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63/75)

19.

그날 밤 이후 가끔 마주치는 원장은 나를 보면 너무도 어색한 표정으로 짧은 인사만을 주고받고 나를 피해버렸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안스러운 마음과 약간의 설레임을 느꼈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매형과 누나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된 후로 엄마나 누나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이상하게 원장의 얼굴이 엄마와 누나의 얼굴에 오버랩 되면 금방 사정을 해버렸다.

우리 넷은 각자 생활에 전념하며 바쁘게 살아갔다.

누나는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느라 낮에는 거의 집을 비웠고 매형 역시 회사에 출근을 하면 오전은 늘 엄마와 함께 보냈다.

그런 면에선 누나와 매형과 함께 살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넷이 함께 살게 된 후론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들었고, 학원에서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 누나와 매형의 거의 잠들어 있었다.

가끔 샤워를 마친 엄마와 내가 매형의 방과 누나의 방으로 들어가거나, 엄마와 함께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는 동안 원장의 경계심도 조금씩 풀어진 느낌이었다.

원장과 아들의 관계를 훔쳐본 그날 밤이후 원장과 아들이 학원안에서 함께 있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가끔 엄마의 강의를 듣고 있는 그녀의 아들을 보았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학원에 나간지 세달 쯤 지난 여름 밤이었다.

??동철 학생....이리좀 들어와 볼래???

??예...??

오전 늦게 학원에 나와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는 나를 그녀가 불렀다.

??동철 학생...이거 받아...너무 잘 해줘서 특별히 주는 보너스야...엄마한테는 말하지 말고 필요한데 있으면 써요..??

??예?...??

얼떨결에 그녀가 내민 흰색 봉투를 손에 쥐었다.

??동철학생은 언제 봐도 참..보기 좋아 보여...엄마를 닮아서 그런지....참..부러워...??

??아...예...뭘요...??

원장실을 나와서 슬쩍 봉투를 보니 십만원 짜리 수표 열장이 들어있었다.

어려서부터 용돈은 부족함을 모르고 써왔던 터였지만 예상외의 돈이 손에 들어오자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뻣다.

??저기....원장님....??

??어?..왜?...??

엄마의 강의가 끝나길 기다리며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퇴근을 하는 그녀에게 벌떡 일어서며 말을 꺼냈다.

??저...보너스 감사합니다...혹시 시간 괜찬으시면 제가 이걸로 뭘 좀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어?...아....아휴...안그래도 되...그냥 동철학생이 일을 너무 잘해줘서 그런건데...괜찬아..??

??아니요...그냥 그러고 싶은데...안되나요???

??음...그래?...언제가 좋을까???

??괜찬으시면 지금이라도 좋은데...??

그녀가 잠시 생각을 한 후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어디로 갈까?...??

??음..글쎄요..딱히 좋은 곳을 아는 데가 없어서...??

그녀의 옆자리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는 내게 그녀가 물었고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음...비싼거 먹어도 되지?..호호...??

??아...예...좋으실대로..??

그녀는 적당한 장소가 생각 난 듯 차를 출발시켰고 미끄러지듯 내달리는 그녀의 차안은 가득 채워진 달콤한 향기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어때 괜찬지???

??아..예....좋은데요..??

차가 도착한 곳은 일산근처의 한적한 레스토랑이었다.

꽃나무들로 채워진 정원을 지나 통나무로 지어진 레스토랑 안으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익숙한 모습으로 이것저것을 주문한 그녀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약간 어두운 듯한 조명 아래에 감추진 그녀의 잔주름은 보이질 않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그녀의 얼굴 윤곽이 아름답게 보였다.

??안그래도 이런 자리 한번 하고 싶었어....내가 하는 거 없이 늘 바쁘다보니...이렇게 됬네.??

??예...저도 원장님한테 늘 감사했어요..??

이런저런 학원업무에 대한 이야기,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의 대화는 식사 중간에 시킨 포도주가 거의 없어질 즈음 원장의 지나온 삶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는 아들이 열두살 때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뜬 남편을 대신해 학원강사를 하며 아들을 키워온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근데..좀 힘이 드네...아들 때문에...그래서 동철학생이 참 좋아보였어..우리 아들과는 좀 다르게...엄마를 참 편하게 해주는 거 하며...또...??

??저도 마찬가지죠...저라고 뭐 특별한 건 아니구요...그냥...우리또래 남자들이야 다 똑같죠..??

그녀는 아들과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혹시 제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하세요?..힘드신 일이나 고민 있으시면 저희 엄마와 상의하시라는 말...??

??어?...그랬나?...아...그랬다...기억나네...그날 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그날밤일이 다시 떠올랐다.

??알아...안그래도 혜경씨랑 이런 저런 이야기 많이 해왔어...그런데...엄마에게도 못할 말이 있는 거잖아..그래서...??

예상한대로 그녀의 가장 깊은 고민은 아들과의 관계인 듯 싶었다.

이상하게 가슴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포도주에 적당히 취한 기분 탓도 있었고, 자세가 약간 흐트러진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자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스무살도 더 많은 중년의 여인에게 보호본능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저기...원장님....원장님이 가지고 계신 고민...그런 고민...원장님 혼자만은 아닐 거예요..??

??어?...응...그렇겠지...그럴수도 있지...그럴거야...??

그녀는 내가 말한 그녀의 고민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었다.

나의 말에 혼자 읇조리듯 속삭이며 포도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저기..그날 밤이요....그날 밤...한 달 전쯤..??

??어?...언제?...혹시???

??예..맞아요...그날 밤..저...저..그곳에 있..었..어..요..??

그녀는 멍하게 생각을 이어가는듯하더니 이윽고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할말을 잃어 버린 듯 했다.

??원장님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예요....절대로...정말이예요..??

그녀는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저는...??

순간 매형과 엄마에게 누나와의 관계를 고백했던 그날 밤이 생각 났다.

그때의 엄마처럼 그녀도 이 자리를 뛰쳐나가버리지는 않을지 순간적으로 걱정이 되었다.

??저...그게...그때는....??

??괜찬아요...원장님...괜찬아요...제가 그랬죠...엄마와 상의하시라고.....엄마와...원장님...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분들이세요....??

그녀의 놀란 얼굴은 그대로 굳어져 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말이 없었고, 나는 다 비워진 포도주병을 만지작거리며 한병을 더 주문했다.

새로운 포도주를 그녀의 잔에 따라주었다.

반쯤 채워진 포도주잔을 급하게 비워버린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지금 들은 이야기....잘..이해가 안되네...좀 당황스러워....??

??예..맞아요...원장님 생각하시는 대로...저도...엄마를 사랑해요....엄마이기도 하지만 여자로서도 사랑하며 살고 있어요...??

??동...동철 학생....??

나를 부르는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원장님...너무 자책하시거나, 무서워하지 마세요....그냥..다 잘 될거예요..??

술잔을 매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쥐어주었다.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었어요...원장님이 너무 안스러워 보였어요..??

나의 손에 쥐어진 그녀의 손은 땀에 젖어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던 나의 손등에 그녀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내는 그녀의 옆으로 옮겨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원장님...울지 마세요...저는 다 이해해요...저나 엄마도 그래왔어요...??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에 얼룩진 화장이 눈 밑에 번져 있었고, 반사적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쥐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과 얼룩진 화장품을 닦아주었다.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웨이터의 시선을 뒤로 하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레스토랑을 나왔다.

자동차의 뒷 자석에 나란히 안은 후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녀 는 나에게 기댄 채 나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기사님...죄송한데...근처에 쉴 만한대로 좀 가주세요..??

한적한 자유로를 내달리던 차안에서 창밖을 보며 나의 손을 쥐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대리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원장님....??

??나...동철이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괜찬지?...??

놀란 듯이 그녀를 쳐다보는 나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