안다. 지금 내가 직무유기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말이다.

1년 안에 루시아들을 꼬시겠다는 약속은 어디로 갔는지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수련을 하고는 땀투성이가  몸을 씻고 얌전히 책이나 읽으면서 지내고 있었으니 할 말은 없었다.


“흠, 크흠...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마.”


나는 일단 화제를 바꾸기 위해 나타와 에샤, 그리고 모네 자매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에루나로부터 주입받듯이 이루어진 교육과 더불어 드래곤들에게 부여받은 기억 덕분에 그녀들에게 자연스레 하대가 나왔다.

누군가에게 하대를 하는 건, 그것도 초면의 상대들에게 하는 것은 내 성격과는 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편하게 대해주겠답시고 말을 놓는 편이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 같아도 그렇겠다. 쉽게 비유하자면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나는 여왕의 반려였다. 그런 사람이 허물없이 대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이렇게 하는 쪽이 정답이었는지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성심성의껏 베헤노스를 모시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그녀들에게 화답하고 있던 나에게, 루시아가 말했다.

“그럼, 이지경님? 잠시 부탁드릴게 있어요.”


“응? 무슨 부탁?”


루시아의 부탁이라는 말에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내게 루시아가 부탁할만한게 있었던가? 자랑은 아니지만 딱히 없었다. 아니, 정말로 없었다.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단지, 이지경님의 능력으로 그녀들의 정보창을 봐주시겠어요?”

“정보창을?”


“예, 이지경님이 그 능력을 사용하기 꺼려하신다는 것은 알겠지만, 전에도 말씀했다시피 그건 이지경님의 능력이에요. 아무리 싫다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죠. 그러니, 조금씩이라도 익숙해져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어디까지나 부탁이니까요. 이지경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되요.”

루시아의 이어진 말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히려... 미안해.”

언제가 됐던,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한 뒤였다. 오히려 루시아가 신경 쓰게 만든 점이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  마음을 담아 그렇게 말해주자 나를 마주본 루시아가 살짝 웃어주었다.

“그럼, 나타. 이쪽으로 와보시겠어요?”


그리고 루시아의 호명에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내 앞으로 나오는 나타가 보였다.


“별거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금방 끝나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는 나타를 보고서 왜 저러나 싶었지만 별거 아니겠거니 생각하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정보창.”




「정보창」
「이름 : 나타 에오시스」
「칭호 : 요정 삼자매. 무희」
「성별 : 여성」
「나이 : 61세」
「직업 : 정령사」
「종족 : 엘프」
「근력 : 52(C)」
「민첩 : 81(B)」
「체력 : 68(B)」
「지력 : 70(B)」
「마력 : 71(B)」
「매력 : 82(B)」
「행운 : 77(B)」

「생명력 : 680/680」
「마나력 : 710/710」
「지구력 : 72%」


「고유 특성 : 요정의 피(B), 위령무희(C)」
「보유 특성 : 세계수의 가호(B), 바람의 정령사(B)」
「보유 기능 : 궁술(B), 정령술(B), 가사(C). 위령무(C)」

「상태 : 긴장」


「호감도 : 25 (호기심 : 이 분이 베헤노스님이구나...)」


눈앞에 떠오른 정보창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정보창을 읽었던 것이 루시아, 그리고 에루나여서 그런지 대부분 지금의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한 나타의 정보창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역시 그 둘이 특별히 강한 것이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명은 이세계의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이고 다른 한 명은  드래곤이 가디언으로 만들어낸 골렘이었다. 그 둘과 나타의 능력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일 것이다.

막말로 나와 비교해서, 몇가지 능력치를 제외하면 모두 나보다 높으니 말이다. 특히 마력은 마력이 아예 없는 나랑은... 이게 대체 몇 번째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내려가던 중에 덜컥, 시선이 멈췄다.


“...나타? 잠깐 질문해도 되겠나?”

“네? 네, 말씀하소서.”


갑작스런 질문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던 나타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는 나타에게 물어봤다.

“내 기억으로는 이번에 처음 너를 본다만, 너도 나를  것이 이번이 처음이 맞나?”

“예, 그렇습니다.”

나타의 대답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정보창을 확인해봤다. 역시 내가 잘  본게 아니었다.


“흐음...”

어째서 오늘 처음  나타의 호감도가 20을 넘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상외의 사태였다. 본래 볼 리가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나타의 감정을 읽어낸 것이었다.

고작 해봐야, 나를 향한 호기심에 불과한, 단편적인 심리였지만 말이다. 본의가 아니더라도 이미 봐버린 것은 봐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루시아가 대단하다고 말해도 감이 오질 않았던 내 또 다른 능력인 차원을 넘어선 자보다는 훨씬 가슴에 와 닿았다.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지만 상대의 마음을 단지 정보창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메리트를 가져오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바란다면, 그리고 이 능력을 이용한다면. 누군가의 호감을 사는 것도, 되려 미움을 사는 것도, 나아가서는 마음을 꺾어버리는 것도, 아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고개를 휙휙 내젓고 있는 나를 본 루시아의 물음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들을, 루시아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그럼 다음은 에샤였나?”


“순서대로라면 그렇죠. 하지만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응, 문제없어.”

“그런가요... 이지경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럼 에샤, 앞으로 와주시겠어요?”

“네, 루시아네스님.”

적어도 이 능력을, 내 욕심 때문에 사용하는 일은 없길 바라면서, 나는 루시아의 부름에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에샤를 바라보며 정보창, 하고 입을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