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가운 바람이 사정없이 자신의 몸을 스치며 지나가자,
알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옆에 서있는 시리아스를 쓱- 쳐다보았다.
아래에는 긴 천 하나, 상반신은 거의 벌거벗은 차림새였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알리스는 덜덜 떨리는 입을 추스리며 시리아스에게 물었다.
"추…춥지 않아?"
"전 불의 세례를 받은 엘프이니까요."
시리아스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한때 자신이 짝사랑했던
소년을 쳐다보았다. 카프린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그에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뒤에
서있는 알리스와 마오의 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이내 불그스름한 빛이
떠오르더니 그들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살라맨더의 보호력을 걸어놓았어요. 앞으로 다섯 시간정도는 지속되겠지만…."
"아, 그 정도면 충분해."
알리스는 다소 추위가 가시자 다시 활기를 찾은 목소리로 쾌활하게 대답하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반면에 여전히 묵묵한 마오는 살짝 시리아스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래, 지금은 이들에게 나의 힘을 보태주는데 신경을 쓰자.
그는 이제 더 이상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걸.
그를 위해 쓰던 나의 힘을…이제는 저들을 위해 쓰자.
그래, 그렇게 해서…그렇게 해서 그들이 그를 보호할 수 있게끔…….
일행의 뺨에 와닿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리고 지평선 위로 언뜻 보인
회색빛 안개 무리는 겨우 가닥을 잡은 시리아스의 마음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카프린의 진지한 목소리가 그녀의 예민한 귀를 통해 똑똑히 전달되어왔다.
"…북풍을 몰고 다니는 블리자드(얼음의 비늘을 지닌 용 비슷한 몬스터.
작가주)…. 다들 조심해! 온다-!"
※ ※ ※
마령의 숲, 체니타카아. 불새 사파이트의 지배를 받는 세루프레이와
수호칠룡들의 보호를 받는 리트마 사이를 가로지르는 숲의 깊숙한 곳에,
솔리아드는 서있었다.
그가 서있는 곳은 무수한 나무들이 한 곳을 향해 고개를 숙인 곳,
그 한 가운데에 서서 숲의 경배를 받는 세콰이어가 자신의 장중함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솔리아드는 약간 망설이는 듯 하다가 이내 자신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고목의
거대한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다 무언가가 결국 마음에 걸렸는지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무거우면서도 어딘가 세월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왔다.
"현명한 자에겐 나의 레어는 언제든지 열려있다. 오랜만이군, 나의 친우여."
"…파르미안……."
솔리아드는 그답지 않게 벌써 네 번째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윽고 어느 곳에 이르렀을 때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거대한 녹색빛의 존재를 보았다.
상록(常綠)의 현자, 현재 그린 일족의 대표자인 피리디카의 보호자였으며,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해주는 그린 일족의 원로, 올해 나이 삼천살이 넘어가는
파르미안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 ※ ※
"저 몬스터들에게는 뭐가 통할 것 같아, 카프린?"
"글쎄, 아무래도 불같은 네 성깔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저 놈들 다음은 네 차례인줄 알아, 카프린……!"
알리스의 복수심에 불타는 마지막 한마디는, 그녀의 정면으로 날아드는 블리자드
한 마리로 인해 약간 그 위력이 반감되었지만, 그래도 카프린은 자신의 몸이
순간적으로 반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자신은 과거에 어떤 존재였을까. 알리스는 과거 자신이 블랙 드래건의
폴리모프가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확실히 자신은 인간이 아니긴 하다. 오랜 시간 동안 전쟁터만을 골라 나다니면서
혼자 지낸다는 것은, 천성적으로 뭉쳐 다니기를 좋아하는 인간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드래건의 폴리모프일리는 더욱이 만무하다. 이렇게도 잘 인간들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을 보자면 그런 확신은 점점 강해졌다.
카프린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주문을 외웠다.
"피의 맹약에 따라 지옥 밑바닥에서 올라온 억겁의 불꽃에 대고 말하노니,
나를 위해 용을 내려 적을 삼켜라, [화룡제마]-!"
시동어가 맺어짐에 따라 불꽃의 용이 지면에서 솟아 나와 블리자드 무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극히 한정된 자들에게만 전달된다는 비전 '수라도 주술'.
어째서 자신은 이 주문을 알고 있는 것일까.
짐승의 따뜻한 피가 없이도 시술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 수라족이나 수라도 주술을
익힌 자는 아니다. 그럼 남은 것은 한가지 뿐이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여러 모습으로 살아오며 여러 것들을 익힌 존재, 몸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조차 의지대로 조종하여 서로 다른 힘간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할 수 있고, 가장 위대할 수 있는 존재.
카프린은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태고 이전의 약속으로 내 육신에 내려오라, [아그니]-!!!"
수메루 신계의 화신(火神) 아그니의 힘이 자신의 몸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카프린은 그대로 손을 내뻗어 멋모르고 달려든 블리자드
한 마리를 잡아 비틀어 버렸다.
화아악-! 신들의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블리자드를 감싼 얼음의 비늘 정도는
간단히 녹여 버렸다. 카프린은 웃었다.
엄청난 신능(神能)의 대가로 엄청난 생명력을 받쳐야 하는 초신술, 그것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시전해내는 자신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세상에 어떤 존재가
있어 자신의 수명조차 신경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카프린의 손이 다시 한번 움직여 또 한 마리의 블리자드를 베어내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다섯 마리가 더 남아있는 블리자드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눈부신 백광이 그의 등에 와닿아 부딪혀 시리도록 아름다운
무색의 빛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 ※
마오는 힘차게 자신의 백이십근 나가는 망치를 휘둘러 달려드는 마물들의 머리를
으깨어 버렸다. 언뜻 그의 눈가에 다갈색 머리칼이 흩날리며 지나간 것 같았다.
마오의 눈은 알리스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류……. 하지만 달라. 머리색깔도 다르고 피부색도 좀 다르고 나이도 틀려.
하지만 너에게서 그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왜 일까. 그리고 왜 나는 너에게서
'여아 기호증'이란 말까지 들어가며 사류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일까.
마오의 왼손은 어느새 그의 품속으로 스며들어가 있었다. 자신이 길을 찾게 된
이후로 만든 첫 작품을 선물한 그 소녀의 얼굴이 만져졌다. 마오는 그의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외눈을 번득였다.
좋든 싫든, 그가 찾는 것을 얻어내는 것을 그 소녀가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신의 첫작품이자 실패작이 깨어지는 순간, 그는 그렇게도 바라던
하늘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