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1화
“후아암~”
크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 시야가 희뿌옜다. 나는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았다. 이리치고 저리치는 손끝이 마침내 안경을 찾았다. 안경은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어쩌다가 안경이 내 머리 위로 등산했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손에 닿은 안경을 들어 고쳐 쓰자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앞이 보이게 되자 보인 것은 어제 밤새도록 플레이했던 게임의 화면이었다.
그 옆에 너저분하게 어지럽혀져있는 컨트롤러나 먹다 남긴 과자 봉지. 다 먹고 나서 아무렇게나 치운 컵라면 용기도 보였다.
“도중에 잠들었나보네.”
아무래도 밤새 게임을 하다가 그대로 뻗어버렸던 모양이었다. 게임의 화면을 살펴보자 밤새도록 했던 게임의 화면이 일시 정지된 상태로 멈춰져 있는 것이 보였다.
라이프.
어젯밤 했던 게임의 이름이었다. 재앙을 겪고 난 세계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게임이었다. 게임의 제목이나 설정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져가며 멸망해버린 구시대의 물건이나 부품들을 주워다가 물건을 만들어가며 살아남는 생존 게임이었다.
뭐, 단순한 생존물이라고만 하기엔 조금 희한한 시스템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바로 인간관계 시스템이었다. 만든 나라가 우리나라와 이웃하고 있던 일본에서 만든 게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주인공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거나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호감도를 쌓거나 신뢰를 형성해가며 같이 살아가거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혹은 반대로 서로 반목하고 싸우거나 갈등이 형성되기도 했다.
최근에 했던 게임 중에서는 완성도도 괜찮고 재미도 있어서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뻗었던 만큼 당분간은 이것만 붙잡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시정지 상태로 멈춰져있는 주인공 캐릭터와, 몇 번의 사건사고를 함께 겪은 끝에 어젯밤에 마침내 일행으로 합류한 방랑 소녀라는 캐릭터를 바라봤다.
머릿수가 늘어난 만큼 할 것도 늘었고 새롭게 개방된 시스템 덕분에 할 수 있게 된 일도 늘어났다. 아마 지금 컨트롤러를 다시 붙잡으면 정신 놓고 이것만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그 전에 밥부터 먹어둘까.”
게임도 게임이었지만 뭐가 됐던 식후경이었다. 게임하다가 굶어죽거나 쓰러지는 일은 사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 성격상 보통 게임을 클리어할 때까지 붙들고 있는 터라 게임하는 도중에 간단하게 챙겨먹을 과자나 컵라면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컴퓨터 옆에 놓여있는 빈 컵라면 용기를 봤을 때 집에 마련해놨던 것들은 어젯밤에 다 먹은 걸로 보였다.
“지갑에 얼마나 남아있더라.”
최근에 돈을 뽑은 적이 없었으니 아마 얼마 남아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지갑을 확인해보니 예상대로 안이 텅텅 비어있었다.
“돈도 좀 뽑아둬야 되겠네...”
시대가 시대인지라 카드만 있으면 대부분 해결되기는 했지만 현금도 어느 정도 필요했다. 가끔 치킨을 뜯고 싶을 때나, 배달음식을 시켜먹을 때 말이다. 카드보다는 현금으로 계산하는 게 할인혜택이 있어서 좋았다.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아껴야지 게임 시디 한 장이라도 더 살 수 있는 법이었다.
사실 아끼려고 한다면 배달 음식을 먹는 거 자체가 아니긴 했지만, 직접 해먹는 건 귀찮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좋아, 사둬야 될 건 컵라면하고 과자, 으음... 맥주도 사둘까.”
별로 술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마시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치킨이나 다른 배달 음식을 시켜먹을 때 맥주를 시키는 것보다는 미리 사두는 편이 싸게 먹혔다. 나는 머릿속으로 사둬야 하는 물건에 맥주도 포함하고서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어차피 동네에 있는 은행을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트를 들러서 대충 사올 뿐이라서 입고 있던 츄리닝 차림에 겉옷만 조금 껴입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덕분에 준비는 금방 끝났다.
문득 옆에 있는 거울을 보니 순식간에 백수 꼴이 된 내 모습이 비쳐보였다. 백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뭐, 누구랑 만날 것도 아니니 상관없나.
나는 대충 뻗쳐있던 머리카락이나 조금 정리하고서 집을 나섰다.
은행에서 당분간 쓸 수 있을 만큼 돈을 뽑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마트에 들렀다.
거기서 여러 종류의 컵라면과 평소에도 즐겨 마시는 코씨라는 이름의 탄산음료, 그리고 간단하게 데워서 먹는 냉동식품을 몇 개 장바구니에 담아놓으니까 장바구니가 금세 꽤 묵직해졌다.
“아, 그리고 맥주도.”
어차피 맥주의 맛도 제대로 모르니 굳이 브랜드를 골라가며 살 필요는 없었다. 대충 눈에 띈 5개 들이에 만원하는 할인 세트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맥주도 챙겨들고서 몸을 일으키다가, 마트 안에 있던 반사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와, 진짜 백수로밖에 안보이네.”
아직 한낮인데도 츄리닝 차림으로 컵라면을 비롯한 주전부리에 맥주까지 손에 쥐어드는 모습의 나를 보니까 진짜 날백수가 따로 없었다. 여기에 담배라도 입에 꼬나물면 완벽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나는 비흡연자였다.
애당초 수입이 있으니까 백수도 아니고. 누가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될지 막막하기는 하다만.
정말로 내 직업은 뭘까?
문득 들은 의문에 생각해봤다.
작가?
책 한 권 낸 거가지고, 그것도 여행을 다니면서 겪었던 일들을 적었던 것이 우연히 책으로 만들어진 것 가지고 작가라고 하기에는 진짜 책을 쓰는 작가 분들에게 일백 번 죄송하다고 말해도 부족할거다. 아마 미안한 마음에 몸 둘 바가 없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리다가 말린 오징어처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파워 블로거?
그걸 직업이라고 해도 되는지는 둘째치고서.
폼 나게 여행가나 모험자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음, 역시 아냐.”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누가 물어보면 백수라고 말하는 것이 속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나는 남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장바구니에 담은 물건들의 가격을 치루고, 다시 걸음을 옮겨서 집으로 향하던 길에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아직도 저런 게 남아있었네.”
멀리서 보아하니 바닥에 천을 깔고 그 위에 잡다한 물건 따위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아직 어릴 적에는 저런 것들도 꽤 많이 보였었는데... 어느 샌가 다 사라져 있었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길거리 노점에서 팔던 호박엿을 씹으면서 집으로 가던 것도 이제는 다 추억이었다.
“혹시 팔려나, 호박엿.”
별로 단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마구 당겼다. 오래간만이기도 하고 만약 판다면 조금 사갈까 싶어서 노점이 있는 쪽으로 향하자 할아버지가 팔고 있는 물건들이 조금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낡은 손목시계를 시작으로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팔리고 있었다. 제대로 작동은 하나 싶은 카세트 플레이어도 있었다. 와... 요즘은 테이프도 구하는 게 일인데 이게 다 언제 꺼야?
“아, 그나저나 호박엿은 안파는 모양이네.”
혹시나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건 팔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옛날 물건들은 보여도 먹는 음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며 다시 돌아갈까 했다가 익숙한 모양의 물건이 눈에 띄었다.
사각형의 케이스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있는 물건이었다. 여기까지만 하면 뭔가 고급스러운 물건, 예를 들어 오르골이라던가가 떠오르겠지만, 나는 그런 고급스러운 물건과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익숙한 물건이란 뻔했다. 화려한 문양 사이로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일곱 명의 여자들이 그려져 있고, 어느 나라의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려한 글씨체로 무언가가 적혀져 있었다.
촉이 왔다. 게임 시디였다. 그것도 내가 모르는 게임 시디. 온갖 게임을 해봤다고 자신할 수 있는 나였지만 모든 게임을 해보거나 아는 건 아니었다.
전에도 발매 전에 회사가 부도나서 판매가 무산된 게임의 시디를 우연찮게 구했던 적이 있었다. 미완성이었지만 제법 괜찮았던 게임이었고 그래서 더 아쉬웠었다. 이미 회사가 망했으니 게임의 차기작은커녕 완성도 기대할 수 없게 됐으니 말이다.
아마 저 게임 시디도 그런 것 중 하나일게 분명했다. 케이스나, 거기에 새겨져있는 문양, 그리고 일러스트의 수준을 보면 어지간히 공들인 모양이었다. 딱 거기까지만 공들였을 가능성, 포장사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뜯기 전까진 모르는 법이였다.
“...실례합니다. 할아버지, 혹시 이거 파는 건가요?”
할아버지에게 다가간 나는 게임 시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뭐라고오?!”
대뜸 귀에 내질러진 소리에 멍해졌다. 웅~ 한참 이명이 이어졌다가 멈춘 뒤에야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파시는 거냐고요.”
“뭐어어?! 잘 안들려! 크게 말혀!”
“이거! 파시는 물건이냐구요!”
“이눔씨키! 나 귀 안 먹었다. 살살 말혀.”
...괜찮았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게임 속에서 몇 번이나 있었다. 지나치게 불합리하고 어이가 없을 정도의 일을, 나는 수도 없이 겪어봤다. 그리고 그 대응법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으신다면, 다른 방법을 통해 의사소통하면 그만이다. 나는 게임 시디를 집어 들고서 입을 열...
“이눔씨키! 계산도 안한 걸 어디 함부로 집어!”
찰싹하고 손등을 쳐져서 집어 들던 게임 시디를 놓쳤다. 저릿저릿, 화끈거리는 손등을 봤다. 맞은 부분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노점 할아버지를 봤다. 뭐, 왜, 할 말 있냐? 하는 표정이었다.
젠장할.
“가격표, 맞아. 가격표를 보면 됐지.”
어차피 파는 물건이니 제값을 치루고 집어가면 그만이지. 흥분을 가라앉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게임 시디 어딘가에 붙어있을 가격표를 찾아봤다. 그렇지만 손목시계나, 다른 물건들에게는 있는 가격표가 게임 시디에만 없었다.
“할아버지, 왜 이것만 가격표가 없어요?”
“응? 뭐라고오?!”
“왜 이것만! 가격표가 없냐구요!”
아까보다는 소리를 죽여서 외치자 할아버지가 내가 가리킨 게임 시디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 그거! 오다가 주웠는디. 그거 파는 거 아녀.”
“네?! 안팔다니요!“
안 판다는 말에 놀라서 외치자 할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으메, 깜짝 놀라라. 뭘 소리 지르고 그려? 안팔 수도 있지. 고거 콤퓨타 시디라는거 아녀? 우리 손주 녀석이 저런 거 좋아해서 말여. 선물로 주려고...”
“아~ 아아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인연이 아니었다는 셈 쳐야겠다... 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저런 게임 시디가 그렇게 흔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망겜일지도 모르겠지만 케이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다가 콜렉터로써도 탐이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여행을 다니면서 이상한 물건들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저 케이스만해도 그 사이에 넣어도 문제없을 물건을 이대로 놓치기엔 아까웠다.
“...할아버지! 어떻게 하면 이거 파실거에요!”
“아, 안판다니까?”
“그러지 마시고요!”
“에잉, 그럼 이거 사면 줄게. 어뗘? 살텨?”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고 내민 것은 손목시계였다. 낡았지만 꽤 고급스러운 티가 나는 손목시계에는 게임 시디와는 달리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10만원 짜리라.”
“어뗘? 안살거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고서 손목시계를 다시 거둬들이려할때,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뇨, 살 건데요?”
요즘 게임 가격은 DLC까지 포함하면 기본이 5, 10만원이였다. 10만 원짜리 게임 시디를 샀더니 고풍스러운 손목시계도 준다면 오히려 나한테 거스름돈이 남는 격이였다.
덤으로, 이 할아버지한테 뭔가 한방 먹여주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