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9)

“워~~~이 워~~~~이!! 우리 정일무씨!! 약속안지키고 전화까지 씹는 정일무씨!! 어디계신가!!!”

빌어먹을. 과장님께 결재 받을 서류를 자리에 앉아서 검토하고 있는 도중에 기어이 듣기 거북한 목소리가 사내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2차전...’

회사 사람들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와 ‘깍두기파‘를 번갈아가며 훔쳐보고 있었다. 이왕이면 깍두기들은 고춧가루에 버무려두고 오던가 하시지. 임곽수는 기어이 어제와 같이 ’아랫것들’을 데리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정일무씨!! 내 전화 씹으면 안되지!!!”

-누구시죠? 일무씨 아시는 분인가? 

“저... 부장님. 아.. 아닙니다. 여..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아 놔!! 내가 누구냐면? 그 이름도 유명한 ‘사!!!’ 웁!!!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굳건했던 터라, 뒤에 보이는 깍두기들 따윈 온전히 무시하고 있는 힘껏 사채업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깍두기 녀석 하나가 나를 힘으로 제지하고 나섰다. 덕분에 나는 쿵 소리를 내며 책상에 쓰러졌다. 

“쿨럭 쿨럭. 뭐하는 짓이요? 정일무씨? 아놔. 사람이 그리 우스워 보여? 앙? 아 놔.. 진짜... 이건 뭐야?”

사채업자 녀석도 제법 체면을 구겼는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나를 째려봤다.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들어 올려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채업자 녀석을 나와 회사 사람들이 그냥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동안의 정적을 깨고 사채업자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

외마디 탄성은 나의 긴장감을 녹이긴 커녕 오히려 부추기기에 충분해 보였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넘겨 삼키곤 사채업자 녀석을 바라봤다. 

“와이프?”

사채업자 녀석이 손에 들린 액자를 내 쪽으로 들어 보이며 싱긋 웃어보였다. 미칠듯한 굴욕감과 더러운 기분이 솟구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녀석의 손에 들린 액자를 빼앗아 들고는 녀석의 손을 강제로 잡아 회사 밖으로 빠져 나왔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후폭풍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셌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회사 사람들이 마치 ‘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통에, 눈치가 보여 하루종일 죽는 줄 알았다. 과장에게 정말 호되게 ‘까이는‘ 순간, 나름 그 굴욕과 치욕의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운전대를 꼬옥 쥐고 한참을 달린 나는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교통 신호등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브레이크를 꽈악 눌러 밟았다. 몸이 운전대 쪽으로 기울어졌다가 급격하게 시트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말없이 유리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온전한 사고는 무리겠지. 나는 운전대에 기대서 눈을 감았다. 

집 앞에 다다라서 나는 동네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벌써 몇 분 동안이나 말없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들린 직사각형 모양의 명함 두 개를 어둠속에서 바라보며 나는 기어이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천천히 되살려 낼 수밖에 없었다.

‘한무영... 임곽수... 한무영... 임곽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불과 몇 시간 전에 사채업자, 아니 –명함에 의하면- ‘임곽수’가 보기좋게 던져놓고 간, 명함 두 개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일 뿐이었다. 

“행복한 금융의 선도.... 선도?...”

명함이 좀 그럴싸하면 좋았으련만, 명함 한 복판에 ‘행복한 금융의 선도’라고 박아놓는 꼴이라니. 재미있는 작자다. 임곽수라는 이름 세글자가 적힌 명함을 보조석 의자에 던져놓았다. 그러자 나머지 한 개의 명함이 다시 내 눈에 들어왔다. 

‘아이라인 스튜디오.... 대표 한무영...’

명함속의 이름은 아까 회사에서 임곽수와 내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당신들,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게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네. 이것 봐. 정일무씨. 어제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했으면 좀 알아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건 그거고 사람 전화 무시하는건 어디서 배웠어?

“그건.........”

-됐고, 오늘은 나도 그냥 돌아갈 생각으로 온 게 아니니까 지금 자리에서 이자라도 갚던가 아님 다시 회사로 들어가서...

“아 진짜!!!”

자리에서 일어나는 임곽수를 다시 한번 힘껏 제지했다. 하지만 이미 아까 회사 안에서 나에게 한번 저지를 당해서 인지, 이번엔 너무나 쉽사리 나의 손을 뿌리쳤다. 더욱이 뒤에 잠자코 있던 깍두기 녀석 하나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통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봐 정일무씨? 어떻게 하겠어? 어떻게 하겠냐고?”

-이번주까지만 봐달라고 어제 말씀을... 

“왜 또 말이 바뀌어? 어제는 하루만 주면 이자는 금방 갚겠다고 했었잖나? 사람을 뭘로 보는거야? 진짜 회사 안으로 들어가서 뜨거운 꼴을 한 번 봐야!!!”

-그러니까!!

나는 무릎을 꿇고 임곽수의 바짓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어제부터 오늘까지 정말 꼴사나운 일들의 연속이다. 나는 어금니를 한번 꼭 깨물었다. 그러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임곽수가 자리에 서서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 빌어먹을 위압감에 나는 남몰래 목구멍 뒤로 침을 한번 꿀꺽 삼켜 넘겼다.

“아니면....”

‘아니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곽수를 봤다. 꼴뚜기처럼 생긴 얼굴 생김새가 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하는게, 지금 저 치의 얼굴이 웃는건지 우는건지, 그도 아니면 화를 내고 있는건지 좀체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까, 그 흐흐. 와이프 말이야?!”

핏줄에 힘이 스윽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잡고 있던 임곽수의 바짓자락에서 손을 떼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임곽수의 뱀같은 얼굴 표정에서, 액자 너머로 보이던 아내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와이프 예쁘더만..”

-무.. 무슨 말씀을... 

“아, 겁먹진 마시고. 상황에 따라서 상환 ‘기간‘을 좀 늘려 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덩치 좋은 깍두기들 세 명과 꼴두기같은 임곽수가 나를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임곽수를 야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무슨말을 하려고...”

-오우 오우. 침착해 침착! 정일무씨 당신은 지금 화 낼 입장이 아니니까! 아 내가 뭔가 오해할 만한 말이라도 했나? 큭.

“그 입....”

-침착! 침착하시고!! 자 어디보자.. ‘한사장’ 명함이 나한테 있을텐데...

내 표정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임곽수는 가슴팍에서 명함첩을 꺼냈다. 한참동안 쌓여있는 명함들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마치 ‘이거다’ 싶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명함을 건냈다. 

“받아..”

-..........

“아 씨. 받으라니까!!”

임곽수가 나를 향해 윽박지르는 통에 나는 할 수 없이 그가 건내주는 명함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하얀 명함 오른쪽 구석에 새겨진 이름 세 글자를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 한사장이라고, 사진작가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요즘에 모델을 구한다고 하더라고. 아까 액자 보니까 와이프가 한 미모 하더만? 그래서 알려줄려고 했구만...”

-이것보세요 임곽수씨! 나 그동안 당신한테 꽤나 많은 사채를 빌려다 썼고 또 꼬박꼬박 제때제때 갚기도 했어요. 이번엔 액수가 커서 조금 힘든건 사실이지만, 남의 와이프까지 건드리는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퍼억]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부에 강한 자극이 전해져왔다. 눈앞이 컴컴해진다는 표현이 이때 쓰면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복부를 감싸 쥐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컥... 컥.. 쿨럭..”

-이것봐요 정일무씨. 다시한번 말하지만, 당신 제법 착각하는게 있는 것 같은데. 난 엄연히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사업가. 여기 명함에도 박혀있지만 금융인이란 말이요! 금! 융! 인! 근데 뭐? 남의 와이프를 들먹이고 팔아먹어? 당신 그런식으로 말하면 곤란하지. 당신 내가 지금 겁나 봐주고 있는거야. 게다가 당신이 말한 일주일? 일주일 뒤가 되면 당신이 갚아야 할 돈이 얼마가 될지나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거야? 그 동안이야 애들 코묻은 돈이나 빌려가서 갚아댔으니 감이 오질 않겠지? 우리가 떼는 이자가 몇 프론지나 알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거야? 

나는 땅에 코를 박고 연신 거친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사실 임곽수의 말이 맞았다. 임시 방편으로 그들에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달라고 재촉하고 있었지만 당장 일주일이 지나면 이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나리라. 겨우 눈을 떴다. 제기랄. 눈물이 눈가에 스멀스멀 고여 들었다.

“암튼, 그래. 까짓거 그동안 얼굴 봐온것도 있고 하니 오늘도 속는샘 치고 돌아가도록 하지. 단 이번에도 어제처럼 내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는다거나 하면 이번엔 정말 가만있지 않을거야. 알겠어?”

어제처럼 임곽수와 깍두기 녀석들은 나를 홀로 내버려두고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를 움켜쥐고 자세를 겨우 고쳐 앉은 내게, 임곽수가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라도 생각이 있다면 언제라도 주저 말고 연락 주시고.”

“빌어먹을...”

나는 손에 들린 명함을 그대로 구겨 버렸다. 사채업자 놈과 사진작가라? 연결고리를 찾아보려해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남은 답은 2천여만원을 당장 내일 오전 중으로 구해내야 한다는 건데, 정말이지 돈을 구할 길이 없다. 아버지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셨고, 게다가 연락을 끊다 시피하고 지내온 친척들에게 전화를 하자니 그것도 그랬다. 몇 없는 친구 녀석들이야 어제 연락을 해봤지만 소용도 없었고. 다른 사채업자를 찾아가서 돌려막기라도 해볼까? 아니야, 그럼 더 위험해져. 

“하아...내가 왜 사채를...”

결국 나는 차에서 가방을 들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내 자신을 모르겠지만, 한 손에는 잔득 구겨져 있는 ‘명함‘을 감싸쥐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밥알을 세고 있자니 마주앉은 아내가 어제와 똑같은 말을 내게 걸어왔다. 입을 열 힘도 없고, 사실 –어지간히- ‘쪽’도 팔려서 고개를 슬쩍 슬쩍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시금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 빌어먹을 사채업자 놈이 내게 전화를 걸어대겠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혹시 와이프한테 모아둔 돈이 있는건 아닐까? 

“당신... 당신 혹시...”

-네?

내가 조금 조금씩 그 ‘병신같은’ 생각을 입 밖으로 밀어내려고 할 때, 바지춤에서 요란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와이프의 시선을 거두어내고 나는 천천히 바지춤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나 잠깐 전화좀...”

변화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와이프’를 남겨두고, 나는 전화기를 들고 거실 쪽으로 걸어 나갔다.

“여보세요?”

[오, 그렇지. 이렇게 전화를 받으셔야지.]

원체 기분 나쁜 목소리건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저 목소리는 정말이지 최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지로 거두어내며 상대방이 무언가를 얘기해 주기를 간곡히 바래봤다. 

[말이 없는걸 보니 별다른 생각이 없나 보네? 내일까지 못 갚는 거지?]

“.......................”

[그럼 아까 내가 ‘제의한‘ 일은 생각해 보셨나?]

제기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이지 죽도록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내게 돈이 나올 구멍은 오직,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었다. 

“집산다고 빠져나간 대출금에 이것저것 유지비에 생활비에.... 정말이지....”

[뭐라고 하셨나?]

“아... 아닙니다.”

괜한 한풀이를 늘어놓았다. 빌어먹을. 난 정말 돈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와이프 몰래 하는 ‘도박’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말이 없는걸 보니, 배째라 이건가 보네? 뭐 좋아. 그럼 내일 우리도 결단을 보도록....]

“잠깐만요...”

[.............]

나는 잠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벌인 일에 와이프가 관여하게 만드는 게 싫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빌어먹을,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일단, 와이프한테 얘기해 보겠습니다.”

[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 제가 다시 전화드릴때까지...”

[이번에도 어줍잖은 꼼수부리면 정말 재미없을줄 알아? 오늘 안으로!!!]

“끊겠습니다. 다시 전화 드리죠”

나는 서둘러 전화기를 끄고 식탁으로 걸어갔다. 

나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천천히 와이프를 바라봤다. 너무나 흔한 표현이지만 서른 넷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꼭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몰아 내 쉰 뒤 아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르바이트...”

-네?

“아.. 그... 혹시.. 아르바이트 할 생각 없어?”

-아르바이트요?

“응.”

와이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들린 젓가락을 내려놓곤 나를 바라봤다. 이와 무관하게 나는 쉴새없이 머리를 굴려댔다.

“그, 아는 분 중에 사진찍는 분이 계신데, 이번에 모델을 구한다고 하셔서.” 

-모델이요?

“응. 그, 근데, 그... 그분이 당신을 되게 마음에 들어 하셨나봐?”

-저를요? 

아차. 순서가 엉켜 버렸다. 

“아 그러니까, 그.. 아 맞다. 창용이 알지? 카센터하는 친구. 일전에도 몇 번 만난적 있구..”

-알지요.

“그 친구도 그 분을 아는데, 당신 얘기를 했나봐. 마침 찾고 있는 모델도, 30대 초반의 유부녀를 원한다고 하셔서.”

-30대 초반의 유부녀...

생전 안하던 거짓말을 하려니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침을 한 번 꿀꺽 삼켜 넘기고 겨우 말을 이었다.

“왜? 요즘 집에서 뭐 하는거 있어? 바쁜..”

-아니, 그런건 없는데. 너무 갑자기라서.... 

“할... 할 생각은 있어?”

-글쎄.. 너무 갑자기라서.

글쎄라. 흘러나온 대답이 부정이 아닌 중립을 뜻하는 ‘글세’라면, 이건 한번 비벼볼만 하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비집고 들어왔다. 

“그럼 한 번 해봐. 당신 잘 어울릴 것 같고, 왠지 잘 할 것 같은데.”

-아, 글쎄요.

“에이, 자꾸 글쎄만 말하지 말고.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나랑 같이 가서 한번 만나보자.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와도 되고.”

-............ 

“그럼, 그렇게 하는거다?”

-저기, 잠깐만...

아내를 멀리하고 나는 다시 거실로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심장이 두근거렸다. 고맙다.. 너무 고맙다 ‘예린’아..

돌아온 주말에 차를 몰아 와이프와 함께 임곽수가 알려준 ‘작가’에게로 갔다. 집을 나서는 그 순간에도 못내 성에 차지 않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와이프를 설득하느라 적잖이 애를 먹었다. 

“근데 정말 괜찮을까요?”

-음?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모델이라니. 이런건 너무..”

-괜찮다니까? 당신 최고야. 자신감을 가져.

나는 천천히 와이프의 얼굴을 바라봤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와이프는 자신의 외모에 조금 자신감을 가져도 될 법했다. 물론 지금 이게 이 상황에 맞아 떨어지는 말은 아니겠지만. 

‘2년만인가?’

여리여리한 스커트 자락을 매만지고 있는 와이프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별달리 특별할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딱 남들 사는 것만큼만 살라고, 욕심내지 말고 살아가라고 교육받으며 자라난 게 나란 놈이다. 그래서 이름조차도 일무(日無). 하루하루 무리하지 말고, 그저 그렇게 무난하게 살아가라고 선친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건만, 어쩐지 살아오는 동안 이름 덕을 받아본 적은 결단코 한 번도 없다. 평범한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에 다니면서 남들만큼 평범하게 살아가는게 목표였건만, 누구의 말대로 인생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더라. 생각건대 그 빌어먹을 도박판에 손을 대면서 내 인생이 조금씩 꼬여갔다는 느낌이다. 

지금의 와이프를 처음 만났던 3년전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밤도 친구 ‘창용이’의 꾐에 넘어가 ‘한 판’ ‘당기고’ 돌아왔을 때였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내가 일말의 스트레스 해소랄까, 아니면 인생의 대반전이랄까? 하는 명목으로 비벼볼 만 한 건 역시 ‘한 판’ 뿐이었으니까. 

얻은 것 없이 빈손으로 집까지 돌아온 내가 골목길 모퉁이를 지났을 때 마치 운명처럼 –그러니까 이건 다분히 내가 주장하고 있는 바지만- 집 대문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던 것이 지금의 와이프였고,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그날 그때까지 살아오는 동안 여자와 접(接)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돈을 주고 여자의 몸을 사는 일도 해 본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 부끄럽게도 난 서른 여섯 먹도록 동정이었다. 사람들이 천연기념물, 혹은 마법사라 부르는 바로 그것. 

암튼, 그 날이 내 인생의 크나큰 터닝 포인트가 될 줄은 당시엔 정말이지 몰랐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이래서 재밌고 웃기며 또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결혼이라니. 

“신호 바뀌었어요.”

-어... 응.

아내가 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N’에 놓인 기어를 힘껏 ‘D’에 놓고 나는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무영이라고 합니다.”

중심지를 따라 한참을 달리고 나서 어느 후미진 곳에 들어섰을 때, 겨우 임곽수가 알려준 ‘아이라인 스튜디오’ 라는 간판이 보였다.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치맛자락만 만지고 있는 와이프를 억지로 차에서 끌어내려 노크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자신을 ‘한무영’이라고 소개하고 나서는 어떤 남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난데없는 소개에 조금 의아했지만, 조금 머리를 굴려보니 금새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됐다. 원체 가게에 손님이 없거나, 임곽수라는 작자가 미리 손을 뻗어놨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그것보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뿔테안경에, 인중에 자욱이 내려앉은 검은색 콧수염. 그리고 약간의 컬이 들어간 장발의 머리까지. 외모만 놓고 보면 완연한 예술가의 기질이 다분해 보였다. 나이는 나랑 비슷할 것도 같은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놀라셨나요?”

-네?

아차. 별다른 말도 없이 녀석의 얼굴을 뻔히 들여다 보는게 아니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어내듯 ‘한무영’이라는 남자는 쌩긋 웃어보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괜시리 어색해진 내가 애써 딴청을 피웠다. 

“괜찮으시다면 거기 앉으세요”

-네.

한무영은 아내와 나에게 나란히 자리를 내 주었고, 나는 와이프에게 손짓을 하며 먼저 자리를 권했다. 한무영은 잠깐 어딘가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향이 진한 커피 두 잔을 타서는 우리 부부에게 건내주었다.

“남편분이 계신데 이런 말씀 드리는게 결례라는 건 잘 알지만...”

한무영이 커피를 손에 들고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대 이상인데요? 저도 와이프 되시는 분이 꽤 미인이라는 소리는 전해 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우실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예술가 기질이 있는 놈들은 분명 범인(凡人)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술적인 기질이 있나보다. 저따위 낯간지러운 말을 아주 잘도 뱉어내는 걸 보니.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다만 무표정하게 커피만 들이키고 있는 와이프의 표정에선 그 어떤 감정의 변화도 읽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어떤 사진을 찍는건지....”

-아! 그게 말이죠!

나름 아내를 대신해 한무영을 보며 질문을 건냈다. 그러자 한무영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간단한 인물사진을 찍을 겁니다. 원래 그동안엔 풍경이나 이런 저런 잡다한 걸 찍어왔는데, 요즘에 부쩍 인물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한 번 찍어보기로 했거든요.”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네, 하하.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한무영의 말에 나는 조금 인상을 구겼다. 솔직히 나는 대회에 출품한다거나 혹은 더 거창한 이유나 명목이 존재하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건 그저 단순한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곽수라는 새끼는 도대체 뭐 때문에...’

나를, 아니 나의 와이프를 한무영에게 소개해 준 임곽수를 떠올리며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아. 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한동안 잠자코 있던 아내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단지 그런 이유라면 굳이 제가 모델이 되지 않아도..”

아내의 말이 맞았다. 고작 그런 이유라면 주변에 널린게 사진 모델인데, 구태여 남의 와이프에게 이런 일을 맡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

“네. 사진 모델이라면 적잖이 있습니다만, 뭐랄까. 전 프로 모델들의 그런 익숙함이 싫더라구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이유에서 제 스스로가 그동안 인물사진을 기피해 왔기도 했던 거구요. 그래서 모델로선 아무런 경험이 없는 일반인을 찾았고, 그 중에서도 이왕이면 30대 초반의 여성분을 원했던 겁니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인물의 동체. 그리고 서서히 변해가는 자연스러움. 뭐 이를테면 그런 느낌.”

한무영은 차근차근 자신의 논리를 설명해 나갔다. 안정적인 느낌의 목소리 톤과 버벅임이 없는 침착한 화법이 아내와 나로 하여금 묘한 신뢰감을 형성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와이프 되시는 분과 그....”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정일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와이프인 서예린이라고 합니다.

스튜디오에 들어온 지 벌써 10여분쯤 지난 것 같은데, 바보같이 이제야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섰다. 그만큼 나는 어떤면에선 한무영이라는 작자에게 조금씩 압도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 네. 정일무 선생님과 와이프 되시는 서예린씨.”

어이 어이 이봐. 다 좋은데 선생님이라니...

“아무래도 이런 일은 처음이시라 어색하실 수 있으실텐데, 제가 작업하고 있는 작업환경을 보신다면 글쎄요. 조금 흥미가 생기시지 않을까요? 잠깐 이 쪽으로 오시겠어요?” 

한무영은 살짝 웃어보이며 아내와 나를 자신의 ‘작업실’로 안내하고 나섰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의 와이프를 이끌고 나는 한무영을 따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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