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19화 (19/370)



〈 19화 〉19화

심장이 욱신거렸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가벼운 탈력감. 하루 종일 운동이라도 한 것 같은 피곤함이 단번에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 세계에 소환된 뒤로 요 며칠 동안은 느껴본 적이 없었던, 덕분에 잊고 지내고 있었던 피곤이라는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살면서 피곤하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피곤한  정도는 나중에 잠이라도 자면 그만이었다. 그것도 뭐하면 만드라고라 쿠키 하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문제는 여전히 침묵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  생각하지 않고 말을 꺼낸 것은 좋은데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진 나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는 루시아. 그런 우리 둘이 커다란 식탁, 여덟 명이 빙 둘러 앉아도 자리가 남았던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본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

말을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웠구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었구나. 이곳에 와서 새롭게 알아가는 것이 너무 많았다. 딱히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알게 되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모르는 것은 알아가면 그만이다. 알기 힘든 것이라면 이해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문제였다.

내가 두려운 것은, 이걸로 우리 둘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었다. 관계라고 부르는 감정이, 상처입고 부서지는 것이었다. 내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었다.


또 다시, 내가  말이 누군가를 상처 입힌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침묵은, 고요는 자꾸만 그런 것을 떠올리게만 한다. 그래서 내가 조용한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내가 고요한 것을 싫어했다. 고요하고, 그리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떠올릴만한, 어떤  못이나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는 선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선인이 아니었다.


나는 결코 선인이 될  없었다. 나는 어느 곳에서나 볼  있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잘 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하고, 그리고 다시 뉘우치고, 또 잘 못을 저지르는,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아마 내가 침묵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짧지만 내게는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루시아였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듯이. 이런 분위기는 끝이라는 것을 알리듯이. 루시아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럴 때는 거짓말이라도 좋아한다, 아니면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남자라는 생물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이지경님은 이상한 분이군요.”

그렇게 말해온 루시아의 눈은 처음 그녀를 봤을 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같은, 햇살을 머금은 듯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  눈 안에 내가 비쳐 보이고 있었다. 저 눈이 방금 전까지  전체를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리고 그런 루시아의 모습에 미처 안심할 겨를도 없이, 루시아가 말했다.

“정말로 이지경님은 저희들을 꼬실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으응?”

...뭐라고 대답해야하는 거지? 갑자기 훅하고 들어온 루시아의 말에 머릿속이 벙해졌다. 내 인생, 달력이 스물일곱 번이나 바뀔 동안 살아온, 짧지만은 않은 인생동안 살아오면서 여자가 나를 꼬실 생각이 있기는 하냐는 질문을 해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니, 일단은 있는데...”

 결과,  대답은 이거였다.

취소. 이건 대답이 아니라 어떤 병신같은 머저리의 울음소리였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나 좋아해? 그렇게 묻는 여자에게 일단은 좋아한다고, 그렇게 대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일단은, 하고 붙어있는 것부터가 에러였다.


나는 대체  이런 대답을 한거야?!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안나왔다. 노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둔감한 내가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던 대답을, 루시아가 좋게 들었을 리가 없었다.

“...일단은요?”

단숨에 쩌억하고, 다시 세로로 갈라지려고 하는 루시아의 눈동자가 보였다. 망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기도 전에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아니, 물론 있지. 엄청 있지. 응, 그야, 당연히 있지.”


“흐응...”


내가 생각해도 빠른 대처였다고 생각한다. 아니, 한심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를 보는 루시아가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심장이 쪼그라지는 느낌이었다. 그저 한숨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방금 전에 노려봤던 것보다 마음  깊숙이 무언가가 꽂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어째 이쪽이 데미지가  크다? 고작 몇 분에 불과한 시간동안 노려봐진 것만으로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안 그래도 달라붙고 있던 핑크발랄한 옷이 내 몸이랑 완전결합을 이루려고 하는데다가 아플 정도로 뛰어대고 있는 심장보다도, 방금의 한숨 때문에 가슴 깊숙이 데미지를 입었다.


정신 차리자, 이지경아. 여기서 한번 만 더 실수하면 못 버틴다. 그대로 졸도할 자신이 있으니까, 응? 그래, 사유는 정신적 데미지로 인한 멘탈 붕괴같은 거로.

좋아, 이제 실수는 안한다. 그런 각오를 다졌다.


그보다 조금 노려봐진 거로 이 모양이 됐다니 조금 꼴이 우스웠다. 뭐, 별 수 있나.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나와 루시아의 사이에 있는 거니까. 그녀는 용, 드래곤이었고 나는 인간이었다. 나는 약하고, 그녀는 강했다.

내가 무슨 마초정신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서, 여자보다 남자가  강해야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니까 여기엔 별 문제가 없었다. 단순한 사실이 그런거니까. 뭘, 우리 집도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강했다. 힘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무튼 아버지보다 더 강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약한 것 쯤은 아무런 흠도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조금 노려봐진 걸로 옷이 좀 축축해질 수 있는거다. 응, 그렇다고 치자. 완벽한 논리였다. 그러니까 그런거로 치자고.


잠깐 애꿎은 아버지를 들먹이인 못난 아들에게, 루시아가 말했다.


“이지경님? 제 말 듣고 있나요?”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뇨, 저야말로 방금은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였으니까요.”

“아니, 아니지. 나야말로 미안해. 너무 생각없이 말한  같아서.”

“아뇨, 저야말로 죄송해요.”


잠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서로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사과를 하다니, 거기에 다시 한  침묵. 이런 시츄에이션은 어디선가 본 적이 없었다. 어디였더라. 하지만 아까처럼 거북한 침묵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었다. 루시아가 살짝 눈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아주 살짝, 눈여겨서 바라봐야지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눈웃음이었지만.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지은채로, 루시아가 내게 말했다.


“정말로, 이지경님은 이상한 분이네요.”

“응, 나도 절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가요? 그렇다면 아마 이지경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지경님은 더 이상한 분이실거라고 생각해요.”

아까부터 예고도 없이  들어온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루시아는 원래 이런 성격이였으니까. 오히려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매도를 받으면 흥분하는 분류의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루시아의 농담을 받으면서,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게 아냐?”


나 이상으로 이상한 것이 있다면 이미 몬스터가 아니냐는 농담이었다.  세계에는 인류와 흔히들 판타지에서 나오는 엘프로 알려져있는 요정들, 정령, 그리고  외에도 다양한 인종들이, 그리고 몬스터라 불리는 괴이, 괴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즉, 이 농담은 이 세계에서만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런 내 말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이게 아닌데. 거기서는 부정 해줘야하는데.

“아,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일단은 칭찬이니까요.”


“...일단은?”

“아까의 복수랍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말이 없지.

“하지만 칭찬이라는 말은 진심이에요. 다만... 그건 이지경님의 단점이기도 하군요.”


“단점이라고?”


“네, 이지경님은 지나칠 정도로... 그야말로 자신보다도, 다른 누군가를 더 위하시니까요.”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한다고?”

“이지경님이 저희들을 생각하시는 것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루시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지나칠 정도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에.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선한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만을 우선했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내가 남을 위한 적은 단언컨대, 단  번도 없었다.

내가 그녀들의 말대로, 그녀들을 안고, 아이를 만드는 짓을 하지 않은 것은, 그저 내가 그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싫었다. 그녀들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데도, 전혀 알지 못하는 나와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운명이 싫었다. 나의 자식들이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싫었다. 그저 싫었다. 그런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누구보다도, 내가. 그저 내가 그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은 선의가 아니였다. 내 아집에 불과하고, 내 고집에 불과했던, 나의 어리광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그것을, 그녀들이 선의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마저 싫어 할 것이다. 내가 한 짓은 결코 선의가 될 수 없으니까. 차라리 욕을 하는 것이  편했다. 당신의 이기심 때문에, 이 세계는 실시간으로 망해가고 있다고, 그렇게 욕을 하는 것이  좋았다.


내 이기심을, 내 고집을, 내 아집을, 내 편견에,  개똥만도 못한 윤리의식을. 선의로 포장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선인이 아니다. 선인일수가 없었다. 만약 그랬었다면...


“지금도, 이지경님은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뭐?”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그리고 그런 미소를 띈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이지경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묻고 싶은, 거?”

“네, 묻고 싶은 것. 부디 대답해주시길.”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루시아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가 내게 물었다.

“이지경님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어떤 점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 사람의 외모? 아니면 가지고 있는 재력?  사람의 강한 정도? 권력?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시아의 말에 그렇게 되묻자, 루시아는 대답했다.


“저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타고난 외모와 그것을 가꾸고, 관리하는 능력. 가지고 있는 재력과 그것을 불리고 유지하는 능력. 강건한 신체와 꾸준히 단련하고 정진하는 능력. 사람의 위에 서서, 계속해서 군림하는 능력. 남을 배려하고, 선처하는 능력. 마력을 다루고, 마법을 부리는 능력.

그런 능력들.

무수히, 열거하기도 힘든 많은 능력들.

“아마, 이지경님이 저희들의 정보창...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기 꺼려하신 것은, 당신이 상냥하시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능력이에요.

루시아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당신의 능력. 그것을 당신 스스로가 거세하고, 다루지 않는 것을. 적어도 저희들은, 드래곤들은 배려라고 보지 않아요. 상냥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지경님의 친절함은, 적어도 저희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거죠.”

“나는 그런 생각이었던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답한다면 그 결과는 뻔했으니까.


“그렇다면 이지경님. 꺼릴 것이 없다면 제 것을 바라봐주세요. 당신의 눈으로. 저의 정보창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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