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2화 (2/370)



〈 2화 〉2화

“흐흐흥~ 흥흥흥~”


손목시계를 산다고 말했을 때 지었던 노점 할아버지의 표정을 떠올리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제 이 게임 시디만 제대로 된 물건이라면 완벽했다.

“다녀왔습니다.”


대답해줄 사람이라고는 없는 집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우선 마트에서 사온 냉동식품이 녹기 전에 냉장고에 넣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 게임부터 하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아버지 가라사대, 아무리 게임이 좋다고 한들 우선순위의 제일이 게임으로 바뀐다면 불방망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라고 하셨다.

지금이야 독립해서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는지라 아버지의 불방망이가 느닷없이 찾아올 일은  없어졌지만, 어린 시절에 배운 교훈은 아직  몸에 새겨져 있었다.


아마 엉덩이 부근에 특히 잘 새겨져 있지 않을까.


아무튼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만사 다 제쳐놓고 그것만 하게 된다면 좆된다는, 몸으로 배운 교훈을 따라서 우선 어젯밤 동안 난장판이  방부터 치우기로 했다.

나는 빈 컵라면 용기들을 모아서 타는 쓰레기를 담은 봉투에 넣었다. 다 먹은 과자 봉지도 역시 봉투에 넣었다. 굴러다니던 빈 페트병이나 여러 쓰레기들도 분류해서 각각의 봉투에 담아 넣었다.

좋아, 이걸로 청소는 끝이었다.

여러 가지로 생략된 것 같았지만 괜찮았다. 이런 걸로 사람이 죽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괜찮았다.


자, 이제 게임을 위한 준비를 할 차례였다. 나는 흐드러지게 퍼져있는 이불을 정리하고 그 위에 베개를 세팅했다. 그리고 새로 사온 음료수와 과자를 그 옆에 놓고, 손이 닿기 쉬운 위치에 컵라면들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커피포트의 물을 갈아서 옆에다가 놓았다.

“완벽하군.”


다시 게임 라이프를 즐길 완벽한 준비가 완료됐다. 나는 정리해둔 이불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오늘의 전리품인 게임 시디를 꺼내봤다.


지금부터 내가 사온 이게 10만 원이나 주고 사온 값을 하는지, 아니면 10만 원이나 하는 쓰레기를 사온 것인지 판가름할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케이스부터 확인했다.

“흐음, 역시 모르는 제작사인데.”

유명한 게임 제작사는 물론이거니와 크고 작은 이류, 삼류 게임 제작사의 이름도 모두 외워두고 있는 나도 처음 보는 게임 제작사였다. 아마 게임을 내기도 전에 망한 걸로 추정됐다.

물론 추정이지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다른 제작사에 합병되거나 흡수됐다거나, 이름을 바꿨거나 하는 가능성. 이 가능성도 적진 않았다. 단지, 최근에 그런 소식을 들었던 적이 없었을 뿐.

뭐, 나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였다.

“그나저나 뭐라고 쓴 거야?”

케이스에 적혀져 있는 처음 보는 문자를 바라봤다. 꼬부랑거리는 글씨는 언뜻 보기에도 유려하고, 세련되어보였다. 전혀 읽을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애당초 인쇄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거기에 있는 문자는 아무리 살펴봐도 도통 뭐라고 적혀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모양은 영어랑 비슷한 것도 같은데... 조금 달랐다. 뭐 내가 갖고 있는 다른 게임 시디들도 그림이랑 글자랑 섞어서 원래 글자의 원형도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것 역시 그런 종류의 것일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좋은 일이였다.


“중요한건 무슨 게임인가, 인데.”

그건 플레이 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였다. 케이스를 살펴봐도 게임에 대한 설명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상한 건 아니겠지?


냉정히 생각해보니  시디만큼 출처가 수상쩍은 물건도 없었다. 이 녀석이 어디서 만들어졌고, 무슨 게임이고, 아니 애당초 게임이기는 한지, 모르는 것들이, 수상쩍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이 게임을 구한 곳은 길거리 노점이었다. 애당초 그것도 노점 할아버지가 이 시디를 길가다가 주운 끝에 거기에 놓여있었던 것이었다.

혹시 어떤 정신병자가 만든 정성들인 장난이라던가, 질 나쁜 프로그램이 깔려있을지도 몰랐다.

“...우선 다른 컴퓨터로 시험해봐야겠다.”

내게는 원활한 게임 라이프를 위한 컴퓨터와 블로그 운영을 위한 컴퓨터 그리고 그  잡다한 용도나 인터넷 서핑을 위한 컴퓨터. 그렇게 모두 세대가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잡다한 용도로 쓰고 있던 컴퓨터로 시험운전부터 해보기로 했다.


조심스레 시디 케이스를 열어봤다. 케이스는 이래도 안에는 흔하디흔한 게임 시디가 들어있겠거니 하고 열었더니 별개의 물건이 들어있었다.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원반에, 반투명한 시디는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렸다. 시디라고 하기보다는 잘 세공한 보석을 보는 느낌이었다.

“뭐로 만들었길래 이러지? 신기하네.”

그래도 일단은 시디가 맞는 모양인지 가운데 구멍도 있고, 컴퓨터에 딱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별 문제 없겠지 뭐.”

조금 특이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나는 일단 컴퓨터 시디롬을 열고서 조심스레 10만원이라는 큰돈을 주고 사온 게임 시디를 장착했다. 그리고 넣었다.


우우우웅~


“일단 잘 돌아가네.”

조금 불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무사히 돌아가는 듯해서 안심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내용물이 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예상이기는 하지만, 케이스의 그림을 봤을 때 그쪽 계열의 게임이 아닐까 추측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팟!


“응? 뭐야 벌써?”

생각보다 빠르게 떠오른 화면에 깜짝 놀랐다. 시디를 넣고 돌아가기 무섭게 컴퓨터의 앞에 새하얀 창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곧 컴퓨터 화면 가득 채우고 있는 새하얀 창의 주변으로 별가루 같은 것이 쏟아지는 연출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곧 그 가운데로 작은 문이 생겨났다.


“누르면 되는 건가?”

마우스를 움직여서 문을 클릭해보려고 하자 덜컥하고 화면 속의 문이 열렸다.

파앗!

눈이 부셨다. 갑작스레 컴퓨터에서 쏟아진 빛에 눈을 찌푸렸다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한 뒤에야 다시 보이기 시작한 화면에는 새로운 그림들이 떠올라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드넓게 펼쳐지는 숲을.


높고 푸르른 창공.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를.

끝없이 이어지는 빙하를.

마지막으로 그저 한없는 대지를.


제각각의 자연을 표현한 듯한 그림들이, 거기에 있었다.


“뭔가 굉장한데...”

조금 요란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오프닝 연출치고는 화려하고 괜찮은 편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새겨진 그림들의 사이로 케이스에서 봤던 꼬부랑 문자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게 제목이나 제작사 로고가 맞나본데.”

여전히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지직, 지직하고 글자들이 흔들렸다.


순간 시디에 무슨 이상이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됐다. 자그마치 10만원이나 주고 산 시디였다. 멀쩡하면 쓰레기같이 재미없는 게임이든 아니든 괜찮았지만 고장  시디를 산거라면 그냥 쓰레기를 10만원이나 주고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걱정은 그저 기우였는지 흔들거리던 글자는 이내 내게 익숙한 글자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한글이였다.


비바, 세종대왕이시여. 비바, 훈민정음이여. 만년토록 영광되어라. 한 손으로 꼽을 수 없는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해본 관계로 단언하건데, 한글은 위대했다. 쓰기 쉽거든. 전문적으로 배우기 쉬운 글자는 아니지만, 간단하게 알아둬도 어지간한 의사소통은 된다는 점에서는 한글만큼 편리한 글자가 없었다.


어쨌거나 게임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제 또 어떻게 되려나, 하고 화면을 지켜보자 그림들이 차츰 사라져가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새하얗게 떠오른 화면 위로 글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글자였다가, 그리고 그런 연출이었는지 글자가 흔들리면서 한글로 변환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바뀐 글자를 읽어 내렸다.

[우선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이런 식으로 인사드리는 점을 사과드립니다.]

“바로 프롤로그가 시작되는 건가?”

게임을 즐기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유형이 있지만 나는 프롤로그 같은 것은 꼭 보는 유형이었다. 프롤로그에는 그 게임의 세계관이나 설정이 함축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은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런 프롤로그를 보는 것을 즐겼고 이미 한번  것이라도 게임을 다시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끝까지 보고는 했다.

그렇기에 잠자코 옆에 있던 베개를 품에 끌어안고서 글자들이 마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마 당신께서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이것은 단순한 글자에 불과할 뿐,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당신에게 어떤 궁금증이 있더라도 저희들이 대답해줄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래. 이해하고말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프롤로그에 대고 질문하는 바보는 세상에 없을 거다. 나는 프롤로그가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옆에 있던 페트병을 땄다.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게임류는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뉘고는 했다. 오프닝부터 힘을  주고서 설명에 들어가는 것이나 반대로 간략하게 휘리릭하고 지나가는 것.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전자 쪽에 가까운 듯 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게임의 후반부에 프롤로그에서나 나왔던 것이 힌트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종종 성격이 더러운 개발자가 그런 함정을 파고는 했다. 보통 로크라이크 장르의 게임에서 그런 경우가 꽤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직 넘어가지 않은 문장을 다시 읽어 내렸다.


‘저희들’이라, 한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도 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시디 케이스에 일곱 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거랑 관계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미리 예상하는 것도 재미없는 일이라 만약을 위해 머릿속에 기억만 해두고서 가만히 다음 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럼 사정상의 문제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현재 저희들의 차원은 심각한 위협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당신께 글을 남기는 것도,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함입니다.]

“장르는 용자물인가? RPG겠네. 오랜만인데.”


위험이니 도와달라느니 흔한 용자물 RPG의 시추에이션이었다. 그게 흔한 이유가 잘 먹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비슷한 계열의 게임은  개나 해봤지만 그때마다 재미있게 했었다.

[갑작스레 도와달라고 말씀드린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에게는 당신을 설득할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도와줄 거야.”


어차피 하려고 사온 물건이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화면이 팟하고 어두워졌다.

“어? 뭐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시디가 고장난건가 싶어서 마우스를 붙잡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찌이잉~

어두워졌던 화면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비쳐온 빛이  눈을 관통했다.


“아악!”


누가 갑작스레 레이저로 눈을 지져댄 느낌이었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당한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다행히 뒤에는 폭신한 이불이 있었다.

이불 위로 쓰러진 나는 눈을 움켜쥐었다.


“뭐, 뭐야...”

감긴 눈꺼풀 위로,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순간  때문에 이상한 것이 보이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귓가에 누군지 모를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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