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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철이 그렇게 노래방에서 우리 둘을 남겨두고 어디로 갔을까, 처남이 걱정되고 미안했지만 그녀는 의외로 덤덤하게 계산을 끝내고 나의 뒤를 따라 차가운 밤거리로 나왔다.
??집에 들어가야겠죠? 시간도 늦었는데....바래다 드릴께요..??
그녀와 나 둘다 동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동철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그녀의 아파트로 다시 들어가야 하나?
그곳에 동철이 기다리고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양쪽 모두 나나 그녀에겐 적지 않을 어색함을 감수해야 할 듯했다.
??좀 춥네 경수씨....나 따뜻한 차 한잔 하고 싶은데....경수씨만 괜찬으면....??
길 건너편 까페의 네온사인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듯 차분히 깜빡이고 있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서있는 나의 팔에 그녀의 두 팔로 나의 팔을 감싸쥐어 왔다.
종업원인 듯 보이는 젊은 남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자리로 안내했다.
??뭐 마실까...난 따뜻한 홍차 마실래...경수씨는...???
??저도 같은 걸로 할께요...??
주문한 차가 나오기 까지 그녀와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창밖으로 보이는 차갑고 한적한 초겨울 풍경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동철을 걱정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일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든....제발 나에게 예전의 사위와 장모의 사이로 돌아 가자는...그런 뜻을 가진 사과의 말은 하지 말기를 빌었다.
그녀가 그런 뜻을 전해온다면, 내 자신에게 약속한 것과는 달리 나약한 내 자신은 그녀에게 범한 무례를 사과하며 동철과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비굴한 말로 그녀의 뜻에 동조해 버릴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런 후에 또 다시 나를 덥쳐 올 패배감과 자책감이 두려웠다...
??휴....이젠 진짜 겨울 냄새가 나는 거 같네....??
따뜻한 찾잔을 두손으로 받쳐든 그녀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어느새 가로수에 나뭇잎이 하나도 남아있질 않네요...??
찻 잔을 감싸쥐고 있는 그녀의 가지런한 손가락을 보며 내가 대답해 주었다.
??경수씨...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 더 이상 경수씨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말 뜻을 정확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뭐라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동철이도 마찬가지 인가봐....이런 내 생각....동철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벌써 다 마셔버려 비어버린 물 컵을 손에 들고 남아 있는 몇 방울의 물을 쥐어 짜내듯 마시곤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경수씨....경수씨 이야기를 듣고 싶어...나 한테 아까 선생님이라고 한 말 말이야....??
혼란스럽던 나의 머릿속을 시원하게 해줄 그녀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지난 세월을 고백하듯 털어 놓았다...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도 미친 짓일지는 몰라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고..그래서 너무 힘들고 괴롭다고...
그녀에게 쏟아 내버리고 싶었던 십여년 동안 간직해왔던 이야기를 십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쏟아 버렸다.
나의 고백을 들은 그녀가 감동에 겨워 나에게 안겨오는 그런 상상을 해온지 십년이 훨씬 넘었지만 나의 상상과는 순서가 많이도 어긋나 있었다.
난 이미 그녀를 안았고, 짐승처럼 그녀의 몸을 탐해버린 후 였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웠고 억울했다..
지금 그녀에게 털어 놓은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게 만들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끝까지 비밀로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침묵이 무겁게 이어지는 동안 머릿속을 휘감았다.
??휴.....그랬구나....그랬어....내가 너무 경수씨를 힘들게 했네....너무 미안해...정말로..경수씨한테 너무 미안해....??
??.............??
또 다시 그녀의 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말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나....어떻게 해....나도 경수씨가....좋아...나의 사위, 나의 제자...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우린 이미 미쳐 있었어....??
??선..생...아니..혜경씨.....??
찻 잔을 들고있는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나....경수씨를 안아주고 싶었어...전에는 미안하고 안스러워서 그랬는데...이젠 아닌거 같아...그냥...경수씨에게 안기고 싶어....나...이래도 될까?....??
당장 그녀를 안고 미친 듯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가슴이 뻥 뚫리며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들어가자...너무 늦었어....??
어디로 들어가자는 말일까...내가 너무 무딘 것일까..그녀의 마음을 확인 했건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 스러웠다.
까페를 나와 그녀가 다시 나의 팔을 감싸 안아 쥐고 그녀의 아파트 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할 때서야 그녀가 들어가자는 곳이 모텔이나 호텔이 아닌 그녀의 아파트였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음습한 생각을 들킨 것 같은 마음에 그녀에게 부끄러워서, 또 다른 아쉬움이 몰려 와서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아파트까지 걸었다.
그녀와 나의 발자국 소리가 늦은 새벽의 조용한 아파트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그녀의 팔은 나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기에 집으로 돌아가야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15층 버튼을 누른 그녀가 나의 품을 파고 들었다.
??경수씨....너무 걱정하지마.....아무 걱정 안 해도 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동철에 대한 나의 걱정을 아는 듯 그녀가 나의 가슴에 더욱 깊숙이 얼굴을 뭍으며 말해 주었다.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입술이 그날 밤처럼 나의 입술에 닿아 왔다.
약간의 망설임을 끝낸 그녀가 나를 이끌었고 이젠 낯설지 않은 그녀의 집에 그렇게 들어갔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집 안에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마시던 나의 눈에 접혀진 채로 식탁위에 놓여진 쪽지가 보였다.
나에게 쪽지를 건네 받은 그녀가 쪽지의 내용을 확인 한 듯 다시 쪽지를 접어서 다시 내게 건네어 주었다.
동철이 쓴 쪽지가 확실한 그것을 펼쳐보았다.
- 엄마, 누나한테 가봐야 할 거 같아..걱정 말고.... 내일 봐...매형한테 잘 해줘...-
짧은 두 줄의 내용을 확인한 나의 가슴이 세차가 요동 쳤고, 나의 억센 손은 쪽지를 손에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