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7/65)

 #2. 

 시간이 흐른다. 그래, 흐르는 것이 시간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그 의미가 조금 틀려.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질 시간, 예전부터 준비해온 그 시간.

 이제 난 내 멋대로 살 수 있게 됐어.

 그 블러드 엘프가 제대로 날 관통시켜 주기만 한다면….

 그래, 살인 청부업자가 좋겠어.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고 또 경험도 많이 쌓을수 있을테지.

 혹시 알아?

 희대의 살인 청부업자로 이름을 남길지.

 자, 그럼 그 날을 위해 몸을 풀어볼까.

 천천히, 천천히. 서두르지 않는게 좋을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블러드 엘프.

 후훗, 후후후…

 ※     ※     ※  

 그 날이 왔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나와 형장의 입구에 줄을 서고 있었다.

 대개가 멀리서 온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서로들 걸고

 있는 오늘 격투의 결과에 대해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느 쪽에다 걸었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사내였다. 벗어제친 가슴에선

 기름이 좔좔 흐르고 있었다. 시장터에서 돼지고기를 다루고 있는 아삼이란

 사내였다. 그와 마주 얘기하고 있는 사내는 성문 밖에서 무덤을 파는 응칠이다. 

 "아마도 이번 역시 그 망나니 녀석이 한칼에 베지는 못할꺼야. 내가 할아버지께

 듣기로는 그 귀가 뾰족한 마물은 손에서 불을 뿜어내어 사방 십리내에 들어있는

 것은 무엇이든 태워버린다고 했네."

 아삼은 응칠의 거칠한 수염으로 덮힌 턱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쳇, 노인네들 허풍은 알아줘야 해. 그래서 자네는 망나니 녀석이 두 번의

칼질에 그 마물을 벤다는 쪽에 걸었나?"

 "아니, 세 번만에 벤다는 쪽에 걸었네."

 그러자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여인네가 입을 연다. 얼굴에 분을 짖게 바르고

 머리에 아름다운 장식을 두른 것이 꼭 방금 귀족들의 잔칫집에서 나온 것 같다.

 "당신네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난 어젯밤 내가 꼬신 귀족

 나으리에게서 정확한 소식을 들었단 말에요."

 그 말에 솔깃하여 뒤를 돌아보던 두 사내는 이내 입이 찢어져라 웃는다.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내 작은 마누라님 아냐?"

 "헹, 어째서 방 낭랑이 자네 작은 마누라가 되나? 내 작은 마누라지."

 두 사내의 입씨름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인네가 까르르 웃는다.

 그 웃음에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한번씩 그쪽을 돌아다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자기네들의 이야기에 열중한다.

 그러나 여인네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어제 꼬셨다던 귀족

 나으리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두 사내에게 말해준다.  

 "흥, 나 방삼랑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인으로 보이나요?

 어쨌든 그 사람이 말해준 것은 다음과 같아요. 즉 그 블러드 엘프 - 그래요,

 당신들은 마물이라고 했죠? 무식하게 시리. 어쨌든 그 블러드 엘프는 강한

 불의 술을 얻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숲을 불의 마신에게 바친 엘프에요.

 숲을 불의 마신에게 바친다는 건 즉 태워버린다는 얘기예요. 그러니 아삼,

 응칠,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있지마요, 내가 다 창피해지네. 하여간 그렇게

 강력한 불의 술을 쓰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그 망나니 소년도 그 마물에겐

 이기기 힘들다는 거예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춘 방삼랑을 두 사내가 재촉한다.

 "그래서? 결론은 뭐야? 도대체 뭐에다 걸은 거냐구?"

 "재촉하지 말아요! 참 내, 다 큰 어른들이 창피하게시리 교양도 없이 굴어.

 결론은 이거예요. 즉 망나니 소년이 이번엔 지고 그 마물이 새로운 망나니가

 된다는 거죠."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어! 어떻게 그 망나니 녀석이 지는 일이 생길 수

 있냐고? 그런 일은 아마도 이 세상이 끝날 때쯤에야…뭐야, 어떤 놈이

 내 등을…어이쿠!"

 어이쿠 소리가 났을 때 이미 아삼은 그 기름기 좔좔 흐르는 배를 드러내 놓고는

 보기 흉하게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엔 시뻘건 지팡이 자국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응칠과 방삼랑은 놀라 아삼의 얼굴을 지팡이로 후려쳐

 쓰러트려 버린 노인을 바라보았다. 

 매부리코에 쑥 들어간 눈을 한 아주 사나워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눈에 보기에도 화려해 보이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에 걸고 있는

 황금 목걸이나 손에 끼고 있는 값비싼 보석이 박힌 반지들을 볼 때, 그 노인은

 대단한 권세가 이거나 부자이므로, 아삼과 방삼랑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하며 까마귀가 깩깩 거리는 소리로

 아삼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놈! 이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뭣이 어쩌고 어째?! 감히 천민 주제에

 내 앞길을 막은 것만 해도 큰 죄이건만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나에게

 대들다니! 예전같았으면 넌 이미 내 손에 죽어나 있겠지만 내 일이 너무

 바쁘니 할 수 없이 그냥 넘어가도록 한다. 에이, 고얀 천민들 같으니라고!"

 노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지팡이를 쳐들어 아삼의 배때기를 찍어 내린 다음,

 데굴데굴 구르는 그를 지나쳐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있던 아삼은 그 노인이 떠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어떤 할 일없는 귀족이 여기까지

 돈을 걸러 왔나보다 하고 넘어가 버렸다.

 사실 이런 일들은 너무도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귀족같아 보인 노인의 눈이, 아삼을 후려갈길 때나

 호통을 칠 때에도 아무 변화없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     ※

 "어르신, 진심이십니까?"

 "그렇다. 난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다."

 내기의 판돈을 담당하는 곽우량은 자신의 앞에 앉아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는 밉살스런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아끼는 첩에게 저 영감이 마시고 있는 철관음을 주려고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들어와 황금패를 떡 하니 보인 저 노인네가 그것을

 가로채버린 것이다.

 그리고선 하는 말이라니! 사람들이 제일 돈을 안건 쪽에다 걸겠다고!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던지는 은 2천만냥 짜리 어음! 게다가 그것도

 가장 신용있는 산서은호의 어음이다!

 곽우량은 다시 찬찬히 입을 열어 노인의 심중을 떠보았다. 

 "위험부담이 많이 가는 일입니다만…."

 "난 그 위험을 즐기지. 그리고 돈을 잃어도 내가 잃는데 왜 자네가 그렇게

 상관하나?"

 "전 그저 어르신의 재산이 축나실까봐 걱정하는 겁니다요. 그리고 어르신도

 내기에 지시는 것은 별로 기분좋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요."

 "그렇지! 그건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이기기 어려운 내기일수록 거기서

 얻는 쾌감은 크지! 게다가 이기면 난 떼돈을 벌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중에 또다른 내기를 할 때에 그 기쁨이 커지지."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전 더 이상 뭐라고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자넨 날 짜증나게 하는군! 어서 내 이름이나 적어놓게나!

 그리고…내기의 결과를 알려고 올 놈은 내 하인일세. 자신의 이름을

 우돈이라고 하는 이는 통과시키게나."

 "알겠습니다…."

 곽우량은 꼼짝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코가 땅에 닿도록 몸을 숙여

 나가는 노인을 마중했다. 그러나 노인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한방울도

 남지 않은 찻잔을 보며 울분을 터트리며 내기목록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는 목록을 집어들어 노인이 원하던 대로 자신의

 내기목록의 한 줄에다가 크게 '이선우(易先宇)' 라고 적었다.

 그 칸엔 그 이름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위에 조그맣게

 '양측 동시 사망'이라고 쓴 글씨가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