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5화 [광휘의 꽃]
《광휘의 꽃,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최후의 금색용.
그렇게 부르기엔 아직 이르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유일한 금색용인 루시아네스 파라모아는 눈앞에 있는 수정구슬을 바라봤다.
수정구슬의 정체는 원경의 구슬. 한번이라도 마주한 존재라면 그 존재가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구슬의 너머를 통해 비쳐볼 수 있는 마도구였다.
그리고 그 원경의 구슬 너머로 비쳐 보이는 것은 대마법에 의해서 차원을 넘어 소환된 이지경이라는 인간 남자였다.
“흐음...”
책을 다 읽었는가 싶더니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이지경을 루시아네스는 천천히, 감정하듯이 훑어봤다.
드래곤인 그녀에게는 인간의 미추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지경이란 남자는 결코 미남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지경이라는 남자가 추한 외모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평범하다. 백 명의 인간 남자를 본다면 그 중 하나는 이지경이라는 남자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은, 그 정도의 남자였다.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옷을 입기 전에 봤었던 그의 알몸... 육체정도일까.
명인의 손으로 빚어낸 조각상처럼, 균형 잡힌 육체만큼은 아마 인간들의 기준으로도, 그녀로서도 훌륭하다고 칭찬해줄만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토록 훌륭한 몸을 하고 있는 주제에, 이지경이라는 남자의 몸에서는 여향이 나지 않았다.
차원의 너머에는 저런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 여겼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미의 기준이란 것은 장소가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변하고는 하니까. 심지어 차원이 다르다면 단순히 기준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날 얘기가 아니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자를 보는 기준은 이곳과 다를 바가 없는 듯했다.
한순간이었지만 자신들의 목적을 말했을 때 이지경이라는 남자의 눈에 스쳐지나갔던 정욕의 감정은, 자신들에게도 욕정을 한다는 좋은 증거가 됐기 때문이었다. 이지경이라는 남자가 설령 차원의 너머에서는 소수에 속하는 특이한 성취향을 갖고 있던 존재라고 해도, 오히려 좋은 얘기였다. 어쨌거나 자신들은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지경이라는 남자는 자신들을 취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요...”
결코 자랑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비롯해서 자매들... 크리샤, 아르카, 카르네, 다소 취향을 탈지도 모르겠지만 아냐와 아샤, 그리고 샤르까지. 하나같이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런 여자들이, 양 팔로 안아도 자리가 모자랄 여자들이, 한 남자의 아이를 원한다고 말한다.
아마 정상적인 성능력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눈이 돌아가서, 당장 짐승처럼 그녀들을 덮쳐눌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실제로 그녀들은 거기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일단은 격식을 갖춰 옷을 입었지만, 옷 밑으로는 언제든지 알몸이 되도 불편하지 않도록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을 정도로.
하지만 그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그걸로 좋냐며 질문했다.
이상한 남자. 루시아네스는 이지경이라는 남자를 그렇게 평가했다. 동시에 그런 이지경이 싫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재미있다, 그렇게 여겼다.
만약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만약 자신이 이 세계에 남은 일곱뿐인 드래곤이 아니었더라면, 만약 자신이 과거의 드래곤들처럼, 인간 세계에서, 인간의 몸으로 유희를 즐기는 중이었다면...
아마 이지경과 같은 남자와 밤을 보냈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의 인생동안을 옆에서 지켜봤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의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그런 만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단지 재미로 이지경이라는 남자를 소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됐으니까, 차원의 너머에서 온... 마왕의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와의 아이가 필요해서 소환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씨앗을 제공해줘야 할 남자가 저런 태도로 나온다는 것은, 개인의 흥미나 재미와는 별개로, 드래곤으로서는, 세계를 수호해야할 드래곤의 의무를 위해서는 결코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시아네스는 이지경이란 남자에게 마법을 걸려고 했다.
금색용, 창공의 보옥을 지배하는 드래곤. 그 말은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신계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드래곤이라는 소리였다. 고작 일곱 밖에 남지 않은 드래곤 중에서 제일이라고 칭해봤자 그 이름이 빛바랜 것 같기는 했지만, 루시아네스를 비롯해서 현재 남아있는 모든 드래곤들은 부모로부터 힘과 지식을 물려받았다. 아마 지금 남아있는 드래곤들은 유일한 드래곤들이자, 역대급으로 강력한 드래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최연소의 나이로, 모두가 로드급의 능력을 갖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보옥을 지배하는 드래곤으로서는 다들 최연소의 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루시아네스가, 하물며 자신의 영지에서 보옥의 힘을 빌려 사용하는 마법은 설령 초월자라도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이지경이라는 남자를, 개인으로서는 그만큼 좋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강력한 정신계 마법은 자아를 파괴해버린다. 그런 짓까지 하는 것은 아무리 방약무인한 드래곤들이라고 해도, 아주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필요하기에 차원의 너머에서 소환한데다가, 정신을 파괴해서 목적만 이루고 내버린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단지 이지경이라는 남자가 재미있어서? 아니면 정말로 아주 조금 느낄 뿐인 죄책감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그저 욕망에 따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을 텐데도, 오히려 자신들을 걱정해주었던 것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루시아네스는 이지경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맹세를 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룬다면, 다시 원래의 차원으로, 세계로 보내주겠다고. 힘들기는 하겠지만 소환할 수 있는 이상, 조금 비틀어서 되돌려 보내는 마법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사람당 네다섯의 자식을 얻어야 했다. 그러기까지는 적어도 수십 년은 걸릴게 분명했다.
차근차근 마법을 수정해가면 언젠가는 만들어지리라, 그런 계산도 있었다. 물론 단순히 보내주는 것만으로 끝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낳을 자식들의 아버지가 된 남자였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다른 인간들이나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생을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많은 부,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할, 건강하고 긴 수명의 신체까지. 그것들을 약속하고, 루시아네스는 이지경의 정신을 제압하고자, 정신조종의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마법에 실패한 것이다. 정확히는, 이지경이라는 남자가 드래곤인 자신의 마법에 저항했다.
그때, 루시아네스의 안에서 이지경이라는 남자의 평가는 급상승했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평범한 인간이라고 여겼던 존재가. 아니 평범하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마력 하나 느껴지지 않는 존재였던 이지경이, 자신의 정신조종 마법에 저항했다는 사실은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어진 다른 계통의 정신마법 매혹과 아르카의 나무의 창까지 저항하고, 막아내는 이지경을 보고서 루시아네스를 비롯해서 다른 모두가 이지경이라는 존재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대마법이 소환한 남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심통이 나서 드래곤답지 않게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지경에게 험한 말을 하던 크리샤조차도 한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으니 말이다. 물론 금세 표정을 바꾸긴 했지만, 아마 이지경을 제외하면 모두가 봤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크리샤를 제외한 모두가 이지경이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만 해도 이지경을 보는 드래곤들의 시선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냐나 아샤의 경우에는 단순히 흥미의 범주에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1년이라...”
1년 안에, 자신들을 반하게 만들겠노라고 선언한 인간.
또 1년안에 자신들에게 반하겠노라고 선언한 인간.
이지경을 선언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루시아네스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수정구슬이 비쳐보이던 이지경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지경의 얼굴을 보면서 루시아네스는 입을 열었다.
“재미있겠네요. 과연 당신이... 어떻게 저희들을 유혹할지.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걸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한번 손가락을 움직이자 수정구슬에 비쳐보이던 이지경의 모습은 사라지고, 평범한 수정구슬로만 보일 뿐이었다.
“...아.”
그리고 그 수정구슬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루시아네스는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웃고 있었다.
이지경과 대화했었을 때도,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놀랐었는데. 이번에는 그저 이지경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래에 있을, 아직 불확실한 일을 상상한 것만으로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에 루시아네스는 말없이, 손가락을 뻗어 수정구슬을 어루만졌다.
수정구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손가락에 닿자 천천히 일그러져 이윽고 원래의 꾸며낸 얼굴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선대의 기억과 지식을 이어받았다. 덕분에 루시아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드래곤으로서는 아직 유아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마법의 힘을 부릴 수 있었고, 보옥마저도 지배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일어난 폐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크리샤네아에게는 오만함이 생겨났다. 드래곤으로서 오만함은 결코 죄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수호자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존중이란 것조차 잊어버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죄악이 된다. 크리샤가 그렇게 오만하게 된 이유는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으로서, 아직 덜 성숙한 이성에, 강력한 힘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성적인 드래곤이었다면, 오늘 있었던 일처럼 세계의 위기라는 중대한 사태에서 단지 인간처럼, 자신들보다 하등한 종족이라고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크리샤는 그렇게 했다. 오만, 그것이 크리샤에게 생겨난, 드래곤으로서의 하자였기에.
아르카네스에게는 나태함이 생겨났다. 이 역시 드래곤으로서는 결코 죄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르카네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 숲의 보옥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 조차 귀찮아했다. 아르카네스가 보옥의 관리자로부터, 보옥을 넘겨받은지 벌써 20년. 그 동안 몇 번이나 사고가 있었는지... 이 역시 드래곤에게 있을 리가 없었던, 아르카네스의 하자였다.
카르네오스에게는 불안정이 생겨났다. 그녀의 감정은 뒤죽박죽이다. 금세 화를 내기도 하고, 금세 슬퍼하기도 했다. 오늘은 비교적 괜찮았던 편이었지만, 그녀는 드래곤이 가져야할 ‘완벽한 이성’과는 거리가 먼 드래곤이었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드래곤만큼 위험한 생물은 이 세계에는 없다. 만약... 드래곤들이 많던 시절에 카르네오스가 태어났었던 거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동족들로부터 감금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샤르비오나에게는 감정이 없었다. 카르네오스와 정반대라면 정반대이고, 그렇지 않다면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오직 필요한 일을 하고, 정해진 것을 한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일이면 하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하지 않았다. 이걸 ‘완벽한 이성’이라고 포장한다면 그렇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럴까? 수십 년을 자매처럼 같이 자라온 루시아네스였지만, 알 수 없었다.
아샤네오나와 아냐세오스. 이 둘의 경우에는 특이했다. 애당초, 그녀‘들’인 것조차가 이상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였어야 하니까. 다른 모두가 부화했을 때에도, 비정상적으로 늦게 태어난 둘은, 이후로도 성장이 느렸다. 이미 익혀야할 지식의 대부분이 전승되었던 것이 아니었더라면, 물의 보옥을 지배하고, 이 세계의 물이 안정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세월이 걸렸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
루시아네스, 자신의 이상을 그 본인인 루시아네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전승된 지식과 힘, 그리고 이미 정해져있던 사명.
그것은 루시아네스 파라모아라는 드래곤의 개성을 앗아갔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루시아네스 파라모아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인, 그저 드래곤이었다.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보옥을 지배하는 드래곤.
루시아네스는 자기 자신을, 그저 하나의 부속으로써 여기고,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아무리 드래곤들이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몸을 바칠 수 있다지만, 싫은 것은 싫은 것이고, 빠질 수 있다면 빠지려고 들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몇 마리 남지 않아서 차원의 너머에서 남자를 소환해야 될 지경이 된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루시아네스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자신의 필요가, 이 세계의 유지를 위한 것이란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자신이 먹는 음식이, 자신이 배워야할 모든 것들이.
그렇기에 루시아네스는 모든 것에서 기계적이었다. 어쩌면 골렘인 에루나 투아레가 자신보다 더 잘 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자신이었을 텐데...
“...기대라는 말은, 이렇게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군요.”
루시아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미 빛이 바랜 원경의 구슬을 하염없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