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10/65)

 #5.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중원의 변두리에 위치한 산, 금불산(金佛山). 

 산의 형세가 마치 금으로 만든 불상과 같다 하여 붙여진 거창한 이름의 산 속에

 언뜻 언뜻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보라색 머리칼을 흩날리는 소년이었다. 그는 겨울임에도 잎이 무성한 잣나무의

 굵은 가지에 몸을 의지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추격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소년, 선우 헌은 땅 위에 가뿐히 착지하여,

 엉성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그 사이로 들어갔다. 나뭇잎은 비록 다 떨어졌지만,

 워낙 가지가 무성하여 밖에선 잘 보이진 않는 그곳에 붉은 머리칼을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불꽃같은 머리칼 사이로 뾰족하게 세 갈래진 귀가

 뚜렷이 보였다. 

 마침 여인은 가발을 고쳐 쓰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가발을 써보는지 서툴게

 헛손질을 하는 시리아스를 보던 헌은,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이 직접 그녀의

 머리에 가발을 고정시켜 주었다. 그 가발은 안에 짧은 쇠바늘로 고정할 수

 있어서 웬만한 바람에도 날려가지 않는 신식이었다.

 이제 가발을 써서 검은색 단발을 하게 된 시리아스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뒤를 돌아보며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요. 그리고 말 좀 낮추면 안돼요? 제가 부담스럽잖아요."

 헌은 시리아스의 단발을 한번 손으로 다듬어 준 다음, 그녀의 옆에 주저앉아

 계속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불은 지른 거예요?"

 "아, 그거요?"

 헌은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투명한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가루를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조금 집어내어 땅 위에 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가루를  뿌린 자리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죠."

 헌은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어 넘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소년을 보며

 시리아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직접 당신 집에 지르지 않고 그 부잣집에 불을 지른 거죠?"

 "그래야 의심을 안 받을 테니까요. 직접 내 집을 태운다면 사람들이

 의심을 하게 되죠. 저 녀석은 평상시 원한이 많은 놈이니 누군가가

 보복으로 방화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그렇게

 다른 사람의 집에 불이 나서 옮겨 붙어 탄 것이라면 그런 의심도 안 나지

 않겠어요?"

 "흐음…그렇군요…."

 시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헌이 들고 있는 약병 속의 가루를 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소년의 부탁으로 발화의 주문을 걸어놓은 것으로, 처형일 직전

 소년이 왕보단 집 창고 옆의 나뭇가지에 발라놓은 것이었다. 

 "정말 주도면밀한 성격이군요…."

 "후훗, 칭찬으로 들을께요." 

 소년은 멎적게 웃으며 시리아스가 땅바닥에 고이 접어 놓아둔 비단옷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길게 해서 자신의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매었다.

 "도대체 얼마나 들어있는 거예요?"

 시리아스는 소년의 허리 아래로 축 쳐져 바랑같이 되어버린 옷을 가리키며

 물었고, 소년은 다시 멎적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태까지 모아왔던 보석들하고 전출소에서 받아온 수표를 솜에 싸서 여기저기에 

 누벼두었죠. 좀 무거웠나요?"

 "조금은요. 이걸 입은 순간 완전히 뚱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으니까요."

 "뱃대기가 부르지 않으면 그건 귀족 취급도 못 받죠."

 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고, 시리아스도 역시 말없이 조용히 헌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의 모습은 이내 무성한 구상나무의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한참 길을 가던 시리아스는 자신의 앞에서 길을 찾고 있던 선우 헌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고, 헌은 별 짜증도 내지 않으며 대답해주었다.

 "어떻게 하면 장기 사이로 칼을 집어넣을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수련의 결과…라고만 말하면 너무 성의가 없는 대답일까요?"

 헌은 이마에 난 땀방울을 헤치며 뒤로 돌아보았고, 시리아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방화복, 다시 한번 보여줄래요?"

 "얼마든지요."

 헌은 시리아스의 손에 예전 야율산이 만들어 주었던 그 방화복을 건네주었다.

 시리아스는 그것을 받아 자세히 살피더니 복부 부근에 난 어느 구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내 손가락에서 빛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방화복 반대편 구멍으로 불의 정령 살라만더가 튀어나왔다.

 시리아스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정말 안 타네요…. 그를, 야율산이란 남자를 믿었나요?"

 "아뇨, 제가 한 검사 결과를 믿었죠.'

 헌은 다시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시리아스는 왠지 슬퍼보이는 그런 그의

 미소에서 고개를 돌리며, 다시 방화복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헌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런데 방화복을 둘러 구멍을 내는 것은 당신이 직접 한 거잖아요."

 "뭐, 야율산의 작업 방법은 배우기 쉬우니까요."

 헌은 나직하게 웃었다. 방화복의 복부에다 구멍을 판 후,

 그것을 방화복의 겉을 따라 빙 돌려서 반대쪽으로 불길이

 뚫고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처형 당일날 시리아스의 불로 된 칼이 헌의 등을 뚫고 나온 것처럼

 보인 것이다.  

 "이제 그런 이야기 그만해요. 앞으로 몇 시진은 더 걸어야 하는데….

 이러다가 지레 지치겠어요."

 "하나만 더 물을께요.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거죠?"

 시리아스의 그 질문에 헌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동…으로 우선 가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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