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5)

남편과는 결혼 전 다녔던 회사의 아는 언니에게 소개를 받아서 처음 만났어요. 대학 시절 잠깐 연애를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연애는 해보지 못한 저에게 남편은 꽤나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지만 남부럽지 않은 집안 환경에서 자란 남편은 첫 인상부터 굉장히 매너가 좋고 젠틀한 모습이었어요.

거기에 6개월을 만나면서 마지막 결혼 일주일 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반말을 하고 그 전까지 늘 존댓말을 쓰는 모습이 절 존중해준다는 느낌도 들어 참 좋았죠.

그렇게 짧은 6개월의 연애 후 5남매 중의 막내아들이라 결혼을 급히 서두르는 시부모님 때문에 결혼을 하게 됐고, 이제 저에게 남은 건 행복한 결혼 생활일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때까진 말이죠..

남편은 결혼 후 1년간은 연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비슷한 모습을 보였어요. 원래 좀 무뚝뚝한 편이라 집에 와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 번씩 깜짝 놀래 켜 주는 선물이나 자상한 모습을 보여 역시 결혼을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해줬죠.

그런데 상황은 결혼 후 1년 만에 제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어요. 남들은 임신하면 평소보다 더 잘해준다고 하던데, 남편은 그와 반대였어요.

신혼 초기엔 일주일 중 4일 정도는 일찍 귀가하곤 했는데 제가 임신하고 나서 일찍 귀가하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도 되지 않았고, 그 하루 일찍 퇴근하는 날도 뭐가 그리 바쁜지 작은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죠.

전 당연히 서운하긴 했지만 회사 생활이 바빠서 그런가보다, 괜히 내가 뭐라고 하면 더 스트레스 받을테니 그냥 내버려두자라는 마인드로 일단 지켜봤어요.

하지만 그런 남편의 모습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변할 생각이 없었어요. 오히려 더 심해져갔죠.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고 늘 술에 취한 모습이었고, 어떤 날은 와이셔츠에 다른 여자의 립스틱 자국을 묻히고 들어오는 날들도 있었죠.

그래도 전 참았어요. 남편이 하는 일이 영업이니 접대를 해주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들도 생기겠지, 본인이 싫다고 해도 해야 하는 그런 일들이겠지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인내를 하면서 어느덧 출산예정일이 다가왔고, 그 날 일이 터졌어요.

아침부터 오늘 왠지 출산을 할 거 같다고 남편에게 말했지만 남편은 심드렁하게 알겠다고 말하고 출근했고, 결국 제가 병원에서 출산할 동안 남편은 오지 않았어요.

제 곁을 지켜준 건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였죠. 시어머니는 저에게 몹시 미안해하며 아무리 바빠도 이런 날은 조퇴를 하고라도 일찍 와야지라고 역정을 내시면서 남편에게 연락을 했지만 제 연락도 받지 않는 남편이 시어머니의 연락이라고 받을 리 없었죠.

하루, 정확히 하루란 시간이 지나고 남편은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에 찾아왔어요. 그리곤 정말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어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그런 목소리로..

그때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어요.

정말 너무나 서러웠어요. 그래도 자신의 아이를 낳아준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남편은 울고 있는 절 보고 한 마디의 위로도 하지 않고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거 같다며 병원에 온 지 30분 만에 아이의 얼굴도 보지 않고 병원에서 나갔어요.

전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고, 늘 온화한 미소를 보이던 시어머니는 제 앞에서 처음으로 육두문자가 섞인 욕을 하며 남편의 팔을 붙들고 고함을 치셨어요..

지 애비랑 어쩜 저리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니냐고..

그 날, 시어머니는 저에게 처음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시아버지가 결혼하고 1년도 되지 않아 다른 집안 살림을 차리고,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고 지금까지 고생을 시키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너무나 놀라운 남편이 이미 한 번 결혼을 했었다는 이야기..

결혼을 하기 전 대학생 때부터 많은 여자를 동시에 만나며 여성 편력이 심했던 남편에게 그런 모습을 모두 이해해 주고 감싸주던 여자가 생겼고, 그런 남편의 모습을 모두 알고도 결혼을 결심하는 여자를 보고 이 여자가 아니면 남편이 평생 홀로 살다가 늙어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결혼식만 하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로 1년간 살게 됐는데, 결혼을 하면 여자는 남편이 변할 거라 생각을 했었나 봐요. 하지만 그건 여자의 착각이었죠. 결혼하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남편은 다시 바람을 피웠고, 결국 그런 남편의 모습을 계속 참으며 지켜보다 결혼식을 올린 지 1년이 되던 날 여자가 도망을 가버렸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삼 년 뒤에 만난 게 바로 저였어요. 남편은 절 보고 단번에 그 날 집에 가서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구요.

어머님이 갑작스런 남편의 말에 놀라 왜 결혼을 다시 하려고 하냐라고 물어보니 어머님과 너무나 비슷한 모습이라 내가 바람을 피워도 평생 참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여자라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평생 혼자 살 수 는 없으니..

어머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미우나 고우나 자기의 자식이니 평생 혼자 살 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결혼을 허락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너무나 미안하다고 내 손을 꼭 붙잡고 어머니는 우셨어요.

전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에 눈물도 나오지 않고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어요. 도저히 그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으니까..

연애 시절 순박해 보이던 남편의 모습 그리고 결혼 초기에 나에게 자상하게 해주던 그런 것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죠.

친정어머니는 옆에서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시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소리를 치면서 울부짖으셨어요. 이런 게 어딨냐고.. 이건 사기 결혼 아니냐고.. 내 딸 인생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그 순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어요.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이미 혼인신고도 했고 시간을 뒤돌릴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친정어머니는 너무나 담담하게 그런 말을 내뱉는 나를 보며 내 새끼 불쌍해서 어쩌냐며 저를 끌어안고 펑펑 우셨고, 그제야 전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어요.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사랑스런 내 아이 지민이를 낳은 날, 그렇게 제 인생은 송두리째 변해버렸어요.

남편은 그 날 이후 이제는 더 이상 숨기고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대놓고 당당하게 바람을 피웠어요. 마치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지민이를 낳기 전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일찍 오던 남편은 평일이고 주말이고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아예 외박을 하거나 일주일째 집에 오지 않는 날들도 점점 많아졌어요.

친정어머니는 그런 제 모습을 보며 당장 이혼하라고 그렇게 어떻게 사냐고 말했고, 시어머니도 네가 하고 싶다면 이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에겐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딸아이 지민이가 눈에 밟혔어요.

우리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 이혼을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늘 친구들이 가족여행을 가는 모습, 아빠와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부러웠어요. 나도 아빠가 있었으면 하고 말이죠..

그런 제가 어떻게 지민이를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전 참아야 했어요. 남편이 성관계를 거부를 해도, 집에서 나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아도, 내 생일에 축하한다는 메시지는커녕 외박을 했던 날도.. 전 참아야 했어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건 하나뿐인 딸아이의 돌잔치에 시댁식구, 친정식구 모두 와서 축하를 해주던 그 날조차도 남편이 오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절 무시하는 것, 상대를 해주지도 않는 것,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그런데 지민이는 자기의 혈육인데.. 자기 핏줄인데 한 번도 안아주지도 않고 사랑스럽게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절 너무나 힘들게 했어요.

그래서 그 날,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지민이를 품에 꼭 안고 너무 많이 울어 퉁퉁 부운 눈으로 억지로 잠을 청하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요.

당신이 하면 나도 하겠다고.. 내가 똑같이 갚아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 쉽게 이야기하는 불륜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평생 연애도 제대로 해보지 못해서 양다리도 걸쳐 보지 않았던 저에게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건 너무나 힘들었어요.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나야 할지도 몰랐고, 혹시 만나게 된다 그래도 어떻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불안했어요.

인터넷에 나와 있는 여러 정보들을 보고, 바람피우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커뮤니티도 가입해서 그 곳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해봤지만 결국 전 겁쟁이처럼 도망치고 말았죠.

너무 두려웠으니까요.. 그런 만남이..

결국 전 1년간에 걸쳐서 시도했던 불륜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결국 접게 됐고, 다시 전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죠.

그제야 밀려오는 공허함과 허탈함..

지난 1년간 내가 뭘 하고 살았나 싶더라구요.

그리고 남편에 대한 증오와 슬픔이란 감정이 역겨움으로 변해갔어요.

난 다른 사람과 잠시 차를 마시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 도망가 버렸는데 어떻게 그리 뻔뻔하게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잠자리를 가지는 것인지..

정말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워 토가 나올 것 같았어요...

그쯤 나는 남편을 포함해 어떤 남자든지 제 몸에 손을 대기만 극도로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는 남성혐오가 심해지고 있었어요. 그게 택배기사가 됐든, 카페 종업원이 됐든, 시아버지가 됐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상은 심해져갔고, 도저히 이렇겐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병원에도 가봤지만 치료는 쉽지 않았어요. 심리적인 부분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고..

두 집 살림을 하는 남편에, 남성혐오증이 걸린 내 모습이라니...정말 너무 비참하더라구요.

이렇게 살아야 되나 싶은.. 정말 지민이가 만약에 없었다면 전 아마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에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지막 내 삶의 희망이자 끈이 되어준 건 날 보며 해맑게 웃어준 지민이었으니까요..

도저히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황,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에서 남성혐오를 극복한 방법들을 찾다가 전 놀라운 글을 발견했어요.

야설을 통해 남성혐오를 극복했다는 어떤 사람의 글..

전 너무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일단 해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야설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남성혐오를 극복하기는커녕, 보면서 정말 몇 번이나 토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나 자극적인 SM, 근친상간, 네토라레 같은 글들을 보며 도무지 이게 제 정신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글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역시 인터넷 글들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렇게 마지막 희망이던 방법까지 이제 실패로 끝나는 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만한 글이 있나 하고 둘러보자 하고 글을 살피던 중 작가님의 글을 그 날 처음 보게 되었어요.

다른 읽기조차 버거웠던 글들과 달리 달달한 로맨스 분위기로 흘러가는 글은 편하게 읽을 수 있었고, 적나라한 표현들이 많이 자제되어 있는 섹스씬은 그리 큰 부담을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나와 같은 유부녀라는 사실, 그 유부녀가 내가 생각만 해왔던 불륜을 그리 자극적이지도 저질스럽지도 않게 사랑스럽게 글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좋았어요.

전 한 번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니까요..

전 그 날 처음으로 작가님의 모든 글을 읽고 살짝 몸이 들뜨는 기분을 받았어요. 결코 싫지 않은 기분 좋은 그런 기분..

그날부터 작가님의 팬이 되어 매일 매일 작가님 글을 기다렸고, 놀랍게도 전 조금씩 남성혐오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있었어요.

글을 보며 그 속에 주인공이 나와 같다고 생각을 해서일까요. 이제 더는 택배기사가 택배를 전달해주며 손이 스칠 때도, 시아버지가 한 번씩 집에 와서 아들을 잘못 키운 내 잘못이라고 우시면서 한 번씩 절 안아주실 때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어요.

완벽하게 남성 혐오를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죠. 제 마음 속 깊이 있던 그 두려움을..

그래서 사실 작가님이 너무나 고마웠어요. 너무나 재미없는 내 삶에..힘든 내 삶에서 힘이 되어주는 그런 분이시니까..

나중에 언젠가 꼭 만나게 되면 정말 너무나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깊은 수렁에 빠져 있던 절 구해주신 고마운 분이라고.. 너무나 고맙다고..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민영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난 아무런 말없이 민영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내 글을 읽고 다시 삶의 희망을 얻었다는 민영의 말에 내 가슴에선 벅찬 감동이 밀려와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지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형편없던 글이.. 누구한테 보여주기도 부끄럽다고 생각한 내 글이..누군가에게 이런 의미가 될 수 있다니..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었다.

한참동안 품에 안겨 울고 있던 민영은 갑작스레 내 입술에 입술을 맞추곤 눈물로 젖은 얼굴로 아까와 같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저..작가님이 좋아요..그래서 작가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그게 어떤 것일지라도..”

어느새 민영의 눈빛엔 다시 진지함이 묻어나고 있었고, 난 그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조심스레 고개를 저으며 민영의 몸에 다시 원피스를 입혀주었다.

민영은 갑작스런 내 행동에 무척 놀란 표정으로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그건 내가 용납 못할 거 같아요. 우리 아직 너무 빠르잖아요. 서로에 대한 감정도 확실히 어떤 지 잘 모르고..”

“아니에요..작가님도 그걸 원하시고...”

“네..그래요. 어떤 남자가 자기 좋다는 여자가..그것도 민영씨같이 이렇게 예쁜 여자가 섹스를 하자고 달려드는 걸 마다하겠어요? 근데..아직 아닌 거 같아요. 민영씨의 저에 대한 마음이 그게 단순히 고마움인지 아니면 사랑이란 감정인지 확신할 수 있어요?”

“........”

민영은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이번엔 민영이 아닌 내가 먼저 다가가 민영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떨어지고 싶지 않은 이 느낌을 잠시 만끽하고 난 민영의 입술에서 떨어지며 민영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민영씨 참 예쁜 사람이네요..얼굴도..그 마음도..그래서 더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좀 천천히 갔으면 해요. 제 맘 알 수 있겠어요...?”

민영은 또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체로 나에게 꼭 안겼고 난 그런 민영을 다시 한 번 꼭 안아주었다. 내 몸의 따스한 체온을 모두 느낄 수 있도록...

민영은 긴 이야기를 하며 몹시 지쳤는지 내 품에 안겨 어느새 새록새록 잠들어 있었고, 난 조심스레 민영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아까 벗어두었던 옷들을 다시 주섬주섬 입었다.

‘하아...친구놈들한테 여자랑 호텔 왔다가 손만 잡고 나갔다 하면 완전 상병신 소리 듣겠네...에휴...그래도 어쩌겠냐 이게 내 팔자라면....’

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선택이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정말 지금 이 순간은 민영을 지켜주고 싶었으니까..

잠든 민영은 살짝 몸을 뒤척이며 날 향해 돌아누웠고, 난 민영에게 다가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민영의 휴대폰에 카톡을 남기곤 호텔 방에서 빠져나왔다.

-먼저 가서 미안해요. 같이 있다간 오늘 분명히 사고를 칠 거 같아서 먼저 나왔어요. 오늘 정말 너무나 즐거웠고,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나에게 털어놔줘서 고마워요. 별로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지만 민영씨가 필요하다면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요. 푹 잘 자고 일어나면 연락 줘요.

밖으로 나오니 아직 깜깜한 새벽, 일단 잘한 짓이라고 나오긴 했는데 나도 남자인지라 아주 살짝 후회도 되고 이 시간에 집에 가려니 괜히 뭔가 기분이 울적했다.

“하아..이 시간에 놀아줄 친구도 없을 거고...”

그때 신나게 울려대는 벨소리, 난 혹시 민영이 내가 없어져서 깜짝 놀랐나 싶어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영이 아닌 친구 진수 녀석의 전화였다.

“어..왠 일이냐 이 시간에..뭐? 술?? 콜이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진수의 전화에 난 한 달음에 달려갔고, 진수는 이미 혼자서 얼마나 많이 마신건지 얼굴이 뻘겋게 취한 체로 바보같이 희죽 희죽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야~ 얼마나 많이 마신 거냐? 얼굴이 아주 터지겠구만~”

“어? 글쎄...흐흐..몰라 엄청 많이 마신 거 같긴 해. 근데 어디 있었길래 이렇게 금방 오냐?”

“어? 아..그냥 요 근처 볼 일 좀 있어서..”

“그래...흐흐..뭘 멍하니 있어. 여기 앉아라. 이모~ 여기 잔 하나 추가요. 소주도 한 병 주시구요”

“뭔 일인데 술도 많이 안 마시는 놈이 이렇게 술을 퍼마셔..어우..이거 병이..4병이잖아~ 너 지금 제 정신이긴 하냐??”

평소 주량이 소주2병 먹으면 훅 가는 녀석이 4병이나 마신 걸 보고 난 심상치 않은 일이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잘못 온 건 아닐까 라는 슬쩍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나...차였다..”

“어? 아..혹시 그 몇 달 전에 그 공들였다던 거래처 여직원? 걔랑 사겼었냐?”

“어...근데...뭐...흐흐...차였어..”

“야~ 힘내 살다보면 여자한테 차일 수도 있고, 차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뭐..뭘 그런 거 가지고..”

“그렇지..그런 거지..근데...!”

“응???”

“내가...내가....흐흑..”

“야~ 왜 그래 울지 말고 말해 임마”

“내가...내가...너무 작대....내가 못한대...!!”

갑작스런 진수의 발언에 난 정말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그대로 뿜어버렸고,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띄엄띄엄 테이블에 앉아 있어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았고, 난 재빨리 진수가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진수의 입을 막았다.

“그래..그래..알았어. 그거 완전 나쁜 년이네..”

“우우웁...우웁..”

진수는 입이 막힌 상황에서도 울면서 계속 무언가 말을 하려 했고, 난 손에 온 힘을 집중해서 진수의 입을 막으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진수는 내 손을 뿌리치기 위해 한참을 실랑이를 펼치다 지친 표정으로 손을 내려놓았고, 난 그제야 진수의 입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진수야..너 힘들고 심각한건 알겠는데..야 그런 이야기는 좀 조심히..”

“몰라..아무도 내 마음 몰라...하아..진짜 너무 충격적이다..”

“어....그래...솔직히 충격적이긴 하다. 그래도 뭐...나도 호텔에 여자 혼자 내버려두고 나왔는데...뭘..”“응??”

“어? 내가 뭐라고 했냐? 아니..헛소리 했나 부다. 자~ 어여 마시자~”

진수는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잘못 들은건가라는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고, 난 실언을 한 게 들키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오며 진수에게 술을 권했다.

“자..오늘 끝까지 달려보자..”

“그래..건배..!!”

진수는 새벽6시가 넘어서야 끊임없이 그 여자 욕을 하며 술을 마시다 마침내 뻗어버렸고, 난 나보다 2배는 무거운 진수를 겨우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아...나오는 게 아니었는데..이게 무슨..”

그때 신나게 울려대는 벨소리, 정수가 택시 타고 가다 깼나 싶어 휴대폰을 보니 진수가 아닌 민영이었다.

“민영씨”

“뭐야..나 놔두고 어디 갔어요...”

민영은 잔뜩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날 찾고 있었고, 난 아까 호텔에 계속 있었어야 되는 구나라며 뒤늦게 후회를 하며 서둘러 민영이 있는 호텔로 향했다.

어제부터 이어진 오늘 하루는 너무나 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밤을 꼴딱 새운 탓인지, 더 이상 20대 초반이 아닌 내년이면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 탓으로 인한 저질체력 때문인지,

분명 아까 나와서 걸어서 10분 조금 넘는 거리였던 건데 좀처럼 호텔이란 간판은 보일 생각을 하지 않고 숨만 턱 끝까지 차오른다.

“하아..하아...으아아...뒤지게 힘드네...”

몸은 따라주지 않는데 마음만 급하면 결국 일이 터진다더니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공중에서 한 바퀴 빙 돌면서...

순간 트리플 악셀급 착지라던가, 중학교 때 아주 잠깐 배운 낙법을 떠올리며 멋지게 넘어지고 싶었지만 역시나 난 평범한 내년이면 계란 한 판인 조금씩 배가 나오기 시작하는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일 뿐이었다.

거기에 운도 지지리도 없어 마침 옆에 있던 며칠 전 비가 와서 생긴듯한 물웅덩이에 그대로 퐁당 빠져 버리고 말았다.

“하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하지만 누굴 탓하겠나..

다 내 부족한 운동신경과 아침까지 술을 마신 탓에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해롱해롱 대는 내 정신머리 때문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본능을 참지 못해 민영씨를 홀로 내버려두고 나온 못난 나에게 하늘에서 벌을 주신 것이겠지..

내 옷들은 상하의, 양말까지 빠짐없이 예쁘게도 물에 골고루 젖어있었고 그 순간 고개를 드니 익숙한 호텔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 와서 이 꼴을 당해서 다행인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제야 누가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본 건 아니겠지란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직 아침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휴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난 조금 잰 걸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전화가 걸려온 지 20분이 지나있어 민영씨가 조금 걱정됐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 민영씨는 그나마 안정이 돼서 괜찮아 보였지만, 그전까지 몹시도 불안해 보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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