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23화 (23/370)



〈 23화 〉23화
“...이게 어떻게 된 일진지 물어봐도 될까요? 카에네스?  가지의 자손이여.”


“그, 그것이...”

 말을 따라서 한 명만이 남았던 공동에 요정향의 대표인 장로인 카에네스라는 청년이 비지땀을 흘리며 말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분 뒤, 빛과 함께 마법진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루시아가 텅텅 비어있는 공동을 보고나서 생긴 일이었다. 루시아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카에네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서 나는 루시아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미안, 내가 부탁한 거야. 그러니까 루시아, 너무 카에네스를 탓하지 말아줘.”


“...이지경님이?”


“네, 루시아 아가씨. 이지경님이 직접, 이지경님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엘프분들을 물리셨습니다.”


 말과 에루나의 말을 들은 루시아가 표정을 피고는 말했다.


“일찍 말해주시지 그러셨어요. 미안해요. 카에네스. 제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다, 당치도 않습니다! 루시아네스님.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아뇨.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당신을 탓한 제 잘못입니다. 추후 이 일에 대한 사과로 보상을 내리도록 하죠.”

“가, 감사합니다. 루시아네스님!”


고개를 푹 숙이며 그렇게 말하는 카에네스를 뒤로하고 루시아가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을 물리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 그러니까...”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 내 약점이라고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울렁거려서 그랬다고 하기엔 부끄러웠다.

“내가 여기에  목적이 루시아의 영지를 보기 위해서였잖아?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랑 움직이기엔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거든.”

“그렇군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모처럼 모두에게 확실히 이지경님을 소개시켜주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그,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주시길. 이지경님의 명으로 모두 물러간 뒤이긴 하나 확실히 요정향의 602명, 아직 분간을 못하는 갓난아이를 제외하고는 이지경님을 뵈었나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일단은 다행이군요.”


602명이나 됐었구나. 어림잡아도 수백 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숫자로 들어보니 그 느낌이 달랐다. 어마어마한 숫자는 아니었다. 기껏해봐야 학교의  학년 수준의 인원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런 인원의 앞에 서본 경험은 내겐 없었다.


하물며 그런 인파가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온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장난이 아니었다. 물리길 잘했다.


“그럼 카에네스.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루시아네스님. 그리고 이지경님, 저만 믿어주십시오!”

“아, 응. 부탁할게. 아니, 부탁한다. 카에네스.”


“네! 맡겨주십시오!”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호쾌하게 그렇게 말하는 카에네스를 보며 나와 루시아가 부탁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이곳이 저희 요정향의 자랑이자 중심인 ‘에이그라’입니다.”

“헤에...”

자못 자랑스럽다는 것을 얼굴에 숨기지 못한  그렇게 말하는 카에네스가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여태까지 카에네스가 안내해주며 보여준 것도 굉장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은 못했다.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지만 뭘 어쩌겠나, 내 어휘가 부족한걸. 아무튼 눈앞에 있는 거대한 나무. 녹음으로 우거진 이곳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눈에 띄는 거대한 나무의 모습에 감탄밖에 나오질 않았다.

“‘에이그라’라면  나무의 이름인가?”

“맞습니다. 우난나의 중심을 잇는 세계수의 자손, 그 중 하나가 저희 요정향을 수호하고 있는  나무, 에이그라입니다.”

“수호라고?”

“네, 세계수에는 여러 가호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손이기도 한 에이그라 또한  가지의 가호가 존재합니다. 그  하나로 저희 같은 요정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종족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내리는 가호가 존재하고 있죠. 에이그라의 영향권에 있는 이 숲에 있는 한, 저희 엘프들을 비롯한 여러 요정족들은 중상을 입더라도 죽지 않고 회복하거나, 애당초 중상을 입을 법한 위험에서 보호받기도 하죠. 높이가 높은 나무에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던가, 화살이 빗맞는다던가...”

“그건 굉장한데.”


새삼스러운 눈으로 눈앞에 있는 거대한 나무, 에이그라를 보고 있을 때였다.

“실은 이번에도 에이그라의 도움을 받았던 일이 있었지요.”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던 카에네스가 앗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도움이라면?”


그리고 그런 카에네스를 보고서 루시아가 그렇게 묻자 카에네스는 허겁지겁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루시아네스님! 제 실언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카에네스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카에네스를 본 루시아가 눈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카에네스, 제가 물은 것을 무시할 생각인가요?”

“겨, 결코 아닙니다! 루시아네스님! 하, 하지만 감히 루시아네스님과 이지경님의 앞에서 꺼낼만한 이야기가 아닌 터라...”

“그것은 당신의 판단이겠죠. 이야기를 하세요. 지금 당장. 명령입니다.”


옆에 있는 내가 보기에도 서슬이 퍼런 루시아의 말에, 그 대상이 된 카에네스가 얼마나 압박감을 느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가는 카에네스가 보였다.


“루시아, 그쯤 해둬.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도 아닐지도 모르고...”

“아뇨, 이지경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카에네스는 분명 이지경님을 보고서, 말하기를 꺼려했죠. 만약 그저 카에네스가 말하기를 꺼려했을 뿐이었다면 저도 눈감아 넘겨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이지경님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이야기가 된다면 말이 달라지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의 눈빛이 바뀌었다.

“지금 당장.  하나의 거짓도 없이 저에게 모두 말하세요.”


노예.

우리의 세계에서도 그 이름은 익숙히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던 현대의, 그것도 대한민국에서는 ‘노예’라고 부를만한 존재는 없었다. 물론 인간과 인간간의 차별이나 뿌리 깊은 갈등을 빚어왔던 권력을 지닌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말만 바뀌었을 뿐이지 비슷한 것은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슷한 것뿐이었다. 대개 우스갯소리나 비유에 사용될 뿐이지, 정말로 노예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세계, 내가 이전까지 살고 있었던 세계의 경우였다. 어디까지나 내가 살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경우였다.





 세계에는 노예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노예를 잡아들이는 사람도 존재했다.

노예사냥꾼.


그렇게 불리는 존재가 내 눈앞에 있었다.

“크흐...”

신음인지 기침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하나만 남은 팔과 다리가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카에네스에게 듣기로는 이 남자를 비롯한 서른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의 노예사냥꾼들이 이곳에 쳐들어왔었다던 모양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에루나가 말했듯이, 그리고 내가 보고 느꼈듯이, 이 요정향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은 하나같이 미인들이었다. 우리 세계에서도 우스갯소리로 미인들이 널려있어서 밭을 가는 여자나 소를 키우는 여자들의 얼굴을 봤더니 하나같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미녀이더라, 하는 나라로 유명한 곳이 있었다.

근데 여긴 그곳보다 더했다. 당장 이 남자가 구금되어 있는 이곳을 지키고 있는 보초도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면 연예계에 태풍을 몰고 올 듯한 비쥬얼을 하고 있었다.

노예사냥꾼인 이 남자가 이곳에 온 이유 같은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간과한 게 있다면, 이곳에서 사는 엘프들은 단순한 엘프가 아니였다는 점일 것이다. 우선 세계수의 자손, 에이그라의 가호가 있었다. 에이그라의 보호를 받는 엘프들은 남자들을 비롯한 노예사냥꾼들이 쏘아대는 화살이나 그물들의 대부분이 빗나갔다.


애초부터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만큼, 엘프들에게 과한 공격을  수 없는 것이 노예사냥꾼들이 갖고 있던 패널티였다. 그런데 공격수단 중의 하나는 아예 통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접근전, 힘으로 밀어붙여서 제압하는 방법뿐인데...

결과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대신 말해주었다.


상처들은 이미 지혈을 마쳐서 더 이상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지혈일 뿐이었다. 이미 잘려져 나간 팔이나, 엘프들이 쏜 화살을 잘못 맞아 잃게 된 눈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전부 남자의 업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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