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

귀를 간질이는 소리..무슨 소리지? 계속해서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에 난 겨우 졸린 비빈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하음...몇 시야 대체...”

창문 틈사이로 이미 환한 빛이 들어오며 결코 아침은 아니란 걸 확인해주고 있었고, 휴대폰엔 민영의 카톡이 5통이나 와 있었다.

“아..맞다..약속!”

그제야 어제 민영과 했던 약속이 생각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11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민영은 아직 자냐는 카톡에서 오늘 어디서 보자라는 약속 장소와 시간까지 모두 보낸 상태였다.

“1시에 광화문...이런..! 광화문이면 3~40분은 걸리는데..!!”

먼저 보자고 했는데 지금 와서 약속시간을 변경하자고 하는 건 뭔가 우스운 상황이었다. 오늘 낮에 분명히 보자고 말했는데 결국 늦잠을 잔 건 나였으니까..

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면도와 샤워를 하고 나와 옷장 속을 뒤적이며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 옷들, 평소 같으면 한 번에 골랐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옷들이 맘에 안 든다.

셔츠를 고르면 바지가, 바지를 고르면 셔츠가, 다 고르고 운동화나 구두와 코디를 해 보면 결국 또 신발과 맞지 않고..

“아오!! 오늘따라 입을 옷이 왜 이렇게 없냐~!”

난 괜히 애꿎은 옷장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그나마 가장 나아보였던 첫 번째 코디로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역시 이도저도 아니면 처음 택한 옷이 가장 마음에 드는 법이니까..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어있다. 마음이 조급해 지기 시작한다. 첫 만남부터 늦으면 정말 이미지가 꽝이 되 버리는 거니까..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넉넉잡아서 40분 정도,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계와 지갑, 휴대폰까지 체크를 하고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12시 10분이었다.

10분 정도의 여유..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지하철에 타고 난 비로소 민영에게 카톡을 보냈고, 민영은 혹시 내가 약속 펑크 내는 건 아닌가 걱정하다 이제 집에서 나가니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난 오히려 민영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며 천천히 느긋하게 오라고 말했다.

‘휴우..다행이다..’

조용한 카페, 역시 주말이라 그런지 직장인들이 없어서 카페 안은 나를 포함해 3팀 뿐이었다.

이제 12시 55분, 민영이 조금 늦는다고 했으니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때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민영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얀색 원피스에 포니테일 스타일의 머리, 순간 난 넋을 놓고 민영을 바라봤다.

내가 그 날 봤던 이미지와 전혀 상반되는 민영의 모습은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다.

“왜...그렇게 뚫어지게 봐요..부끄럽게..”

“네? 아..네..죄송해요..아..너무 다르셔서..”

“제가요?”

“아..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너무 예쁘셔서..”

민영은 내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볼이 붉게 물들었고, 난 그런 민영을 한참을 더 넋을 놓고 바라봤다.

정말 립 서비스가 아닌..그날과 180도 달라진 민영의 모습은 너무나 예뻤다.

“저..그만 보시면 안 될까요..저 진짜 너무 부끄러워서..”

“네? 아..네 죄송합니다....하하..”

민영의 말에 난 그제야 민영을 내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부끄러움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그럼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뭐 드실래요?”

“전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네..”

그렇게 시작된 데이트..

데이트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린 연인들처럼 길거리를 거닐었다. 같이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남산에 올라가 같이 자물쇠를 걸고 내려왔다.

같이 눈을 감고 잠깐 기도를 했는데 민영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난 민영이 제발 솔로이길 바란다고 기도를 드렸다. 내가 기도한다고 갑자기 유부녀가 처녀가 되지는 않을 테지만..

마지막으로 우린 저녁이 되어서 한참을 인사동을 거닐다 민영이 다리가 아픈 것 같아 마침 잠깐 쉴까라는 생각이 들어 근처의 전통 찻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다리 괜찮아요?”

“네..괜찮아요..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방긋 미소 짓는 민영의 모습.. 분명 특출 나게 예쁜 것도 아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닌데 그 수수한 모습의 민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우린 찻집에 앉아 아직 못 다한 이야기를 한참을 더 나눴고, 어느새 시간은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늦었네요..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어..그러네요..저..민영씨”

“네?”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꼭 묻고 싶어서..”

“네..말씀하세요..”

“혹시...결혼 하셨는지...?”

민영은 내 말을 듣고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미소가 어떤 걸 말하는지 난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제가 괜한 질문을 한 모양이네요..”

“만약 제가..유부녀가 아니라면 절 계속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만나실건가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는데 그게 나에게 덫이 되어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떻게 해야 현명한 답을 하는 것일까..

“대답해주세요..”

민영은 오늘 처음으로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고, 그렇다고 날 유혹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정말 내 진심을.. 내 대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아....솔직하게 말할게요. 민영씨 처음 본 그 날 하루 종일 민영씨 생각한다고 정신이 없었어요. 정말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요. 그리고 결국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에 민영씨와 약속을 잡았고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났죠. 어.. 솔직히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아까 남산에서 제발 민영씨가 솔로이길 빌었어요...”

“솔로라면 고백할 생각이었어요?”

민영이 내 얼굴에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입술이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하고 얼굴이 빨개졌다.

“저..저..”

“말해줘요...그럴 생각이었어요?”

“네..네..그러고 싶어요..”

“그렇군요..그럼 정수씨가 결정을 못 내리는 것 같으니까 내가 먼저 대답해 줄게요..나 예상하셨겠지만 싱글이 아니에요..유부녀에요..저..이제 어쩌실 건가요...?”

“어......”

사실 처음 본 그 날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처녀가 아니라 유부녀일 거라는 걸..하지만 이렇게 확인사살을 하니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미 내 맘은 민영에게 꽤나 많이 흔들리고 있는데..유부녀라는 사실..

난 지금 민영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대답하기 곤란해요...?”

“하아...저..”

“그럼 제가 대답하기 편하게 해줄게요..”

순식간에 다가온 민영의 입술.. 민영의 부드러운 입술 감촉이 내 입술을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꿈을 꾸듯 짧은 순간이었지만, 민영의 그 입술 감촉은 아직 내 입술에 선명히 남아 있었고, 민영은 어느새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며.. 내 심장의 터질 듯한 두근거림을 느끼며..

난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상관없어요..그런 거. 민영씨가 유부녀라는 거 상관없어요. 그까짓 거 나중에 지옥 한 번 가죠..내가 죄를 짓는 거라면..”

“그럼....절 받아주시는 건가요..”

“네...”

“그럼...오늘 전 안 들어갈래요...”

심장이 털컥 내려앉는 느낌, 그런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난 민영의 말에 정말 심장이 털컥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이대로 심장이 터지는 듯 했다.

어떻게 저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저런 앙큼한 말을 하는 건지..

“우리 나가요...”

“네..? 아 네...”

어느새 난 민영의 손에 이끌려 귀신에 홀린 듯 따라 나가고 있었고, 민영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HOTEL이란 전광판으로 날 이끌고 있었다.

엉겹결에 민영의 손에 이끌려 호텔 내 객실까지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호텔방 안에 민영과 둘만 있다고 생각하니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물론 나도 어린 나이가 아니라 연애를 한 번도 못 해 본 것도 아니고,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보지 못한 것도 아니라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영은 엄연히 유부녀였고, 이렇게 단 두 번의 만남 뒤에 호텔까지 오는 경험은 처음이라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민영과 난 원나잇으로 만난 사이도 아니니..

민영은 그런 내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 혼자 두고 욕실에 들어갔고, 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욕실에 들어갔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뻔한 상황을 앞두고 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민영이 야설을 너무 많이 봐서 이런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고 싶었던 것인가?

야설 속에서야 남자 주인공이 수많은 여자를 희롱하고 다니지만 만약 민영의 남편이 알게 된다면 난 죽은 목숨인가?

그렇다 해도 민영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민영을 거부하면 상처를 받지 않을까?

그런 여러 생각이 스쳐가는 동안 욕실에 물소리는 점점 약해져 어느새 들리지 않았고, 난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굳게 마음을 먹고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래..여기서 내가 거부하면 민영씨가 뭐가 되겠어? 뭐..남편에게 비밀로 하고..이번 한 번의 일탈로 끝이 나면...’

내 몸에 걸쳐져 있는 마지막 하나의 천쪼가리인 팬티를 부여잡고 벗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달깍 거리는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열렸다.

‘그래..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곧 있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올 민영이 내가 옷을 입고 있으면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팬티를 잡아 무릎까지 내리는 순간 좀 전에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 민영과 눈이 마주쳤고 난 그대로 얼음이 되 버리고 말았다.

‘어...어....어.....!’

내가 그리던 상황과 전혀 반대의 상황,

민영은 얼굴이 잔뜩 붉어지며 시선이 내 얼굴에서 서서히 아래를 향해 내려가다 그 곳에 멈췄고, 난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팬티를 다시 끌어올렸다.

“어...저...그...하아...하아....”

도저히 입 밖으로 어떤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민영은 날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 역시 야설 작가다 보니 변태구나라고 생각할까?

오늘 집에 간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로 이불을 뻥뻥 차버릴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이 상황을 어찌 수습할까란 생각에 멘붕이 와버린 그 순간 갑작스럽게 민영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영은 정말 너무 웃긴다는 듯이 배를 붙잡고 눈에 살짝 눈물까지 고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난 너무나 쪽팔려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인데...

어떻게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이렇게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다니..

하지만 난 그런 민영을 조금도 원망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티끌하나 없이 밝다 못해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쁜데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어...저..너무 부끄러워서 그러는데 그만 좀 웃어요..나 당장이라도 숨고 싶어..”

“아..미안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웃으려던 거 아닌데 웃음이 멈추질 않아서..”

“하아....네네 알아요. 완전 변태 같겠죠.. 역시 야설 작가가 별 거 있어..이런 생각이죠?”

“아뇨. 전혀요. 내가 이런 상황 만들어놓고 작가님 바보 만들었으니까 내가 나쁜 년이죠..”

“아니...뭐..또 그리 자책하실 필요는 없으시고..”

방 안을 감돌고 있는 어색한 분위기, 그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고 난 괜히 헛기침을 하며 슬금슬금 옆에 벗어두었던 옷들을 하나씩 손에 집어 들었다.

“그냥 두세요..”

“네??”

민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흰색 원피스가 민영의 몸에서 툭 소리를 내고 떨어졌고 갑작스레 속옷차림이 되버린 민영을 차마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난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왜 피해요..이래야 공평하잖아요..”

“아...그..아니..공평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정말 괜찮아요..나 봐줘요...”

봐달라니..하아.. 이 사람,

나와 밀당을 하는 건가? 어느새 민영의 손에 이끌려 호텔에 들어오던 그 순간부터,

아니..그게 아니다. 찻집에서 내 질문을 민영이 다시 질문으로 받아치던 그 때부터 완전히 주도권은 민영에게 넘어가 있었고 난 민영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저...하아..민영씨..”

겨우겨우 용기를 내서 민영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도저히 민영의 몸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아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시선을 얼굴에 고정하며 민영의 눈을 응시했다.

지금 민영이 나와 장난을 치고 있는 건지, 밀당을 하고 있는 건지, 민영이 어떤 의도인지 알 필요가 있었고 민영의 눈빛을 통해 그 진정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전혀 흐트러짐 없는 민영의 눈빛,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밀당도 아닌 너무나 진지한 민영의 눈빛에 난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으면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장난스레 아까처럼 웃고 있다면..더 편하게 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낼 수 있을 텐데..

“미안해요. 정말..”

“음....”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생각이 들고.. 왜 이리 오락가락 장난을 치나? 라는 생각이 드실 거 같아서요. 그래서 미안해요”

“어...흐음...”

“근데 장난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호텔에 들어온 것도 아니에요. 호텔로 남자를 유인해 놓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정상적인 여자는 아니겠죠”

“아니..뭐 그럴 수도 있죠..”

“아니요. 작가님이랑 자볼까라는 생각으로 들어온 게 맞아요”

“..........”

“그런데...하아..솔직히..솔직히 갑자기 두려워졌어요..”

“.....”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꾸 작가님을 당황시켜서 죄송한데 그냥..그냥 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요..”

“어..솔직히 지금 상황이 저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일단 한 번 무슨 이야긴지 말해보세요..그래야 저도 좀 이해를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고마워요..그렇게 생각해주니...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유부녀에요..애도 하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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