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헌은 칼날에 엉켜 붙은 핏자국을 털어내며, 카오린 전사대가 마장기들과 싸우는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카오린이란 생물은 마치 가오리같이 생긴 놈으로,
사막의 모래 속에 살며 넓은 날개로 날아다니고 꼬리로는 산성액을 내뿜는
짐승이었다.
니더우드 사람들은 이들을 길들여 타고 다니기도 했는데, 워낙이 길들이는 것이
까다로워 특별한 훈련을 받은 전사들이 아니면 다룰 수가 없었다. 이들을 가리켜
니더우드 인들은 카오린 전사대라 불렀다.
그들은 자기들과 체격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마장기와 잘도 싸우고 있었다.
한명에 하나, 바로 그것이 카오린 전사대의 방법이었다. 잽싸게 공격을 피하며
다가가 갈고리를 던져 조종기 바로 앞에서 칼날을 쑤셔넣는다.
아무리 두터운 장갑으로 이루어진 마장기라 하지만, 조종석만큼은 밖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도록 특수한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그만큼 깨기가 쉬웠다.
그리고 사람이 앉아있는 그 조종석 안으로 칼날이 들어갔다는 것은 마장기에
타고있는 마갑기사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마장기들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마법전사로써 상당한
수련을 쌓은 뒤 얻은 마갑기사의 자리다. 그냥 내기에 이겨 따낸 것은 아니다.
마법과 검을 같이 쓰는, 그것도 마장기에 의해 그 효력이 몇배로 강해진 일격에
맞은 카오린 전사는 그 한방에 하라(카오린 전사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하라 신계를 믿고 있다고 했다)로 날아갔다.
그들의 격돌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헌의 어깨에 시리아스가 머리를 기대어
왔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나직한 소리가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그의 귓가에 와닿았다.
"우리들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지금은 우선 쉬는 것에 주력해요.
당신이 싸움에서 살아남겠다고 생각했다면…."
"걱정마요, 누나."
헌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무리하게 불의
정령들을 부리느라 땀방울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헌은 문득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다음 순간, 그는 또다시 침입을
허용했다.
※ ※ ※
"또 허용해버렸군. 이런…다른 이에게 감정을 가졌다고 해서 정신의 방어를
허술하게 해버리다니……."
헌은 나지막히 웅얼거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당연히 거기에 있을 존재에게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검은 마나의 힘을 느꼈다."
"…나하곤 관계없는 일이야."
레일리스의 눈썹이 살짝 치켜져 올라갔으나, 이내 수평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입가에 예의 고혹적인 미소가 맺혔다.
"여전히 냉철하군. 하지만 다가오고 있는 검은 마나의 힘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어. 게다가 그것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말을 잠시 멈춘 그녀는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상당히 의식적인
행동이다. 그년 서큐부스, 꿈같은 정신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염체의
상태이므로 입술이 마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입술을 축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모습은 아름답고, 또 유혹적이었다.
"…바로 네가 있는 이 전장이었어. 아마 잠시 후면 만날 수 있을거다."
도발적인 몸짓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헌을 향해 다시 한번 웃으며,
레일리스는 날아올랐다.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소년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후훗, 재미없어. 너무 무뚝뚝하게 하지 말라고."
"……"
"흐흥, 좋아.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하지만 기억해둬라. 네가 파멸되는 것은
내 손에 의해서라는 걸. 나아닌 다른 존재에게 쓰러지는 것은 내버려두지 않아."
그것이 비록 드래건같은 존재일지라도. 레일리스는 급히 뒷말을 속으로
삼켜버리며 소년의 정신 세계 밖으로 나갔다. 일부러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강간해 버리기까지 한 녀석이다. 드래건이 내뿜는
엄청난 마나의 흐름을 놓칠리 없다.
소년의 정신 세계를 빠져나가며 레일리스는 쓰게 웃었다. 이거 본의 아니게
저 녀석을 돕게 되는군. 하지만 두고 보라지. 내게 안겨준 수치와 모멸감은
몇 배로 해서 네 놈에게 돌려줄 테니.
그리고 레일리스는 언제나 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짙은, 그래서 빛조차도
삼켜버리는 그런 어둠이었다.
※ ※ ※
두두두두두-! 육중한 소리가 협곡 일대에 널리 퍼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리와 이 진동이 무엇인지는, 아즈탄 요새의
용병들보다는 퀘타라스의 기사단들이 더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샌드런너다!"
"피해! 놈들에게 걸리면 끝장이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마!"
백부장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으나, 전쟁터라는 곳은 명령이
잘 하달되지 않는 것으로는 썩어빠진 정치판 다음으로 유명하다.
움직이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칼을 겨누고 있는 적군에게서
눈을 돌린다는 것 역시 죽음을 의미한다. 아니, 그것보다도 전장 전체에
깔려있는 묵중한 기운이 그들을 얽어매고 있었다.
공기 중에 가득한 피냄새,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며 내는 기분나쁜 소음,
그리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이 타오르는 불꽃. 병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이런 것들뿐. 그리고 여기서 달아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거나, 아니면 그 전에 죽지 않는 한 전장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받았던 그 기억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긴 여운을 남기며 일생동안 자신을 묶는 사슬이 된다.
쿠구구구구-!!!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샌드런너들이 모래 속에서 솟아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의해 앞으로 돌진하여
퀘타라스 군의 본진을 반으로 쪼개어 놓았다.
※ ※ ※
"이거 최악이군…."
"…동감이다."
막 깨어난 헌의 눈에 비친 것은 맥빠진 얼굴을 하고 수근덕 대고 있는
붉은 두건의 하프 엘프와 갈색 피부의 거구였다. 잠시나마 였지만,
헌은 그들 얼굴에 지나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헌은 시리아스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켜 죽음을 생각나게 한 존재가
무엇인지 바라보았다. 그의 질문은 이내 대답을 얻었다. 회색의 거대한 갑옷을
걸친 마갑기사가 아즈탄 요새를 산산이 부숴 버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최강의 마장기 나타넬, 그리고 그것을 걸치고 있는 퀘타라스 최고의 마갑기사
발텐. 정말 최악의 상황…어이, 이봐!"
넋나간 얼굴로 눈앞의 자신을 죽일지도 모를, 아니 죽일 것이 확실한 존재에
대해 부차 설명을 가하던 탈라이신의 눈이 멍해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도를 고쳐
쥐고 앞으로 나서는 헌의 뒷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이봐, 뭐 하려는 거야! 저 녀석은 카오린 전사대나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야,
네가 아무리 잘 났다고 해도…."
"…말리지 마세요."
막 일어나 헌의 팔을 잡으려는 그를 만류하며, 시리아스는 슬픈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실은 그녀가 가장 그를 잡고 싶었다는 눈빛을 하면서.
하지만 저 소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하면 될 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이 싸움에 나섰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내버려두어야 한다.
죽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나에겐 내 생명과 바꿔 그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주문이 하나 있으니까,
그러니까…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보내줄 꺼야. 지금은….
시리아스의 붉은 눈동자 속에 마장기와 마주 선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장기의 철로 된 손이 움직이더니 매직 미사일을 발사했다. 먼지구름이 한 차례
인 후, 도를 거꾸로 잡고있는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어깨가 살며시 떨리고 있다.
즐기고 있어, 그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거야.
아마도 내 생각이 맞는다면, 지금 그는 저런 상대를 벨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고 있겠지.
헌의 칼을 든 팔이 축 늘어졌다. 도신(刀身)이 질질 땅에 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헌의 몸이 마장기 나타넬의 앞에 섰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칼은 하늘을 향해 치켜져 올라가고 있었다.
시리아스의 예민한 귀에는 헌의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천인참 종식…역천(逆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