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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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해야할 신혼의 꿈은 뜻하지 않은 충격적인 일로 인해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동철의 말대로 난 너무도 큰 짐을 떠안게 되어버렸다.

지윤은 그날 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동철에게서 듣고 난 후 정신을 놓아버린 듯 했다.

나에게는 좀 쉬고 싶다는 짧은 메시지만을 남기고 아직 정리하지 않은 지윤의 오피스텔에 머물렀다.

어차피 연애 기간 내내 불편했던 회사엔 사표를 내었고 회사 역시 사표를 수리했다.

나름대로 그 계통에서 인정을 받던 터라 조금 쉬고 나면 그녀를 원하는 회사는 많았다.

나 역시 너무도 생각해야할 것이 많았다.

결혼 전과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결혼 전엔 회사에서라도 지윤을 볼 수 있었지만 결혼을 한 지금은 그나마 지윤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으며, 내 마음도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나 나름의 이성적인 고민의 결과에 도달해 있었다.

가끔 지윤에게 전화를 하면 대부분은 전화기가 꺼져있는 상태였고, 안부를 묻는 메시지에 대해 짧은 문자 메시지만이 돌아왔다.

지윤은 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지윤 역시 그날 밤 장모가 느꼈을 부끄러움과 모멸감에 시달리고 있을 테고, 나에게 용서을 빌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적어도 지윤이 보내오는 메시지로 봐서는..

지윤을 당분간은 그냥 그렇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몇 번을 오피스텔로 찾아가 볼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간의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지윤과의 결혼을 끝내지 않으리란 것이었다.

지윤과의 인연을 끊는다면 그로 인한 결과들이 너무도 처참할 것 같았다.

지윤과 동철의 관계, 동철과 장모와의 관계, 장모와 지윤과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나갈지 어느 정도의 예상은 가능했다.

그런 결과에 비하면 우리 넷이 가끔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을 때의 어색함과 불편함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암묵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인정해주면 겉보기엔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족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윤이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나 역시 지윤을 사랑했고, 긴 시간 외롭게 버틴 끝에 얻은 소중한 내 가족들을 포기하기가 싫었다.

나 하나만 입 다물고 조심하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정말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마음 한 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 생각. 처음 동철에게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았던 그 생각..

??아들 동철에게도 열어주었던 그녀의 몸과 마음을 사위인 나도 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내 자신이 싫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솔직한 나의 마음이었다.

내 나름대로의 결론은 도출해 내었지만 지윤에게 나의 결론을 어떻게 전해야할지가 문제였다. 내가 지윤과 가족들을 다 용서해주고 받아들여주는 그런 너그러운 존재로 비추어지는 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모욕일 수 도 있었고 나 역시 그렇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힘을 가지고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은 역시나 동철이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동철이 나의 고민과 지윤, 장모의 관계를 원만히 해결해줄 사람이란 사실에 동철에게 질투 비슷한 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던 어느날, 퇴근시간 회사 로비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동철을 보았다.

??매형....오랫만이예요...나 술 한잔 사줘....??

회사 근처 조용한 호프집에 동철과 마주 앉았다.

동철은 예전처럼 술은 거의 입술만 축이는 정도로 홀짝거리며 나의 반응을 살피곤 이야기를꺼냈다.

??그날은 내가 술에 너무 취했었나봐...매형...??

??응...조금 무리하는 것 같긴 하더라..하하...??

내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해주었지만 동철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난 있자나...매형이 앞으로도 계속 매형이었으면 좋겠어...내가 좀 이기적인건가???

??아냐....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몇 시간의 술자리를 통해 그동안의 상황을 대충 정리하고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동철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우리 둘이 술기운의 힘을 빌어서야 꺼내어 놓을 수 있었던 안건은 동철과 지윤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동철은 어렵게 어렵게 지윤이 원하면 지윤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했다.

장모에겐 벌써 동의를 구한 상황이고 나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나의 뜻을 물었다.

난 이미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는 상태였고, 술기운인지는 몰라도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쉽게 동철의 뜻에 동의해주었다.

그 순간 난 내안에 자리 잡았던 그 생각....

그런 못된 생각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는 건 아닌지 망설였지만, 동철이 탄 택시가 출발한 후에야 그 말을 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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