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35/65)

 #5.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군요. 사실 이 정도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래도 변하는 건 없네. 결국 이기는 것은 우리들이야."

 휘이잉-한 줄기 바람이 입구를 헤집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조용하게

 탁자 위를 맴돌았다. 탁자 위에 놓인 한 장의 양피지와 그 위에 얹혀진 넓적한

 돌들이 조금 조금씩 달싹거렸다.

 그러나 탁자를 둘러싸고 서있는 이들은 바람의 그런 짓궂은 장난엔 신경쓰지

 않았고, 그래서 바람은 계속해서 그들의 무관심 속에 막사 안을 돌아다녔다.

 바람의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는 관계로 그는 막사 위에 머무를 수 있었고,

 그 덕에 막사 안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처음 입을 연 사내가 양피지 중앙에 그어진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선은

 아즈탄 협곡을 가로질러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돌들은 아마도 각 군 병사들의 대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투박한 손이 아즈탄 협곡의 지도 위로 가더니 노란 색으로 칠해진 돌을 들어

 협곡 뒤에 갖다 놓았다. 퀘타라스의 마장기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것을 본

 이들의 눈썹이 살짝 치켜져 올라갔다.

 먼젓번의 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 놈들을 움직이실 겁니까?"

 "전쟁은 빨리 끝내는 것이 이롭지."

 "하라와 지그라트를 위한 싸움입니다. 빨리 끝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들의 힘을 얼마나 보여주느냐가 문제입니다."

 투박한 손의 임자는 허허 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내가 자네를 보고 어리다고 하는거야. 전쟁은 그런 우스운 이유로는

 일어나지 않아. 누구나 다 아는 비밀 하나를 말해주지. 우리 니더우드는 불의

 정령력이, 그리고 퀘타라스는 물의 정령력이 강해. 그래서 니더우드엔 환술이

 퀘타라스엔 치유술이 발달했다지…."

 탁자 위에는 전쟁에 대한 얘기는 잠시 들어간 채, 약간 고즈넉한 사내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그러나 바람은 사내의 얘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지,

 이내 막사를 빠져나갔다. 

 한참을 허공에서 춤추던 바람은 남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아까 자신이

 들어갔던 것과 느낌이 비슷한, 그러나 생긴 것은 완전히 틀린 또다른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쾅-! 갑자기 탁자 위를 내려친 주먹에 놀란 바람은 움찔하며 자신의 몸을

 구석으로 숨겼다. 거칠게 기른 수염이 우락부락한 인상을 더해주고 있는 애꾸가

 그 손의 임자였다. 

 사내의 입에선 마치 야수가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퀘타라스의 기사단이 그렇게 형편없었던가! 사막 야만족들의 용병대 하나

 못 이길 정도로! 데스트리어, 말해보시오! 그대는 승리를 장담하지 않았던가?!"

 데스트리어라 불린 흰 갑옷의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사죄의 말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실 용병들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대단한 실력자가 하나 늘어있었습니다."

 "그대의 가슴판에 꽃 한 송이를 세겨준 놈 말이지…."

 애꾸의 꾸짖는 음색이 약간 잦아들었다. 비록 아즈탄 용병 기지 점령엔

 실패했다지만 저 데스트리어라는 이름의 성기사 단장은 보통 실력의 전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성기사 단장답게 고위급의 신성 마법도 쓸 줄 아는

 파라딘(Lord of Temple Knight)이었다. 

 전장에서 뼈가 굵어온 자신조차 저 젊은이를 상대로 몇 합이나 칼을 마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내를 칼도 사용 안하고 팔꿈치만으로

 날려버리다니! 게다가 저 우그러진 체스트(가슴 보호대)는 무엇이란 말인가.  

 애꾸 사내는 잠시 고개를 수그리고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결심을 했는지 눈을 빛내며 명령을 하달했다.

 "좋아, 그런 괴물이 니더우드에 있다면 응당 마장기로 잡아야 하겠지."

 "사용 허가에 감사드립니다!"

 일단의 사내들이 고개를 수그려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본 바람은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듯, 막사를 빠져나와 다시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피냄새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여기저기에 흘리면서, 바람은 남쪽의 에페르타 산맥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키란은 손을 휘저어 여기까지 날아온 실프를 풀어주었다. 그의 손에서 풀려난

 실프는 기쁜 듯이 동굴 안을 몇번 맴돌더니 이내 허공 중으로 사라졌다.

 문득 키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예상보다 더 잘 진행되고 있군."

 키란의 말을 한 사내는 동굴 정중앙에 위치한 돌탁자의 상좌에 앉아있는

 허름한 로브의 사내였다. 급빛 머리결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옷안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사내가 말을 마치자 옆에 앉아있던 녹색 머리칼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키란, 당신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나요?"

 "넣지 못했습니다, 피리디카 님."

 녹색 머리칼의 여인은 안 되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동정어린 시선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보다 훨씬 높은 존재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우리들의 마리오네트가 짝을 찾았다."

 "그의 진정한 소울 페어를."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영혼의 동반자를."

 "우리의 계획을 이루어줄 바로 그자를."

 머리칼을 지닌 일단의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돌아가며 각기 한 마디씩을

 내뱉었고, 상좌에 앉아있던 금발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있는 카린을 향해 말을 건넸다.

 "한 가지 일이 더 남아있다, 카린."

 "알고 있습니다, 로드."

 그리고 그림자는 다시 침묵했다. 카린이 떠나간 동굴 안엔 모두 일곱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금발의 사내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뻗으며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우리들이 하려는 일을 엘시타이께서도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대표분들은 용제와 접촉한 결과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그 말에 눈같이 흰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녀는

 짧게 자신들의 왕이 바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이번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짤막한, 그러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금발의 사내는 여인의

 그 대답에 만족했다. 동굴에 모인 이들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일렁거렸다.

 순간 그들의 입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목소리를 형성했다.

 "우리들 꿈속의 또다른 세상을 위해! 엘시타이의 이해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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