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4화
태연한 얼굴로, 엄청난 폭탄 발언을 내뱉은 에루나를 바라봤다. 방금 내가 뭔 소리를 들었던 건지 이해가 잘 안됐다. 정확히는 이해가 가기 전에 뇌에서 차단한 느낌에 가까웠다.
멀쩡하게, 아니, 누가 봐도 미소녀에 속하고 있는 외모의 소녀가 해서는 안 될 말을 눈앞에서 아무런 경고도 없이 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걸 아무런 필터도 거치지 않고 듣게 된다면 아마 나랑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될게 분명했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들어는 봤냐고 묻고 싶다. 들어봤냐고. 미소녀가, 자신한테 육변기니, 암퇘지니, 폐기물이니,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달라고 말하는 거.
아마 없을 것이다. 있을 리가 없다.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고 싶다.
...여기에 있구나? 실시간으로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이 세계에 온 뒤부터 조금도 쉴 새 없이 혹사당하는 내 신경에 애도를 표하고 있는 나를 보고서, 에루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육변기로 좋으십니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에루나, 에루나로 좋으니까!”
“아쉽군요. 마음이 변하신다면 언제든지 달리 불러주시길.”
“절대로 안 바꿀 거다. 절대로.”
“저의 호칭 같은 것은 언제든지 주인님께서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길. 그보다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십니까?”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태연한 얼굴로 물어오는 에루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시종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제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가씨들이 아직 어리실 동안의 양육 및 보호. 그리고 주인님의 시중을 들기 위함이었으니까요."
“...그랬어?”
“그랬습니다. 그보다 주인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어? 응.”
골렘이란 것은 시간이 지나면 미소녀로 바뀌는 거구나, 하고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 이세계의 상식을 이해하려고 하던 나에게, 에루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조아렸다.
그리고서, 내 발등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저 ‘에루나 투아레’, 주인님을 위하여 준비된 시종이 오랜 세월을 기다리다 오늘에서야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주인님께 제 모든 살과 뼈, 피를 이루고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당신께 예속된 자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띠링~
[‘에루나 투아레’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에루나 투아레’의 '정보창'에 충성도가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띠링~
[‘에루나 투아레’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지고지순한 충성을 바칩니다. ‘에루나 투아레’의 충성도가 100만큼 상승했습니다!]
띠링~
[‘에루나 투아레’의 충성도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었습니다. ‘정보창’을 통해 ‘에루나 투아레’의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갑작스레 발등에 입을 맞추며 충성을 맹세하는 에루나를 보고서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발을 빼기도 뭐했다.
그러기엔 에루나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을 빼라니,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발끝부터 오그라지는 느낌을 한참동안 받은 뒤에야 풀려질 수 있었다. 에루나가 그런 내 표정을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주인님?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단지 발은 민감하니까 건들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런 거에 민감하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아니, 누가 발등에 입을 맞출 일이 있었겠냐고. 낳아주신 부모님도 안할 일이었다.
아니, 발이 민감한 것이 문제인 것 같지도 않지만... 나는 그제야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기이한 문양이 생겨난 발등을 바라봤다.
무슨 문양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용의 형상을 한 듯 한 문양이란 것만 알아봤을 뿐이었다.
그런 내 귓가에 예의 알림음들이 들려왔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특성 ‘예속 각인 : 에루나 투아레’를 습득하셨습니다.]
띠링~
[플레이어와의 ‘관계창’에 새로운 ‘예속 관계’가 추가되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기능 '소환 : 에루나 투아레'를 습득하셨습니다.]
“...소환?”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알림음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제일로 신경 쓰이는 것은 소환이라는 말이었다. 소환이라니, 내가 아는 그거? 그런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에루나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원체 표정이 바뀌지 않아서 원래 저런 줄 알 뻔 했다.
“주인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저를 필요로 하실 때면 언제든지 불러주시면 됩니다.”
“부른다니... 어떻게?”
“간단합니다. 실례지만 손을 내밀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에루나에게 손을 내밀자 그런 내 손 위에 작은 보석 같은 것을 올려주었다.
“...보석?”
“본래대로라면, 주인님께서 약간의 마력과 함께 저를 소환할 수 있는 주문을 읊어주시면 됩니다만...”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응, 그래.
나 마력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줄래?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방금 에루나의 표정에서 듣도 보도 못한 희귀생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받은 것 같다.
“아무래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같아,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그 보석은 제 몸의 일부입니다. 드래곤의 뼈, 마력과 친화도가 높은 소재로 이루어진 것이죠. 그것을 손에 쥐고서 ‘살라스 에루나 투아레’. 그렇게 외쳐주시면 됩니다. 한번 사용하게 되면 적어도 반나절은 다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니까 문제없겠죠.”
에루나의 말에 손에 쥔 보석을 바라봤다. 에루나의 머리카락 색을 띈 옅은 보랏빛의 보석이 반짝거렸다. 조금 원래 세계의 보석 중 하나인 자수정과 비슷하게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다른 점은 이 보석은 둥글둥글한데다가 가공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까.
어떤 구조로 이루어진 건지 전혀 모르겠다. 이것도 마법으로 만들은 건가? 아, 골렘인 에루나의 일부였다니까 당연히 마법으로 만들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보석을 만져보고 있던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아, 참고로 보석과 제 몸의 감각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너무 만지시면 가버립니다.”
“...?”
...뭘 한다고?
나는 만지작거리던 보석을 바라보고, 에루나를 바라봤다. 그런 나에게 에루나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좋으니, 원하실 때 얼마든지 만져주시길.”
나는 말없이 보석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옷에 있는 주머니 안에 챙겼다. 이걸로 잃어버릴 일도 없고 굳이 만질 일도 없어졌다. 내가 생각한 거지만 완벽했다.
"체온이 높아지시는군요. 주인님, 감기이십니까?"
제발 입 좀 닫아줬으면 좋겠다.
우웅~
공중에 뜬 채로 빛이 반짝거리면서 문자들의 배열이 바뀌어가는 책을 바라보다가, 새삼스레 에루나를 바라봤다.
성격이 조금 그렇긴 했지만 능력은 대단했다. 설마 마법도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드래곤들이 부여한 기억에 의하면 마법뿐만이 아니라 가디언으로써의 전투능력, 또 시종으로써의 봉사능력까지. 못하는 것을 찾는 게 힘들 정도로 완벽 초인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던 책이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마법이 걸려있는, 일종의 마도서인 것도 에루나가 알려줘서 알았다.
아니, 마도서라고 하기엔 조금 그럴지도 몰랐다. 마법에 관련된 책이 아니라 단순히 마법으로, 내용이 숨겨져 있는 책일 뿐인 거니까.
에루나의 말로는 동시대에 살았던 프란의 연인, 엘프였던 프리세우라? 프리세라? 조금 발음하기 힘든 이름의 엘프가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유? 이유는 간단했다.
“주인님. 해석이 끝났습니다.”
“응, 고마워.”
나는 에루나가 건네준 책을 받아들였다. 책은 확실히 내가 처음 봤을 때랑은 많은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충 펼쳐본 페이지에는 인체와 이름 모를 몬스터의 해부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고, 어느 부위가 약점이고 어디를 공격하면 효과적인지에 대해서 적혀져 있었다.
검술서, 아니 그보다는 이론서에 가까운 책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확 바뀌어버린다니 마법이란 새삼스레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난 마력이 없지. 뭔가 입 안이 썼다.
그나저나 인쇄기는커녕 비슷한 물건조차도 없는 세계의 물건이라고 생각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정교한 그림과 설명이었다. 신체의 내부에 대한 장기, 그것의 역할. 무엇을 떼어내도 살 수 있는지, 무엇을 떼면 죽게 되는지, 그런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는 걸 보니 검술서가 아니라 의학서로 봐도 아무런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엘프였던 프리세우라가 연인이었던 검의 주인, 프란이 남긴 검술서에 마법을 걸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프란은 검의 주인인 것과 동시에 초월자였다. 그리고 초월자는 종으로써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의미했다. 종으로써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은 그가 익힌, 그가 이룬 업적이 일반적인 종이라면 수십, 수백 년을 거쳐서 이룩해야하는 것을 홀로 이뤘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그가 남긴 검술서는 검술이라는 한 방면일 뿐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마어마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물건이란 소리였다. 아니, 검술만이 아니라 의학이나 그 외 여러 가지의 방면에서도 유용할지도 몰랐다.
이 세계에서 초월자란 종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개념이나 법칙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존재를 말했다. 우리 세계였다면 역사서에 이름을 남길만한 위인,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전설이나 영웅기로 회고될만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남긴 물건은 작게는 나라가, 크게는 세계를 위협할 정도의 혼란을 일으킨다. 농담 같지만 벌써 몇 번이나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한때 초월자였던 마법사가 남긴 책 때문에 마법사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었고, 그것이 번져 결국 한 나라가 무너졌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만큼 초월자가 남기는 물건의 존재는 세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물건이 세상에 나뒹구는 것을 과연 드래곤들이 용납할까?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그들이 내버려뒀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대부분의 초월자들은 드래곤들에 의해 관리 받게 된다. 관리라고는 했지만, 딱히 붙잡아서 가둬둔다거나 자유를 속박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기술이나 사상, 혹은 그 외의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 중의 하나가, 그들을 감시하는 누군가를 옆에 세우는 것이었다.
프리세우라, 그녀 역시 그런 역할로써, 프란을 찾아갔었던 존재였다고 했다.
“아, 그런데 왜 엘프가 찾아가는 거야? 관리는 드래곤들이 한다며?”
책을 읽다말고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질문하니 에루나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주인님은 그런 귀찮은 짓을 드래곤들이 할 것 같습니까?”
안하겠지, 아마. 내가 아는 드래곤들, 루시아를 비롯한 다른 여섯 명까지. 이런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루시아는 대놓고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귀찮다고 했기도 하고. 아마, 말만 루시아가 했을 뿐이지 그 의견은 드래곤들을 대표하는 의견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드래곤들은 그런 종족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속의 드래곤들도, 그런 드래곤들뿐이었다. 심지어 마왕의 등장때에도 귀찮은데 왜 기어 나오냐고 뭐라고 할 정도로, 게으름뱅이라고 해야 하나,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해는 갔다. 드래곤들이 일해야 한다, 그 말은 즉 세계에 엄청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 걸 의미하니까. 하긴 싫을 만도 했다.
“하지만 초월자들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은 변하지 않죠. 그 덕분에 나온 것이 프리세우라 같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주인님께서도 알다시피, 아가씨들의 영지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에서 살아가는 대가로 아가씨들에게 많은 것을 바치고 있죠.”
에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꼽았다.
“보물이나 식량, 그리고 노동력까지. 드래곤은 많은 것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거나, 구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필요하다면, 쓸 만한 것을 골라잡아서 부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런 관계로, 초월자들의 관리는 당연하다시피 드래곤들의 영지에서 사는 종족들, 그들의 역할로 넘어가게 됐다고. 에루나는 그렇게 말했다.
“특히 엘프들은 이런 일에 적합했습니다. 빼어난 외모에 긴 수명까지. 적당히 능력까지 좋으니 안성맞춤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여러 영웅기를 보면 하나같이 엘프 동료들이 나오곤 합니다만... 이건 인간들에게는 비밀입니다.”
“나도 인간인데 말이지.”
“아뇨. 주인님은 주인님, 설령 종족으로써는 인간일지 몰라도 주인님만큼은 다른 인간들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이십니다.”
에루나의 확답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예속 각인 때문일까, 에루나의 감정이나 생각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 탓이었다.
진심으로 에루나는 나와 인간들을 전혀 별개의 존재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됐다. 그야 나도 수많은 인간들과 비교해서, 그 사람이나 나나, 어디까지나 인간인 것이지 동일인물인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에루나의 생각은 그런 나의 생각같이 어설픈 것이 아니었다.
전혀 별개. 그 말은 그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에루나는 종족이나 개체명이나, 그런 것을 뛰어넘어서, 인간이라는 것과 나라는 존재를 아예 별개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감정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에루나는 인간에게 썩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일지도 몰랐다.
아마 에루나의 정보창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상태창에 나왔던 것처럼. 에루나가 인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내 눈에만 보이는 듯한 이 게임시스템과 꼭 닮아있던 게임, 라이프에서는 그랬었다.
그렇지만 굳이 정보창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물론 궁금하기는 했다. 에루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다는 에루나의 능력치 같은 것들이. 하지만 참았다.
에루나가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는 어차피 천천히 알아 가면 그만이었다. 생각을 읽어서 알아낸다? 그런 치트,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야 사용하면 쉽겠지. 마음을 읽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 한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야 간단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게임으로 해도 재미가 없을뿐더러...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에루나뿐만이 아니었다. 루시아를 비롯해서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그녀들의 생각을 읽어내고서, 문자 그대로 공략했다고 치자.
그럼 어떨까, 나는 나였다. 27년, 짧다면 짧지만, 나의 기준으로 짧지만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알았다.
아마, 그런 식으로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사로잡는다고 쳐도, 나는 아마 그녀들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단순히 공략집을 보고, 작업을 했을 뿐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최악의 행위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해버린 것에 대해서 후회하겠지.
그런 건 역시 싫었다. 조금 궁금한 게 있기야 하지만, 역시 상대방의 정보창을 보는 건 참아야겠다.
만약 보게 된다고 쳐도, 사전에 이야기하자. 정보창을 보게 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전부 이야기하자. 그리고 허락해준다면 그때서야 보자고, 그렇게 결정했다.
아, 그렇지만 이런 얘기는 역시 남에게 하기엔 조금 위험하려나...?
“주인님?”
“아, 응? 무슨 일이야.”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그렇게 말하고서 에루나가 손가락으로 나를, 정확히는 내가 보고 있던 책을 가리켰다.
“책은 이미 다 읽으셨습니다만, 대체 무엇을 넘기고 계시는 겁니까?”
“...으응?”
에루나의 말을 듣고서야 책을 바라보니, 이미 책 끝 페이지를 넘긴 상태였다. 그런데도 내 손가락은 다음페이지를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저기, 에루나.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지부터 얼마나 지났어?”
“네, 정확히 3시간이 흘렀습니다.”
책을 읽던 중에 잠깐 딴 생각 좀 했다, 그런 감각이었는데 3시간이나 지났다는 에루나의 말에 믿기지 않았다가,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는 책의 내용들을 떠올리고서 당황했다.
뭔가, 대충 읽어 내린 듯한 감각에 불과했을 뿐인데 머릿속에는 한권의 책, 그 내용이 빠짐없이 기억되어 있었다. 아니, 빠짐없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애매하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것도 맞았다. 더군다나,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기능 '라이어스 제국 검술'를 습득하셨습니다.]
책을 읽게 되면 얻는다는 기능, 라이어스 제국 검술도 습득했고 말이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얻은 능력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한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