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32화 [광휘의 꽃] (32/370)



〈 32화 〉32화 [광휘의 꽃]
《광휘의 꽃,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원경의 구슬, 그 너머로 비쳐 보이는 이지경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시아네스는 자신의 부름에 지금  도착한 에루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지경님은 어떻던가요?”

루시아네스의 말에 에루나가 대답했다.


“에네스타의 말로는 ‘놀랍도록 성장이 빠르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어째서 그 정도의 육체와 재능을 가지고서 이제까지 그런 수준이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도 했었습니다.”

에루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아네스는 처음 이지경이 소환되었을 때 봤던 알몸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것은, 육체적인 단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루시아네스로써도 감탄이 나올 만큼 훌륭한 육체였다.


그때는 그저, 아이를 만들  남자의 체력이 부족해서 일이 그르치는 일은 없겠구나, 그 정도의 감상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그때는 이지경을 단순히 아이를 만들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소환한 남자로 봤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어도, 단순히 아이를 낳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만 부를 수는 없게 됐다.

물론 지금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했다. 루시아네스가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이지경과 루시아네스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것 말고도 다른 드래곤들과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멀지 않은 미래에 무너져버리고 말테니까.


어쨌거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었다.


현재를, 그리고 지금을 생각하며 루시아네스는 말했다.

“확실히, 이지경님의 육체는 범상치 않았었죠. 투기를 다루는 전사들도 그 수준의 육체를 갖고 있는 자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이지경님의 몸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으니까요.”


루시아네스가 모르는 것과, 드래곤으로써, 보주의 지배자로써 아는 것은 별개였다. 루시아네스는 스스로의 육체를 단련해본적도, 그리고 단련했던 자들의 알몸을 본 적도, 아니 애당초 이성의 알몸을  적도 없었지만, 육체를 단련한 자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선조의 기억을 통해 그 정도의 몸이 흔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수없이 수련을, 뼈를 깎고, 살을 찢는 고행을 겪은 자들도 그런 육체를 갖고 있는 자는 드물었다. 더군다나, 이지경의 몸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수행의 흔적은커녕 그 흔한 굳은 살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처럼.


소환이 아니라, 마치  순간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던 루시아네스가 에루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투기는, 이지경님이 투기를 사용하실  있을 것 같던가요?”


투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힘’의  종류였다. 하나는 루시아네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의 상징이자 이 세상의 근원 중의 하나인 마력. 그리고 그것과 대칭된다고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투기였다.


마력은 투기를 꺾고, 투기는 마력을 베어낸다. 서로가 천적이고 상성이며 동시에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 그 두 가지의 힘이었다.

또한 그 두 가지의 힘은 그 영역조차도 달리 두고 있었다.


마력은 마력 그 자체로 세계의 근원 중의 하나였지만 투기는 법칙에 근거하고 있었다.


재능을 타고 난 자.


오랜 수행을 거듭한 자.

그런 자들에게 투기는 어느 날 갑자기 부여된다. 이것을 그들은 선택을 받았다, 혹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고는 했다.


하지만 루시아네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그리고 몇몇의 초월자들은 알고 있었다.


투기는 법칙에 근거한 힘이었다. 이 세계가,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부여되는 힘이었다.


덕분에 마력은 의지로 움직이지만, 투기는 본능으로 움직였다.

마법은 스스로 깨우치고, 지식을 얻어, 마력을 다스리지만 투기는 본능적으로 그 힘을 다루는 것이 당연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동물이, 태어날 때부터 일어서는 법과 걷는 법, 달리는 법을 깨우치듯이. 투기를 얻는 그 순간부터, 그것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

마력을 사용해서 마법을 부리는 루시아네스와,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만들어진 골렘인 에루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루시아네스가 지금  질문은 에루나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지경을 가르치는 자.


요정향의 검주, 에네스타에게서 무언가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명실상부 검주, 투기를 익힌 자이자 검으로써는 뒤따를 자가 없는 경지에 이른 초인이었다.

아무리 루시아네스라고 하더라도, 본신이 아닌 지금의 몸으로, 거리를 벌리지 않는다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대였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루시아네스가 에네스타보다 약하다거나, 에네스타가 루시아네스보다 강하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간에 이지경을 가르치는 자로써, 그리고 투기에 있어서 이곳에 있어서 가장 전문가인 에네스타의 의견은, 그에 비해 투기에 무지하다고 할 수도 있는 루시아네스와 에루나의 판단보다 훨씬 신뢰성이 있었다.

“예, 에네스타가 말하기로는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능성인가요...”

만약 이지경이 투기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지금 하고 있는 것들, 따지고 보면 훈련이라는 이름의 개조나 마찬가지인 짓을 굳이 하지 않아도 좋았다.

루시아네스도 지금 자신들이 이지경에게 하고 있는 일이, 엄청난 무리를 강요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법과 투기, 싸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무언가를 죽이는 일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지경에게 마법을 피하는 법, 검을 다루는 법, 누군가를 죽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되도록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하고 싶지 않았다.

크리샤네아, 그녀가 루시아네스에게 했던 경고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만일,  가능성이 아무리 적다고 하더라도.

크리샤네아가 이지경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가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이지경이 아니게 만든다면...


아마 그 이후의 일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처럼, 불안한 균형 아래에서 유지되고 있는 세계가 그때도 그럴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만큼은, 그것만큼은 분명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고민, 수십 가지의 주문을 동시에 떠올리고서, 그리고 그것들을 마법으로써 발현하는 것이 가능한 드래곤인 루시아네스는 아주 잠깐 고민을 거듭하고는 입을 열었다.

“에루나, ‘낙스’의 지식을, 그들의 지식을 빌리는 것을 허락할게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힘, 투기를 다루는 법과, 그것을 익히는 법에 대한 모든 것이에요.”

“...알겠습니다. 루시아 아가씨.”

루시아네스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던 에루나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에루나를 보고서 루시아네스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대가는 얼마가 됐던 상관없어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일주일, 길어도 이주가 지나기 전에 이지경님에게 투기를 사용하는 법을 익히게 해야겠어요.”

낙스, 금지된 땅. 버림받은 땅.


그곳의 지식을 빌리는 것은, 그리고 그곳과 이어지는 통로를 여는 것은 본래대로라면 적어도 열이 넘는 드래곤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규율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드래곤은 고작 일곱. 더군다나,  규율이 만들어졌던 시대는  과거, 수백이 넘는 드래곤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때와 지금, 허락에 필요한 드래곤들의 수를 같다고  수는 없었다. 반쯤 어거지나 마찬가지였지만, 루시아네스는 스스로의 주장을, 스스로 납득시켰다.

“경우에 따라서는, 낙시안을 이곳에 소환하도록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런 루시아네스의 말에, 이제껏 수긍했던 에루나가 말했다.


“그건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닙니까?”

낙시안은 버림받은 땅, 낙스의 주민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그들을 소환할 수도 있다는 말에 에루나가 처음으로 루시아네스에게 반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에루나의 의견을 루시아네스는 이해했다.

그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낙스에 버림받고, 과거 수백이 넘었던 드래곤들로부터 감시받았던 이유를, 루시아네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옛 선조들이 그들이 사는 땅과 드래곤들이 수호하는 땅을, 도바난과 아투스, 그리고 낙스로 마법적으로, 물리적으로 분리시켰던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루나의 의견은 타당했다.

“물론 저도 생각 없이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줄 대가로 그것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 낙시안이 가장 바라는 것이 이 땅으로, 자신들이 지배하는 풍요로운 땅으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기에. 그들을 다시 이곳에 돌아오도록 해주겠다는 것은 그들을 내쫓은 종족인 드래곤으로써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단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되도록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수단. 애당초 그들을 소환한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또한 자신들이 내민 조건을 받아들여할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다른 위험을 불러들이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을, 루시네아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만일에라도 그들이 자신이 내건 조건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대처법 또한 있었다.

루시아네스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루나를 보며 말했다.

“게다가... 그들의 힘은 에루나, 당신에게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에루나의 육체는, 혹시라도 있을지도 모르는 만약을 대비해서, 애당초 그렇게 설계되었다. 이지경을 소환하기 위한 대마법에 드래곤들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재보의 9할 가까이가 들었다면, 남은 재보들은 오로지 에루나, 단신의 골렘을 만들기 위해 쏟아졌으니 말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이상은 쓸모가 없어진 드래곤들의 육신, 비늘부터 뼈, 살 조각 하나까지도 오롯이, 에루나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제 아무리 낙시안, 그들이 마법을 다루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천적이라고 할지라도, 마법을 다루며 그들의 힘인 투기마저 통하지 않는 골렘인 에루나에게는 손쉬운 상대였다.

물론 에루나는 혼자이니 많은 수의 낙시안을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거듭된 루시아네스의 설득에 에루나가 아주 잠깐 동안 루시아네스를 바라봤다. 그런 에루나를 보고서, 루시아네스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띄었다.

자신들이 아직 제 앞도 가리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아직 자신들이 연약한 헤츨링에 불과했던 시절을 보살핀 존재가 에루나였다. 그런 그녀가, 애당초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가디언임을, 애당초 그렇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골렘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루시아네스는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인간들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에루나는 루시아네스를 포함한  세계에 남아있는 일곱의 드래곤의 유모인 셈이니 말이다.

제 아무리 이기적이다라는 말에 관용사처럼 쓰이는 드래곤인 루시아네스라도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네스가 쓴웃음을 지은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에루나를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저렇게까지 반대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주인인 이지경님에게는 결코 해가 가지 않을 거예요. 제 이름으로, 파라모아의 지배자이자 천공의 보옥을 다스리는 자로써 약속드릴게요.”

그렇기 때문에 루시아네스는 에루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에루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루시아 아가씨. 아가씨를 시험하는 듯한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당신의 의미는 이제 이지경님을 모시는 것이니까요. 그것을 탓할 생각은 결코 없어요. 오히려 제가 죄송할 따름이에요. 당신의 주인인 이지경님에게도, 그리고 당신의 일을 늘리는 것도, 모두 제가 사죄해야할 일인걸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아네스의 확약을 받고나서야, 고개를 숙이는 에루나를 보고서 루시아네스는 새삼스레 그녀의 모든 것이, 이지경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에, 아주 작은 질투를 느끼는 것은 독점욕이 강한 드래곤으로써의 감정인걸까, 그것이 에루나에게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지경에게 향하는 것인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잘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주 조금의 상실감을 느끼며 에루나를 바라보던 루시아네스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이지경님을 잘 부탁드릴게요.”


“저의 이름에 걸고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에루나를 바라보다가, 루시아네스는 다시 원경의 구슬에 비쳐 보이고 있는 이지경의 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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