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7화
차라리 여태껏 입어왔던 옷들이 나았다. 조금 화려한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지금 입은 옷처럼 핑크발랄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모처럼 루시아가 준비해준 옷이었다. 게다가 인간 세계에서 유행한다는 옷이었다.
사실 내가 여태 입어왔던 옷들은 가장 최신의 것도 300년 전, 200년 전 하던 것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엄청 오래된 옷들만 입고 있던 것이 됐다. 물론 아무리 봐도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옷으로는 안보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원래 세계로 치면 썸을 타는 여자가 한참 유행이 지난 후줄근한 옷만 입고 다니던 남자에게 요즘 유행하는 옷 한 벌을 맞춰준 것과 마찬가지인 거다.
옷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감동 받았다. 게임 시스템으로 말하면 루시아에 대한 호감도가 10정도 상승했다. 옷 한 벌로 너무 공략하기 쉬운 남자가 된 건가 싶지만.
"......"
근데 색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바지는 왜 이렇게 쫀쫀해? 이래서야 가운데가 너무 덩그러니 노출되잖아. 400년이 넘도록 의류계의 초월자는 등장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초월자는 나왔는데 디자인의 개념이 범인이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나.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옷의 디자인은 나에게는 영 그랬다. 최신의 옷이라더니 입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제대로 입은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제가 보기엔 무척이나 잘 어울리시니까요."
그런 나를 보고서 에루나가 그렇게 말하며, 내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내가 에루나의 감정을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에루나도 내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옷에 대해 걱정하는 나를 보고서 그렇게 말해준 것 같았다.
"고마워. 근데 진짜 어울리는 거 맞아?"
"제가 주인님께 거짓말을 할리가 있겠습니까?"
...글쎄다? 에루나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더라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할 것 같은 이미지고.
그런 내 감정 역시 읽었는지 에루나가 말했다.
"섭섭하군요. 주인님께 이토록 충실한 저인데... 그렇게 불안하시다면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감?"
"옷을 입은 주인님에 대한 소감입니다."
뭔가 불안했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원래 옷이라는 것이 누가 보고서 평가하는 거지 본인은 잘 알지 못하는 법이니까. 에루나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사실은 꽤 멋지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네가 보기엔 어떤데?"
내가 보기엔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도 주기 힘든 이 핑크발랄한 옷에 대한 평가를 말해봐라.
"예, 고간이 도드라진 것이 그나마 봐줄만한 주인님의 장점이 두각 되어보여서..."
"스톱. 거기까지."
이제 알겠다.
에루나는 입을 닫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다시 옷을 갈아입기엔 시간이 없어서 에루나의 감상대로라면 내 남성적인 매력을 다소 돋보이게 해줬다는 핑크발랄한 옷을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그냥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말이다. 돌아가는 길은 에루나가 벽처럼 가로막고 있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식당으로 향하는 통로를 걸어오는 동안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어느새 식당 앞에 도착해버렸다.
이제 돌아가는 건 글렀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서 문고리를 붙잡고 지금 열까? 하는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에루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네요. 이지경님.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에루나가 문을 열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인지 식탁 앞에 앉아있던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며 맞이해주었다.
나름 빨리 오려고 했는데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면 아마 더 오래 기다리게 했을거다. 조금 부끄럽기는 한데 그냥 입고 온게 맞았던 것 같았다.
나는 에루나가 빼내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이야. 일주일만이었나?"
"정확히는 6일하고 18시간이지만요."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뭐지? 뭔가 잘 못 됐나?
"그 옷..."
"아, 이거? 루시아가 준거라면서 고마워. 잘 입을게."
내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재봉가가 만든 옷이라더군요. 옷이야 엘프들이 만든 것을 제일로 친다고는 하지만 이지경님은 인간이시니까, 아무래도 인간들의 감성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구해봤어요. 흐응... 인간들의 옷도 썩 나쁘지는 않네요."
띠링~
['루시아네스 파라모아'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모습에 적잖이 감동합니다. 호감도가 1만큼 상승했습니다!]
아무래도 루시아의 눈에는 좋게 보이는 듯 했다.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알림음 소리에 의하면 그랬다. 대체 이 옷의 어디에서 감동을 느낄만한 구석이 있는걸까 의심됐지만, 아직까지 알림음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이상한 건 이곳의 옷이 아니라 내 옷 센스인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래도 이 핑크발랄한 옷은 아니지 않아?
"에루나. 잠시 나가 있어주시겠어요?"
그때 루시아가 에루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에루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에루나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루시아 아가씨의 말씀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제 주인님은 어디까지나 주인님이시기에. 설령 아가씨의 말씀이라고 해도 주인님을 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밖으로 나갈 줄 알았던 에루나가 정면으로 루시아의 말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서 조금 놀랐다.
내 말에는 곧이곧대로 따르는 에루나여서 그런 걸까, 에루나가 무언가를 거부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근데 뭔가 말하는게 혼자 두면 사고치는 아이라서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말하는 부모 같은 느낌이었다. 내 착각이겠지?
아무튼 루시아는 에루나가 거절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눈을 하다가 곧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에루나, 당신의 주인은 이제 이지경님이셨죠. 좋아요. 에루나의 뜻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뭔가 큰일이 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조마조마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 일 없었다. 다행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루시아가 말했다.
"그럼 이지경님. 부탁드릴게요. 에루나를 잠시만 밖으로 내보내주시겠어요?"
여기서 활시위를 나한테 겨눌 줄은 몰랐는데. 대뜸 나한테 에루나를 내보내라고 말한 거나 마찬가지인 루시아를 보다가, 원하시는 대로 하라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에루나를 봤다가, 다시 아직 음식조차 나와 있지 않던 식탁을 봤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다리가 휘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가득해야할 식탁이 처음부터 비어있던 것을, 단순히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식사는 명분이고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걸까.
나는 다시 루시아를 보고서 말했다.
"에루나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아뇨. 하지만...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다, 그 걸로는 안되는 걸까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에루나, 잠시만 나가있어 주겠어?"
"네, 주인님의 뜻대로."
에루나가 내 말을 따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서 밖으로 나가자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에루나에게 듣기로는... 독서에 열중하고 계시다고 하던데, 이 세계의 책은 읽을 만하시던가요?"
"응. 꽤 재밌던데?"
처음부터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그저 그동안의 일을 묻는 루시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서 그렇게 말했다.
빈 말이 아니라,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흥미로운 것들이 잔뜩 있었다.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해야 할까.
특히 마법 이론에 대한 책은 이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라서 그런지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내가 비록 마력은 0이지만, 마법의 기본적인 이론은 이제 빠삭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마력은 0이지만.
거기에 책의 내용도 좋았다. 하나같이 초월자, 천재들이 쓴 책이라 어려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일반인도 읽을 수 있게 만든 것처럼, 쉽게 가르쳐주듯이 설명하는 것들이나, 그림 같은 예시라던가 있는 것들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꽤 오래된 책들의 경우에는 양피지나, 무엇인지 모를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도 있었지만 어느 기점에서부터는 종이책들로 바뀌어 있었다.
무려 종이책이다. 그야 종이의 질은 원래 세계에 있던 것처럼, 희고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종이, 라고 부를 정도의 것은 됐다. 그런 것으로 책을 엮을 정도이니 이 세계에는 어느 정도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법이 갖춰져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종이의 개발, 그리고 활자로 인한 대량 인쇄. 그걸로 인류의 정보 전달, 보존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세계의 인간들의 수준이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게 아닐까 싶었다.
활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이유는 종이책이 등장했던 것처럼 어느 기점부터 같은 글씨체로 쓰인 책들이 많아서 그러지 않을까 생각한 거지만 아마 확실할거다. 수백 년 동안 초월자들의 책을 전담해서 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을 테니.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보다. 루시아가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지경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이지경님이 저희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적어도 저라도 이지경님을 알아가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려고 생각했어요. 괜한 짓을 한걸까요?"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오히려 고마운걸."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내 말이 단순한 고집인 걸 알고 있었다. 그녀들이 원한 것이 나와의 자식이기에, 그리고 내가 그녀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이기에 반쯤 어거지나 마찬가지인 이야기를 받아들여 준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협박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질이 나 자신이라는 것이 조금 특이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충분히 협박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를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에게 나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지경님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계신가요? 혹시… 무리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지금의 생활? 무리?
루시아의 말에 최근 일주일간 해왔던 것을 생각했다. 에루나가 가져다 준 책을 읽고, 에루나가 가져다 준 간식을 먹으면서 책을 읽고, 책에서 얻은 기능을 시험하는 겸 사용해보다가 특성을 얻고, 덩달아서 기능의 등급이 상승하고 그런 것을 반복하던 일주일을 떠올렸다.
나, 잠은 언제 잔거지?
지구력만 유지된다면 개변자를 통해서 피로조차 못느끼는 몸이 되어버린지라, 에루나를 통해 만드라고라 쿠키라는 사기적인 간식을 알게 되고 먹게 된 이후로는 잠을 잔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정상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그랬다.
그런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말했다.
"잠조차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책을 읽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혹시… 저희 때문에 지나치게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아, 아니. 걱정 하지마. 무리 같은거 안했으니까."
걱정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에게 허겁지겁 그렇게 말했다. 나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원래 밤샘에 익숙했고, 피곤하면 그때서야 자기도 모르게 뻗어서 기절하듯이 자는 것에 익숙한 생활을 보냈으니까.
잠을 자지도 않아도 되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만난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된 루시아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니까. 내가 내 자신에 있어서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나야 졸리지 않으니까 안자도 되네, 좋네, 그 정도의 감각이었던 것도 있었지만.
그리고 나야 괜찮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지만 그걸 옆에서 보아왔던 에루나나, 그 이야기를 들어온 루시아는 어떻게 생각했을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세계의 인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인간이라면 잠도 안자고서 일주일 내내 책을 읽고 있는 것은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생각해보니 에루나도 몇 번인가 오늘도 주무시지 않으시는겁니까, 이래서야 밤시중은… 하고 중얼거렸던 것을 몇 번 들었었지. 언제부턴가 아무래도 좋다는 모양으로 밤시중이니 뭐니하면서 덤벼들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건 내 불찰이었다.
지금도 괜찮다는 내 말에, 오히려 의심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아를 보면서 뭐라고 말해야할지 뭐라고 말해야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야 설명할 방법은 있었다. 이 곳에 와서 묘한 능력들을 얻었다는 것을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전에 생각도 했었다. 내가 갖게 된 능력에 대해서 물어보자고. 도중에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관뒀을 뿐이지.
"이지경님?"
내 이름을 부르며,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루시아를 보면서.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